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출처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시(詩)'라는 장르만큼 모호함의 명징성에 기대고 있는 장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호함의 명징성'이란 형용모순이다. 동양에서 '포엠(Poem)' 즉, 시(詩)는 '말씀언(言)' 더하기 '절사(侍)'인데 이것은 동양에서의 시가 불교의 정신, 불교의 법어(法語)가 표현되는 방식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법은 가섭존자에서 아난존자로 이어지고 그것이 28대 달마가 동쪽으로 와 혜가에게 이어졌다. 불교에서는 달마를 1조로, 혜가를 2조, 승찬을 3조, 도신, 홍인, 혜능을 6조라 하여 불조(佛祖)의 법맥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3조 승찬 대사가 불자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위해 지은 것이 「신심명(信心銘)」이다. 「신심명」이란 '믿을 신(信), 마음 심(心), 새길 명(銘)'이란 뜻 그대로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큰 깨달음은 바로 마음을 믿는데 있다는 말인데, 이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기도록 하기 위해 불교의 깨달음을 '사언(四言) 이구(二句)' '584자(字)', 73개의 게송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 73번째 게송이 바로 "言語道斷 非去來今(언어도단 비거래금)"이다.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말도 안되는 소리'란 의미로 변질되었지만 이 말은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언어(言語)로 표현될 수 없는 "不立文字(불립문자)"의 경지에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진리란 말이나 문자에 의해 전해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말 자체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한계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신심명」 중 어느 한 구절도 어려운 한자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 해석 역시 만 가지 갈래가 있다.
도리(道理)를 밝히려는 불교의 게송이지만 그 해석이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진리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리라. 마찬가지로 시(詩)의 본질에 이르는 길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하고 답하여 왔지만, 이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그 모든 정의가 시의 정의이며 이것은 오류의 역사인 동시에 그 나름 진리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르네 웰렉(Rene Welek)과 오스틴 워렌(Austain Warren)은 '시란 무엇인가'는 해명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이를 대신해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로 '운율과 은유'에 주목했다. 그러나 운율과 은유라는 형식에만 주목한다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놓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통칭하여 '시(詩)'라고 말하지만 서구에서 '시(詩)'라는 용어는 '포엠(poem)과 '포에지(poesy)로 구분된다. 불어는 시인이 만들어낸 구체적인 시 작품을 가리키고, 포에지는 포엠이라는 구체적인 작품으로서 완성될 때까지의 '시 정신'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엠과 포에지'는 시를 구성하는 '외연(형식)과 내면(정신)'으로 어느 한 가지도 놓칠 수 없는 요소이다. 언어로서의 형식과 시인의 정신이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중첩되어 완성되는 시는 언어로 직조된 수수께끼이다. 시에서의 '제목(title)'이 갖는 의미는 언어의 미로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미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김선우의 시 "낙화, 첫사랑"은 꽃잎이 지는 광경에 대한 묘사이지만 동시에 '첫사랑'의 심상을 은유하고 있다. 제목을 떼어놓고 보면 그저 흔한 연애시의 한 구절에 불과해 보이던 이 시가 제목 "낙화, 첫사랑"이란 키워드와 함께 놓이면서 의미망이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이 시를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 '게송(偈頌)'과 '시(詩)'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이자 자매이지만 게송이 진리를 드러내고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반면에 시는 겹겹이 쌓인 언어의 틈새 속으로 숨기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시, 역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예술의 본질 중 하나가 '유희'라는 사실을 잊은 까닭이다. 시인이 언어의 유희를 통해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다. 세속의 독자들에게 '깨달음'이란 '즐거움', 그 뒤의 이야기이다. 즐겁게 읽고 난 뒤 당신을 깨워주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시를 읽는 여분의 무언가를 얻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