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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임현정 - 가슴을 바꾸다

가슴을 바꾸다


- 임현정



한복저고리를 늘리러 간 길

젖이 불어서 안 잠긴다는 말에
점원이 웃는다.


요즘 사람들 젖이란 말 안 써요.



뽀얀 젖비린내를 빠는

아기의 조그만 입술과
한 세상이 잠든
고요한 한낮과
아랫목 같은 더운 포옹이
그 말랑말랑한 말 속에 담겨 있는데


촌스럽다며

줄자로 재어준 가슴이라는 말
브래지어 안에 꽁꽁 숨은 그 말
한바탕 빨리고 나서 쭉 쭈그러든 젖통을
주워담은 적이 없는 그 말


그 말로 바꿔달란다.



저고리를 늘리러 갔다

젖 대신 가슴으로 바꿔 달다.


<출처> 임현정,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통권 143호)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김춘수의 시(詩)에서 꽃의 실재(實在)가 무엇이든 꽃이라 호명(呼名)될 때 그것은 몸짓에서 꽃이라는 실존(實存)이 된다. 자기존재감(自己存在感)이란 사실, 이처럼 실재와 실존이 만났을 때에만 꽃피울 수 있는 감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내가 그것이며, 남도 그것이라 불러줄 때 비로소 존재가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뽀얀 젖비린내를 빠는/ 아기의 조그만 입술과/ 한 세상이 잠든/ 고요한 한낮과/ 아랫목 같은 더운 포옹”
이 담겨 있는 말랑말랑한 말을 세상은 브래지어 안에 꽁꽁 숨겨두라고 한다. 그러나 “촌스럽다며/ 줄자로 재어준 가슴이라는 말”“한바탕 빨리고 나서 쭉 쭈그러든 젖통”이라는 실재와 실존을 담아낼 수 없는 말이다. 임현정 시인의 ‘말랑말랑한 젖’은 김춘수 시인의 「꽃」과 같은 주제를 노래하지만 세상은 정반대로 불러준다. 시인은 ‘젖’이라 부르고, ‘젖’이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세상은 매순간 꼭꼭 짚어서 ‘가슴’이라 교정해준다. 아니, 교체해준다. 아니, 강제하고 만다. “젖 대신 가슴으로 바꿔” 달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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