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
- 김은경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 속옷을 갈아입다
상처에 눈 머무는 순간이 있지
훔쳐봄을 의식하지 않은 맨몸일 때 가령 상처는
가시라기보다는 빨강 도드라진 꽃눈일 텐데
눈물로 돋을새김 한 천년의 미소래도 무방할 텐데
어디에 박혔건 내력이야 한결같을 테지만
죽지 않았으니 상처도 남은 것 그리 믿으면
더 억울할 일도 없을까
오래전 당신은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또 이름 모를
그대에게 교환될 수 없는 상처를 보냈네
403호로 배달된 상처 한 상자를 대신 받은 기억 있고
쓰레기 더미 속 상처를 기쁘게 주워 입기도 했네
지나갔으니 이유는 묻지 않겠어 당신
왜 하필 내게 상처를 주었는지
하지만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
내게는 꽉 끼었지 그래 나는 아팠었지
천진한 햇살마저 나는 조금 아팠겠지
이제 그때만큼 아프지 않아
난 다 자랐으니까 폴리백처럼 가벼워졌으니까
(껴안고 사랑할 순 없어도
버릴 수도 없는 일이잖아!)
이제 난 눈물 없는 노래도 부를 줄 알아
生이 너무 즐거운 비명 같은 날이면 바람 부는
구름 속을 홀로 산책하겠어
새로 산 티베트풍 모자를 덮어쓰고 경쾌한
도트 무늬 스커트를 허리에 걸치고
한번쯤은 기꺼이, 가벼운 외투 같은 상처를
장롱에서 꺼내 입어볼게 옛날 옛적
당신에게 받은 상처를
선물인 듯 간직할게
세세만년 전 당신이여
그러면 정말 안녕
<출처> 김은경, 『실천문학』, 2009년 봄호(통권 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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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생년을 보니 1976년생이다. 아주 나이가 많은 원로시인이 아닌 다음엔 시인들의 생년을 잘 살피지 않는데 어떤 까닭인지 모르지만 이 시인의 생년을 살피게 되었다. 나랑 여섯 살 차이다. 젊지도 그렇다고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다.
사랑 때문에 아프기엔 어딘지 쪽팔리고, 사랑 없이 살기엔 아직 너무 뜨거운 나이다. 과연 그럴 나이가 있다면 말이다. 『실천문학』에 실린 두 편의 시 「오래된 골목」과 더불어 읽었는데 두 편 모두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는 왜? 왜 이 시들이 이토록 경쾌하게 받아들여지는 걸까.
그건 아마도 이 시에서 보이는 ‘아픔’이 의복의 심상 체계, 다시 말해 상품이나 패션 소품의 나열이란 방식으로 연계되고 때문이리라. ‘속옷’에서 ‘상처 한 상자’,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 ‘새로 산 티베트풍 모자’, ‘도트 무늬 스커트’, ‘가벼운 외투’에 이르는 연상들은 속옷에서 외투로 그리고 다시 상처 한 상자를 포장해서 반품해버리거나 쓰레기 더미 속에 던져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껴안고 사랑할 순 없어도 버릴 수도 없는 것’, 그것이겠지. 사랑의 흔적들과 안녕하는 방법이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