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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안현미 - 음악처럼, 비처럼

음악처럼, 비처럼

-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술래로 세워놓고 돌아오지 않는 기차를 탔던가
춘천을 떠나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창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눈썹에서 주워온 몇 개의 비애를 안주로 비루를 마실 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한 연인들의 백조는 물 위에서 뒤뚱뒤뚱,
그 뒤뚱뒤뚱거림조차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아직도 찬송가처럼 몇 개의 빗방울 흩뿌리고 있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었지

*

언젠가 <공지천의 사랑은 왜 오래 가는가?>란 짤막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공지천의 사랑이 오래 가는 까닭. 사랑하는 우리에겐 너무 비싸 일반 사람은 도저히 구입할 수 없다는 '은하철도 999'의 티켓 대신 경춘선 왕복 철도표를 끊을 만큼의 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은 춘천보다 먼 곳은 차마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들고, 삐걱이는 침대를 타기엔 아직 너무 순수해서 대신 너른 공지천 백조 보트를 타고 오래도록 다리근육만 혹사한다. 혹시라도 그곳에선 당신의 입술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그러나 무엇보다 공지천의 사랑이 그토록 오래 가는 까닭은? 그때 우리가 너무 가난해서도, 순수해서도 아니다. 지금 그 사람, 그 시절이 내 곁에 없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