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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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는 지난 2001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물론 문학상에 대해서야 여러 가지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또한 상이란 앞으로 올 미래에 대한 투자의 의미보다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찬미의 성격이 더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일단 상을 많이 받은 작가나 시인이란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등 신선할 것도 없는 한물간 간고등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혜순은 잘 늙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인의 가장 큰 딜레마이자 동시에 매력일지 모른다. 시인의 나이는 곧 통찰의 깊이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혜순의 통찰은 나이를 먹지만 그녀의 언어는 여전히 탱글탱글하다.
사실 "잘 익은 사과"는 얼핏 읽어보면 동시와 매우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네요, 나네요, 있네요, 잡수시네요"로 끝나는 문장의 종결어미도 그렇지만 연결되는 심상의 감각들도 그러하다.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청각'으로 시작한 첫째 연부터 네 번째까지는 '소리의 심상'이다. '치르르치르르'라는 의성어로 강조되는 소리의 심상들은 이후 겉으로 보면 자칫 심드렁해보일 만큼 차분하고 절제된 묘사들로 이어진다. 4연까지가 '청각'이라면 5연부터 8연까지는 촉각, 9연과 10연은 후각, 11연부터 마지막 연까지는 시각적 묘사로 연결되고 있는데, 시에서의 시청각적 묘사는 자칫 잘못하면 마치 1960년대의 '총천연색 컬러' 영화를 광고하는 포스터처럼 유치해질 수 있다. 하지만 김혜순 시인은 온통 묘사만으로 꾸며진 "잘 익은 사과"에서 이 같은 위험을 거미처럼 현실에서 치밀하게 뽑아낸 국면들을 삽입함으로써 훌륭하게 극복한다.
시인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바라본 일상의 풍경들을 시계의 물레처럼 '치르르치르르' 돌리며 아라크네가 되어 한 여성이 태어나 살아가는 여러 모습들을 직조해나간다. 그 순간 인생은 둥근 자전거 바퀴처럼 둥근 사과 한 알이 된다. 삶의 시간은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이어지고, 사각사각 사과를 깍아내듯 시인의 자전거 바퀴를 따라 함께 돌고 돌아 마침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의 "큰 사과" -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 잇몸으로 오물오물" - 에서 마무리된다. 인생은 과연 잘 익은 사과 한 알이다. 비록 먹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