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날 스탈린이 엄청난 독재자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중후반 소련 인민들도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우리는 오늘날 환경문제의 심각함을 알고 있다. 과연 1950년대의 사람들도 그러했을까? 우리는 오늘날 글로벌 미디어로서 TV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과연 1952년 처음으로 미국 전역에 최초로 1년 내내 상시 방송이 진행될 무렵, 오늘날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이 처음 발간된 1985년 무렵 이 책이 주장하던 "가족 이데올로기"의 상당수는 대한민국 사회에선 아직 낯선 이야기였고, 국내에 이 책이 번역된 것이 지난 1997년의 일이니 10년도 지난 후의 이야기이다. 올해가 2005년이므로 이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 벌써 20년 전의 일이 된다. 따라서 기틴스가 이 책에서 주장한 이야기들의 상당수는 이미 다른 국내외 다른 학자들의 대뇌 피질에 흡수되어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어 이제 우리가 스탈린을 비판하듯, 환경문제의 심각함을 알고 있듯 상당한 형태로 축적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지닌 의미가 반감되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가족은 현재에도 여전히 존속하는 시스템이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지속될 전망이란 점에서 이 책이 지닌 의미는 감소하지 않았다. 그건 "가족연구기초"란 강좌에서도, 여성학 분야 이외의 다른 대학의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대부분 이 책을 가족에 대한 기본 교재로 채택한다는 것이 잘 증빙해주고 있다. 흔히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의 최소 단위가 가족이다. "나와 너"는 철학적 담론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 언정 사회학적 담론의 대상은 아니다. 사회의 최소 단위는 3인 이상일 때를 상정한다. 이 책에는 편집자 조 캠플링의 서문이 있는데(아주 마음에 드는 일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가족관련 텍스트들이 부적절하다는 불만"에서 낡은 텍스트들을 걷어치우기 위해서라도 이 책이 필요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서구의 가족 이야기임을 밝힌다. 과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된 사례들은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재미있는 건, 한국 사회가 일부 특수한 사례들을 제외하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례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추측건데 두 가지다. 하나는 가부장제 형성은 세계 전체적인 현상이었다는 것(물론 이 책이 예시하고 있듯 예외도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걸어온 길은 개화기 이후 한국 사회가 걸어온 길(서구화)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론을 포함하여 모두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각각의 질문과 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원인과 사례, 분석으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각각의 장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학문적으로 '가족'하면 대뜸 '여성학' 분야를 연상케 하는 것처럼 이 책 "가족은 없다"가 담고 있는 기본적 틀이 페미니즘적이란 사실을 연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이애너 기틴스는 "가족"과 "가족 이데올로기"를 구분하여 다루려고 노력하지만, 종종 이 두 가지 개념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며 그로인해 단순한 관념이 아닌 물리적인 힘으로 작동한다. 가족에 대한 사회의 고정된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는 법을 제정하게 만들고, 사회적 제관계를 구성해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실체를 지닌다. 기틴스는 1장 '가족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통해 가족이란 개념이 역사적으로 고정불변의 가치를 지닌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모해왔음을 밝힌다. 2장 '가부장제는 가족을 이해하는데 적합한가'에서 저자는 가부장제가 경제적, 사회적, 성적 통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으며 이런 틀 밖에 놓인 여성들은 종종 마녀란 혐의로 박해받았음을, 또한 이런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죽음을 각오한) 일부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보호(억압)의 틀 밖에 놓이길 희망했음을 말한다. 3장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보편적인가?'에서는 문화인류학적 접근과 사례들을 통해 가족이 반드시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다. 심지어 오랫동안 인류의 보편적 체험인 것으로 가정되어 온 '어머니'와 '모정'조차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이를 모든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이 그렇지 않은 다른 사회에 대한 자민족중심적이며 편협된 방법이라 말한다.
타히티에서는 젊은 여성이 공인되고 안정된 혈연관계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되거나 또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 도전에 한 두 명의 아이를 가지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젊은 여성의 아이들을 그녀의 부모나 근친자에게 입양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소녀는 아이에 대한 그녀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어머니임'이 강요되는 일은 무분별한 일이다.(Edholm, 1982:170). <본문 103쪽>
4장 '사람들은 왜 결혼하는가', 5장 '사람들은 왜 자녀를 갖는가', 6장 '여성의 일은 왜 끝이 없는가'에서도 가족에 대하여,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앞서의 장들에서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역사적 사례를 빌어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이 현재까지 의미를 갖는다고 앞서 말했는데, 그것은 여성학(여성학적 관심을 포함한) 분야보다는 도리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까닭은 이 책의 마지막 두 장이 던지는 질문의 묵직함 때문이다. 7장과 8장의 질문은 '국가: 가족 연대의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 '가족은 위기상태에 처해 있는가?'이다. 나는 이 질문이 맞지만 좀더 정확해지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국가"가 아니라 "국가 혹은 자본: 가족연대의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오늘날 '가족은 위기상태에 처해 있는가?'라는 질문의 함의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좌우익의 이론가, 페미니스트와 반(反) 페미니스트들은 일견 혼동되고 서로 상반되는 관점을 놓고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국가, 특히 복지국가의 성장이 실질적으로 가족의 위치와 가족의 '연대'를 강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보다 견고한 가족 연대와 가족 보호를 더욱 쇠퇴시키고 침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에 있다. 양편은 모두 다 '국가'와 '가족'에 대해 다소 전형적인 해석을 하기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경향이 있다. <본문 195쪽>
이른바 가족 쇠퇴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산업화(대가족 중심의 노동력을 요구했던 농경사회의 해체), 도시화(농경사회의 해체 이후 변화된 자본주의 질서가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력 생산 기지로서의 핵가족 제도), 여권 신장 등등 여러가지 이유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변수가 가능하다는 것이긴 하다.
엥겔스는 결혼과 가족이 사유재산의 발달과 적출 상속인의 필요에 의한 역사적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옛날에 사유재산이 없었다면 결혼의 필요성은 없었을 것이며, 미래에도 만일 재산이 없어진다면 다시 결혼의 필요성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문 114쪽>
엥겔스의 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가족 혹은 가정은 자본주의 혹은 국가가 담당해야 할 몫을 가정에 부여함으로써 그 책임을 상당수 모면해왔다. 도시화와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과 노동자(주로 남성으로 구성된)들의 노동력 상실을 방지하려는 차원에서(여성과 어린이 노동의 문제도 있으나 기술발달로 생산력 문제가 해결되고, 점차 노동자들의 의식이 각성하면서 자본은 노동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감소시키고 안정된 노동력 재생산의 가능하게 하기 위해) 가족을 통해 평온과 안정이란 물질적, 정신적 재화(서비스)를 공급하도록 했다. 안정과 평온으로 그득한 "행복한 나의 집"은 근대의 자본이 만들어 낸 풍경이었다. 이는 적어도 남성노동자가 중심인 사회(가부장제 사회)에서 사회적 통제 비용의 많은 부담을 가정이 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말을 다시 바꿔보면 자본주의의 존재 양식이 잉여노동에 기반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란 두 발 달린 자전거가 계속 굴러가기 위해서는 최후의 최후까지 착취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자본의 가장 최후까지 존재하는 식민지는 가정이며, 자본주의가 만일 가사노동에 대해서까지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온존할 수 없다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가족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은 이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국가에 재정적 책임을 지움으로써 '공적'인 것이 되기 전에는 편리하게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국가정책은 무엇보다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았는데, 이 이데올로기는 개념상 남성과 여성, 어린이와 어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사이의 불평등한 대우를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불가피하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가족 연대의 이상을 강화시켰다. <본문 224쪽>
베블런에 의하면 원시시대부터 유한계급에겐 육체노동과 여성의 노동은 가치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런데 오늘날엔 자본주의가 가족의 역할 중 상당 부분을 시장의 기능으로 흡수하거나 대체한다. 즉, 가정이 제공하던 식사는 식당이, 가사노동은 다른 형태의 임금 노동으로 대체된다. 현재 가속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일반적인 정책 방향은 사회복지의 축소를 상정한 것들이다. 만약 위의 가정이 맞다면 국가 혹은 자본은 자살을 결심한 것일까? 근대의 노동 환경이 일부라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물론 사회주의와 임금 노동자들의 각성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자본이 기술발달에 따른 생산력 향상과 노동력 재생산의 안정적 시스템 확보를 위해 노동자의 삶을 좀더 안정적으로 구축해주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국가와 자본은 가족의 해체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잡아가고 있는 것일까?
가족 이데올로기는 현존하는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젠더 체계를 결합시키고 입법화하는 데 절대 필요한 하나의 수단 - 절대 필요한 유일한 수단 - 이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것은 전체 사회 체계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결과로 사람들이 특정한 가족가구 형태에서 서로 살아가고 상호작용하는 것을 중지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합의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함을 의미한다. 가족가구들은 어떠한 형태의 사회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않다. ....<중략>.... 가족 이데올로기가 없었다면, 근대 산업사회와 그 정치 체계는 실제로 매우 달랐을 것이다. 가족 이데올로기가 없다면, 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실체를 재고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며, 같이 살아가고 일을 할 때 좀더 평등하고 서로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본문 244-245쪽>
저자 다이애너 기틴스는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그러나 나는 기틴스의 이 결론이 추구하는 바에 동의하지만 위의 결론 부분에서 가족 이데올로기가 마치 산업구조, 사회구조와 외따로이 떨어진 섬과 같이 존재하는 무엇으로 오해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기틴스가 여러 역사적 사례를 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타히티와는 다른 가족 이데올로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틀(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구조)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다. 다시 환원론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나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것들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이런 구조들이 가족 이데올로기를 규정한 차원이 보다 상위의 차원일 거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다시금 위에서 던졌던 질문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 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가족의 해체를 촉진시킬 수도 있는 복지의 축소 정책을 강행하고 있으며, 강제하고 있는가? 현재까지 고민해 본 나름의 결과는 세계자본의 강화에 비해 과거의 (민족)국가 단위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측면에서 세계 자본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국가 권력이 휘둘리는 것은 아닌가(예를 들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같이)하는 것이고(이 때의 가정 중 하나는 국가가 어느 정도는 그 구성원의 이득을 염두에 둔다는 것, 혹은 국가 권력과 세계 자본이 동일한 지향점을 갖지 않는다는 설정을 내포해야만 한다는 문제가 있다), 제레미 리프킨으로부터 *앙드레 고르에 이르는 노동사회의 종말과 맞물려 지식사회 내지는 아직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생산구조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 선진국(다국적 자본)의 생산구조의 변화가 더이상 노동에 의존하지 않는 구조로 변모해가고 있는 탓에 노동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까닭은 아닌가 하는 것(이 부분은 다시 미래학의 영역이라 해야할까)이다.
*앙드레 고르는 노동일 감축과 자유시간의 증대, 자유시간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문화 활동의 증대가 삶의 중심적인 활동이 되는 사회가 오늘날의 발전된 생산력을 기초로 현실화될 수 있는 조건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이행이라는 대대적인 문명적 변동이 사회 성원의 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극소수에게만 한정된 혜택으로 국한된다면 이는 유례없는 가공할 야만 상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견하고 있다.
'REVIEW > 사회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의 탄생 : 누가 국가를 전쟁으로 이끄는가 - 존 G. 스토신저 | 플래닛미디어(2009) (0) | 2010.12.22 |
---|---|
레드 콤플렉스 - 강준만 외 | 삼인(1997) (0) | 2010.12.01 |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권혁범, 삼인(2004) (0) | 2010.11.19 |
파울로 프레이리 - 희망의 교육학/ 아침이슬(2002) (0) | 2010.10.30 |
김동춘, 『전쟁과사회』, 돌베게, 2000 (0) | 2010.09.15 |
파시즘-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0) | 2010.09.15 |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은이) / 한겨레신문사/ 2004년 (0) | 2010.09.15 |
폴 조아니데스 - Sex - Guide to Getting it on/ 다리미디어(2004) (0) | 2010.09.15 |
최장집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2002) (0) | 2010.09.13 |
기시다 슈 - 성은 환상이다/ 이학사/ 2000 (0) | 2010.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