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의 들꽃
- 문효치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거추장스런 이름에 갇히기 보다는
그냥 이렇게
맑은 바람 속에 잠시 머물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즐거움
두꺼운 이름에 눌려
정말 내 모습이 일그러지기보다는
하늘의 한 모서리를
조금 차지하고 서 있다가
흙으로 바스라져
내가 섰던 그 자리
다시 하늘이 채워지면
거기 한 모금의 향기로 날아다닐 테니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한 송이 ‘자유’로 서 있고 싶을 뿐.
*
올해(2011년) 제23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문효치 시인은 1943년생으로 9권의 시집 이외에도 몇 권의 기행집과 산문집을 상재해두고 있는 원로 시인이다. 글 쓰는 사람치고 방랑이든 여행이든 길 떠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만 문효치 시인은 별도의 여행에세이를 펴낼 만큼 여행을, 특히 역사기행을 좋아하는 시인이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공주(公州) 공산성(公山城)은 사적 제12호로 한성 인근에 도읍하고 있던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한성 일대를 빼앗긴 백제가 절치부심하여 국력을 회복하고,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0여 년간 백제의 도읍으로 있었던 지금의 공주(웅진)를 지키기 위해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본래는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고쳤다.
고조선 이래 한반도에서 한민족을 지켜온 가장 뛰어난 군사시설은 산의 지세를 이용하여 만든 산성(山城)이었다.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냈던 고구려는 예로부터 ‘산성의 나라’로 불렸고, 고려 시대 민초들이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친 곳 역시 산성이었다. 지금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설악산 권금성(權金城)은 고려 고종(1253) 40년에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가 위해 권씨와 김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이 하룻밤 만에 성을 세웠다 하여 권금성이라 불린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산 어디에나 산성의 흔적이 있는데 공주의 공산성은 세워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백제의 고도 공주를 1500년 넘게 지켜온 산성이다.
백제 멸망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고,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 인조 2년(1624)이괄의 난에 쫓겨 인조가 몸을 피했던 곳이기도 하다. 광해군을 내쫓고 조선 16대 임금이 된 인조가 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실패해 일어난 정변이 이괄의 난이었다. 평안도 일대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괄의 군세에 밀려 공주까지 피난해야 했던 인조는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기에 수행하는 신하들도 적었고, 그 자신도 초라한 행색으로 공주 인근에 이르러 하루를 묵게 되었다.
왕은 때때로 공산성에 올라 멀리 북쪽에 두고 온 한양을 근심스럽게 바라보곤 하였다. 인근의 부호인 임씨 집에서 한 광주리에 음식을 푸짐하게 담아 왕께 진상하였다. 조심스럽게 덮은 보자기를 걷어내니 콩고물에 무친 떡이 가득 하였다. 그래도 명색이 임금이었기에 인근 백성 중 어떤 이가 임금에게 떡을 진상했는데 배가 고팠던 인조가 이를 맛있게 먹은 뒤 신하에게 “이렇게 맛있는 떡의 이름은 무엇인가” 물었지만 신하들 중에도 음식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인조는 재차 “그럼, 떡을 진상한 백성은 누구냐?”고 물었다. 신하는 진상한 사람의 이름은 모르고 다만 인근에 사는 성이 임가라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자 인조는 “그렇다면 이처럼 맛있는 떡의 이름을 지금부터 임 아무개가 썰어서 만든 떡이니 ‘임절미(任絶米)’라고 부르도록 하라.”고 했다는데 일설에는 ‘임씨가 만든 가장 맛있는 떡 절미(絶味)’라 하여 임절미(任絶味)라고도 한다. 차츰 변하여 현재와 같은 ‘인절미’가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많았던 임금으로 꼽자면 누구나 ‘연산군’을 생각하겠지만 내 개인적으론 선조와 인조 역시 ‘연산군’ 못지않게, 사실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점을 놓고 보자면 인조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인조는 1595년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 뒤에 元宗으로 추존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인조가 한양이 아닌 해주에서 출생한 것은 왜구의 침입으로 왕족들이 해주로 피신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처럼 전란의 와중에 태어난 왕족이 훗날 왕위에 올랐는데 전란을 막기는커녕 되레 불러들이고, 훗날에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손자마저 비명에 죽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능하고 패악한 임금이 아니었을까.
인절미 이외에도 인조와 관련한 유래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 역시 이괄의 난과 관련이 깊다. 피난길에 먹은 맛난 물고기에 즉석에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지만 전란이 끝나 환궁한 뒤 궁에서 먹은 ‘은어’는 옛 맛이 아니었기에 인조는 ‘도로(다시) 묵’이라 부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이야기들이 민간에 전승되어 왔다는 것만으로도 인조가 겪어야 했던 비극과 그 때문에 덩달아 고초를 겪어야 했을 민초들의 인식이 어떠했을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효치 시인의 시에서 참 멀리 왔지만 「공산성의 들꽃」에서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은듯하여 길게 풀어 보았다.
이름을 붙이지 말아다오
한 송이 ‘자유’로 서 있고 싶을 뿐.
그것이 망국의 한(恨)과 비애가 알알이 맺힌 역사의 현장에 피어난 한 송이 들꽃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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