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한국시

정우영 - 초경


초경 


- 정우영


  아직 봄이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저녁나절이었다.

  허접한 눈으로 헌 신문 뒤적거리고 있는데,
  여든 넘은 어머님이 불쑥 물으신다.
  자네는 봄이 뭐라고 생각하나?
  봄이요? 해 놓고 답변이 궁색하다.
  아지랑이야.
  눈부터 뽀얀 아지랑이 속에 빠져들며 어머님 스스로 대꾸했다.
내가 양지뜸에서 나물 뜯고 있던 열세 살 때야. 초록 아지랑이
가 다가와 속삭이더니 나를 살짝 휘감아선 날아가는 거야. 난 어
쩔 줄 몰라 아지랑이 꽉 붙잡고 있었지. 아지랑이는 한참을 날아
산등성이에 나를 내려놓았어. 그러고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초록
저고리를 슬근 벗어 걸어 두는 것인데, 요상도 해라. 그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초록 싹이 돋는 거야. 깜짝 놀란 난 하초를 지렸는
데 초록 물이 배어 나왔어. 초경이야. 그 후로는 이상하게 봄보다
먼저 아지랑이가 찾아와. 그러면 난 어김없이 초경을 앓지.
  아지랑이와 어우러진 어머님 목소리 나른하게 멀어지더니
  내 허접한 눈에 초록 물 배어든다.


<시와 사상, 2007, 여름호>


*

아직 봄이라 하기엔 이른 저녁나절, 여든 넘은 노모 앞에서 신문을 읽는 시인에게
노모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봄이 뭐냐고?"


"무엇이냐? 왜?"
란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철학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길고 긴 우회로들을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본성"이 무엇이냐는 다른 질문과 엮이게 되기 때문이다. 하
지만 그건 철학의 몫이다. 문학은, 특히 시(詩)는 철학과 비교했을 때 결코 우회하는 장르가 아니다. 시에서 드러냄은 숨김을 위한 것이고, 숨기는 것은 드러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숨김과 드러냄의 긴장의 숨바꼭질이 주는 긴장을 어떤 이는 "낯설게 하기"라고 부르지만 "낯설게 하기"가 주는 생경함은 시의 폭발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긴 어렵다.


시인은 봄이 무어냐고 묻는 노모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대신
우리에게 노모가 생각하는 봄의 몸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봄의 본성을 보여준다.


초경(初經)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하석 - 구두  (0) 2011.07.12
이문재 - 푸른 곰팡이  (0) 2011.07.11
김선우 - 목포항  (4) 2011.07.01
임현정 - 가슴을 바꾸다  (0) 2011.06.30
김은경 - 뜨거운 안녕  (0) 2011.06.29
나태주 - 지상에서의 며칠  (0) 2011.06.27
이병률 - 사랑의 역사  (0) 2011.06.23
고정희 - 강가에서  (0) 2011.06.22
백무산 - 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0) 2011.06.21
조은 - 섬  (0) 2011.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