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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이하석 - 구두

구두

- 이하석

풀덤불 속에 입을 벌리고 누워
구두는 뒷굽이나마 갈고 싶어한다, 풀들 속으로
난 작은 길을 가고 싶어하며, 어디로든
가 버릴 것들을 놓아 주면서.

주물 공장 최 반장은 토요일에 그를 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최씨의 바지 밑으로 그는 끈이 풀렸고
뒷굽이 너무 닳아 있었다. 일년 가까이
그는 벌겋게 달아 있었다, 술과 불이 어울어진
최씨의 온몸 밑에서. 내던져진 채
그는 이제 가고 싶은 곳을 잊었다,
최씨의 여자 속을 걸어가는 허약한 다리 대신
차가운 빗물을 맑게 담고서.

문득 흐르던 구름 하나가 구두 속에 깃들어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그래도 최씨의 구두는
뒷굽에 매달린다.

<이하석,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시인선8, 문학과지성사, 1980>


*


처음부터 내 닉이 바람구두로 안착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대학 때 별명이었고, 뒤늦게 인터넷을 시작하다보니 적당한 닉이 없어 이메일 계정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 무심결에 영어로 바람구두를 뭐라해야할까 싶어 생각해낸 것이 windshoes였다.

바람이 wind고 구두가 shoes니까 하는 마음에서 홀로 간단히 해결한 닉네임이었던 셈이다. 네 글자 닉네임이 흔치 않았다. 내가 처음 인터넷을 할 때만하더라도...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구두라고 불렀는데... 구두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아서 그런지... 바람은 웬지 멋부리는 듯 하여 부담스럽기도 하고 해서 구두라고 불리우는 게 좀더 편하다.

구두...

우리 문학사에 제법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구두가 몇 켤레있다.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가 있고, 시인 이문재의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러나 내게 처음 구두의 이미지가 선명해지게 한 시는 이하석의 "구두"란 제목의 시였다.

이 시는 정황만으로 이루어진다.

주물 공장 최 반장의 구두.

바려진 구두.
끈이 풀렸고, 오랫동안 술과 불이 어우러진
가고 싶은 곳을 잊은 구두.

시적 화자는 무생물인 버려진 구두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누구나 사람이다. 한 때는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우리들... 나이를 먹으면 입부터 맛이 간다고 했던가. 어려서는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 예를 들어 아무리 묽게 끓였더라도 언제나 맛있었던 카레라이스나 간장으로 양념한 불고기, 매콤달콤한 떡볶이... 무엇하나 입에 착착 붙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천원으로 충분히 느꼈을 기쁨은 이제 10만원 아니 백만원으로도 그만큼 기뻐지지 않는다. 구름이 내 속에 담겨 어디든 가자하는데... 나는 아무 곳도 가고 싶어지지 않는다. 구두여! 구두여! 구두는 세월따라 걸음에 녹아 밑창이 닳고, 가죽은 헐거워지고, 끈도 끊어져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버림받는다. 버려지는 건 구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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