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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기형도 - 비가2:붉은달

비가 2
---- 붉은 달


기형도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히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 나오면,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


언젠가 요설(饒舌)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함"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예술은 낭비의 속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미메시스의 개념으로 파악하든, 다른 무엇으로 파악하든 모든 예술은 기본적으로 낭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인간의 사랑과 공통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상실 혹은 소멸)을 초월하려는 헛된 의욕에 기반한다. 만약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면 구태여 존재하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므로 낭비라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의 현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감동을 위해 장치된 수식들이 낭비의 범주에 든다. 지나치게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해보면 만약 저 위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삶의 허망함'이라면 사실 그 객관적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에겐 그저 한마디 "삶은 허망하다" 혹은 "삶의 인연, 관계는 허망하다"란 한 마디면 족하다. 문학은 은폐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쓸데없이" 많은 말을 지껄이도록 되어 있는 예술이다. 다른 예술들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 어째서 인간의 사랑은 허망한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후세로 이어가기 위해 생식활동을 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쾌락을 위해 혹은 갖은 이유로 허무를 반복한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으므로 무의미하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굿윌헌팅>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넌 진정한 상실감을 모른다. 그건 타인을 네 자신보다 사랑할 때 느끼는 거니까." 기형도의 이 시에 붙은 제목이 "비가"인 까닭? 타인을 사랑한다는 허무의 반복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삶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세상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기 위해 온 것이다. 기형도의 이 시에서 느껴지는 내 감각은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