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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경미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 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겠지요

*


시를 읽는 일이 쉬울 때는 마음이 가을 안개처럼 야트막하게 가라앉아 아무런 잡생각 없이 눈 앞에 시만 보일 때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명백한 진심 앞에서는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지만 그 행동조차 쉽지 않은 것이고 보면 앞으로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소싯적 한가락 하던 청춘엔 눈 앞에 뵈는 것 아무 것도 없어서 용감하더니 나이 먹으니 보이는 것, 살피게 되는 것만 늘어 발걸음은 더욱 느릿느릿해지고, 언젠가 이 한 걸음 옮기는 것마저 비척거리며 힘들게 생각되면 그 날이 삼베옷 입고 저승 나들이 갈 날일 게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란 충고는 통속적이고, 진부하다.

낯선 말, 낯선 단어를 찾아 고원에 오르고, 늪의 바닥까지 뒤져보았으나 아무리 화려한 말이라도 결국 말일 뿐이란 평범한 진실 앞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꽃 같은 너의 입술은 진부하지만 그보다 더 적당하고, 정확한 표현이 없을 때가 있다. 말이 곧 진심일 때, 통속적이며  진부한 한 마디조차 시인의 천 가지 수식보다 힘이 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만,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만 나의 모든 말을 바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내가 토해내는 세상의 가장 더러운 말도 고스란히 받아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대여, 그조차도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인가. 간신히 조금 밝아지기 위해 내 모든 말을 앗아가고 싶다는 당신의 사랑은... 슬픔도 이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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