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 김승희,『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이상 듣기 싫다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설핏 웃음지었다. 사랑(eros)과 죽음(thanatos)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단짝인지는 시인, 당신도 잘 알고 계시지 않은가 말이다.
중학생 때 접했던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은 대개 지산 스님의 입을 빌어 작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대목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여자는 한 몸에 생명과 죽음을 키운다던지... 하는 표현들이다. "어째서 여자는 가슴으론 생명을 키우면서 엉덩이로는 죽음을 만드는지..." 같은 표현들 말이다. 이왕 생각난 김에 몇 구절 인용해보면 아래의 부분들이 나에겐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소설이 지금까지도 나에게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을 중학생 때 읽었다는 폐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어린 나를 망친 세 권의 책을 들자면 주부생활 부록으로 딸려나온 "신혼 첫날밤에서 출산까지"라는 성생활 교재와 김성동의 "만다라" 그리고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이었으리라.
"남자와 여자가 배를 맞대고 이층이 된다는 것은 존재와 세계가 분리의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라는 저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의 법칙과 합일된다는 거지. 세계는 서로 화해하고 존재는 보편적인 인식의 공간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하여 갈등과 투쟁은 무용한 것이 되는 거지.
(...) 이 세상에 이층만큼 허망한 사업이 있을까. 쾌감은 순간이었으며 존재와 세계는 다시 평행선이 되고 마는 것이었으니.....관세음보살. 그 허망감에 치를 떨며 차디찬 방바닥에 이마를 대었을 때, 귀먹는 노승의 탄식 같은 무라!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오는 거였어. 우습게도 화두가 성성해지더군."
이때, 이층이란 표현의 적실성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없지만, 가장 기대되었던 것은 그 일을 통해 세계가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하느냐고 묻는다면... 최소한 그 순간 동안에야 가능하지 않겠나?(애들은 가라~)
"평화, 또는 사랑이라는 말은 일정한 거리를 두었을 때만 빛날 수 있는 단어야. 거리를 좁혔을 때는 이미 죽어버려. 그게 사랑과 평화의 운명이야."
나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거리'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이스라엘의 평화는 똑같이 발음되어도 다른 말이다. 즉, 그 평화의 실체(내용)를 모를 때만 비로소 동의할 수 있다는 거다.
"인간이 늙는다는 것,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 아닐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팽팽한 젊음 그대로 있다면 저 산 같고 바다 같고 하늘과 같은 사랑과 미움과 원한과 그리고 저 욕정을 다 어쩌겠는가. 이것은 그 여자가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줬다는 피의 인연이나 나를 방기하고 도주했었다는 사적 분노 따위를 뛰어넘는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에게 던지는 사랑은 던지는 무게만큼 내게로 반송될 것이었다. 그 여자의 얼굴에 분가루가 남아 있고 사내들에게 던질 눈웃음 따위가 아직 남아 있는 탱탱한 살집이었다면 난 결코 뿌리 깊은 증오를 해제할 수 없었으리라."
내가 김성동에 코박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 그건 아마도 삶의 내력이 비슷했던 까닭...
"여자가 코를 골 때마다 반쯤 떨어진 가짜 속눈썹 한쪽이 엷게 흔들렸다. 화장이 밀린 피부는 거칠었고 나무뿌리 같은 잔주름이 눈가에 얽혀 있었다. 서른, 어쩌면 마흔 살쯤 먹은 노창인지도 몰랐다. 나는 여자의 벗은 하체를 바라보았다. 닭다리처럼 거칠고 메마른 육의 한 가운데에 낡은 칫솔처럼 성긴 음모가 짓밟힌 풀잎처럼 눕혀져 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의 참담한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방매하는 시장의 가축처럼 내던져져 있는 저 여자의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무너지듯 여자의 배 위에 엎드려 이층을 만들었다.
도시는 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었는데로 길 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나는 정거장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차표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사람들 속으로 힘껏 달려갔다."
황석영의 "객지", 최인훈의 "광장" 그리고 김성동의 "만다라",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진 엔딩을 지닌 소설들이었다.
아마도 여성이 출산을 전담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드는 것이 여자의 몸속에 피어나는 삶에 대한 환상일 듯 싶다. 죽음이야 누구에게라도 공평할 테지만... 그런 점에서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는 시인의 욕망은 절대적으로 여성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시인이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죽도록 사랑해서"란 말은 결국 이 둘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란 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죽음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죽도록 사랑해서 ...
붉은 감 한 알,
분꽃 씨앗,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도,
세상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바에야 사랑하며 죽는 것도 괜찮을 터수다.
에라, 사랑이나 실컷하련다.
-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 김승희,『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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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이상 듣기 싫다는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설핏 웃음지었다. 사랑(eros)과 죽음(thanatos)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단짝인지는 시인, 당신도 잘 알고 계시지 않은가 말이다.
중학생 때 접했던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은 대개 지산 스님의 입을 빌어 작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대목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여자는 한 몸에 생명과 죽음을 키운다던지... 하는 표현들이다. "어째서 여자는 가슴으론 생명을 키우면서 엉덩이로는 죽음을 만드는지..." 같은 표현들 말이다. 이왕 생각난 김에 몇 구절 인용해보면 아래의 부분들이 나에겐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소설이 지금까지도 나에게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을 중학생 때 읽었다는 폐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어린 나를 망친 세 권의 책을 들자면 주부생활 부록으로 딸려나온 "신혼 첫날밤에서 출산까지"라는 성생활 교재와 김성동의 "만다라" 그리고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이었으리라.
"남자와 여자가 배를 맞대고 이층이 된다는 것은 존재와 세계가 분리의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라는 저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의 법칙과 합일된다는 거지. 세계는 서로 화해하고 존재는 보편적인 인식의 공간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하여 갈등과 투쟁은 무용한 것이 되는 거지.
(...) 이 세상에 이층만큼 허망한 사업이 있을까. 쾌감은 순간이었으며 존재와 세계는 다시 평행선이 되고 마는 것이었으니.....관세음보살. 그 허망감에 치를 떨며 차디찬 방바닥에 이마를 대었을 때, 귀먹는 노승의 탄식 같은 무라!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오는 거였어. 우습게도 화두가 성성해지더군."
이때, 이층이란 표현의 적실성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없지만, 가장 기대되었던 것은 그 일을 통해 세계가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하느냐고 묻는다면... 최소한 그 순간 동안에야 가능하지 않겠나?(애들은 가라~)
"평화, 또는 사랑이라는 말은 일정한 거리를 두었을 때만 빛날 수 있는 단어야. 거리를 좁혔을 때는 이미 죽어버려. 그게 사랑과 평화의 운명이야."
나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거리'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이스라엘의 평화는 똑같이 발음되어도 다른 말이다. 즉, 그 평화의 실체(내용)를 모를 때만 비로소 동의할 수 있다는 거다.
"인간이 늙는다는 것,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 아닐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팽팽한 젊음 그대로 있다면 저 산 같고 바다 같고 하늘과 같은 사랑과 미움과 원한과 그리고 저 욕정을 다 어쩌겠는가. 이것은 그 여자가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줬다는 피의 인연이나 나를 방기하고 도주했었다는 사적 분노 따위를 뛰어넘는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여자에게 던지는 사랑은 던지는 무게만큼 내게로 반송될 것이었다. 그 여자의 얼굴에 분가루가 남아 있고 사내들에게 던질 눈웃음 따위가 아직 남아 있는 탱탱한 살집이었다면 난 결코 뿌리 깊은 증오를 해제할 수 없었으리라."
내가 김성동에 코박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 그건 아마도 삶의 내력이 비슷했던 까닭...
"여자가 코를 골 때마다 반쯤 떨어진 가짜 속눈썹 한쪽이 엷게 흔들렸다. 화장이 밀린 피부는 거칠었고 나무뿌리 같은 잔주름이 눈가에 얽혀 있었다. 서른, 어쩌면 마흔 살쯤 먹은 노창인지도 몰랐다. 나는 여자의 벗은 하체를 바라보았다. 닭다리처럼 거칠고 메마른 육의 한 가운데에 낡은 칫솔처럼 성긴 음모가 짓밟힌 풀잎처럼 눕혀져 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의 참담한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방매하는 시장의 가축처럼 내던져져 있는 저 여자의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무너지듯 여자의 배 위에 엎드려 이층을 만들었다.
도시는 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었는데로 길 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나는 정거장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차표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사람들 속으로 힘껏 달려갔다."
황석영의 "객지", 최인훈의 "광장" 그리고 김성동의 "만다라",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진 엔딩을 지닌 소설들이었다.
아마도 여성이 출산을 전담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드는 것이 여자의 몸속에 피어나는 삶에 대한 환상일 듯 싶다. 죽음이야 누구에게라도 공평할 테지만... 그런 점에서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는 시인의 욕망은 절대적으로 여성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시인이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죽도록 사랑해서"란 말은 결국 이 둘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란 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죽음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죽도록 사랑해서 ...
붉은 감 한 알,
분꽃 씨앗,
붉게 타오르는 단풍잎도,
세상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바에야 사랑하며 죽는 것도 괜찮을 터수다.
에라, 사랑이나 실컷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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