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한국시

이병률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 줄 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 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
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
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어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 보아라

*

누군가는 내게 엉엉 소리내어 당신의 슬픔을 보여주고, 간다. 누군가는 내게 당신의 기쁨에 대해 소리내 웃으며 털어내고, 간다. 누군가는 또 내게 당신과 나만이 간직하길 바라는 비밀을 나직하게 들려주고, 간다. 누군가는, 또 누군가는 내게 당신의 가슴을 짖누르는 무거운 돌 하나 들어서 내게 덜어내고, 간다. 모두 가버린 뒤에 내게 남아있는 건 누군가가 보여준 슬픔, 누군가 털어낸 기쁨, 누군가 들려준 비밀, 또 누군가 올려논 돌덩이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친구 아직도 살아있나? 들여다보고 간다. 꿈틀꿈틀 또아리 튼 슬픔과 기쁨, 비밀이 오래 묵은 술처럼 말 없이 삭혀져 간다. 지독하게 쓰고 달콤한 술 한 잔이 내 가슴에서 익어간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