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
- 서정주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 핫슈 : 아편의 일종
*
사람들을 인솔해 미당 서정주의 기념관에 갔을 때,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그의 시에 대한 찬탄을 거듭하며 그의 행적에 대해 눈감거나 그의 행적을 지적하며 이런 시인의 기념관을 세우고, 이런 사람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물론 그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하니 내가 한 마디로 단정지어 왈가왈부하는 건 폭력적인 단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의 속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해 내게 물었다.
이유는 그날 인솔하고 간 사람들에게 미당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역할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위인이 된다는 건, 절묘한 시대, 절묘한 자리에 서 있기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선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곤 한다. 내 나름으론 일개 필부에게도 세상의 흥망에 책임이 있다는 자세로 살고자 하지만, 그걸 남들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인식 없이 그저 열심히 살았는데 공무원이라거나 사회적 지위로 인해 무언가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역사가 흐른 뒤 그 사람을 비판하는 건 쉬워도 막상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자신이 내린 어떤 입장이 항상 옳았다고 자신할 수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이 어떤 입장을 취할 때 그저 흑백으로 구분할 뿐 그 입장을 택하기까지 혹은 선택한 입장에서도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연구자의 몫일 뿐 일반인들에겐 단순히 흑과 백의 이미지로만 남을 뿐이다.
우리는 국어 시간에 청록파 시인들은 훼절하지 않았다고, 이육사와 윤동주는 저항했다고 배웠지만 따지고 보면 이육사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라고 평하기엔 곤란하며(이 말이 이육사 문학사적인 가치와 위상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그의 삶에서 어느 쪽의 비중이 좀더 높았는가를 나름 생각해보았다는 의미이다. 사실 이육사가 활동하던 당시엔 시인 이육사 보다 그의 동생인 이원조가 더 유명했고 이육사는 그의 중형 정도로만 소개될 정도였는데 훗날 이원조가 월북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원조란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윤동주는 일제의 희생자라고 해야지 독립운동가로 구분하긴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청록파 시인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너무 어린 시인들이었다.
이런들 저런들 미당 서정주가 욕먹어 마땅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건, 그런 인식을 저변에 깔고 보려하는 데도 여전히 나의 지조 없는 심미안에는 그의 작품들이 훌륭하더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테마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그것이 참말로 무서웠다. 옳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한 데도, 그의 시는 살아남았다. 예술이 더 오래 갈 것인지, 역사가 더 오래 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정주의 시가 살아남는 한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길고 긴 그림자를 남길 것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무어라고 설명했던가? 머리로는 싫어하는데, 가슴으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던가? 미워하지만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던가? 아니면 역사란 인간을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은 역사의 톱니바퀴에 짓이겨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까?
서정주는 너무 잘 살았다. 그는 너무 잘 살았고, 잘 살아남았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쏟아지는 미움 역시 당연한 일이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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