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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백석 - 고향(故鄕)

故鄕

-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1938년, 삼천리문학>


백석의 이 시 "고향"은 그 자체로 참 따스하다. 하나의 에피소드, 하나의 국면만으로  구축된, 보기에 따라 참 단순한 시(미의 세계)인데, 고향이란 무엇인지 참으로 정겹다. 나는 혼자 앓아 누웠다. 굳이 여러 말하지 않아도 이 정황만으로도 충분히 쓸쓸하다. 앓아누운 탓에 어느 아침 의원을 만났는데, 인상은 좋지만 시인은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쓸쓸하다. 그러다 고향 이야기로 말문을 틔운다.
알고보니 아버지의 친구다. 몇 마디 대화, 고향 이야기를 하고 나니 묵묵하니 맥이나 짚던 의원은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아버지 친구가 된다. 백석에겐 고향 정주 자체가 부처님 품 속인 거다.

이 무렵의 그는 "자야"와 부모 사이에 참 많은 고민을 끌어 안고 사는 젊은 시인이었을 텐데, 그의 시는 참 따숩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