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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도종환 - 산경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불혹이 될 때까지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산'과 '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산은 그저 그곳에 있게 하면 되고
강은 그저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 가는 것이오
강이 멈추지 않으니
내가 강을 따라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지 않는 것을 오게 하고
흐르는 것을 잡아 세울 수 있나
그저 하늘 아래 허물없이 살아가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