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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사회과학

김동춘, 『전쟁과사회』, 돌베게, 2000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군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휴전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뀌지 않고 있으며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정치, 한국경제, 한국사회, 한국의 법과 사회심리,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1. 또 다른 전쟁

한국인들(한국사회)은 전쟁 개시일을 전쟁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이를 기억(기념)함으로써 휴전체제를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라 “더 진행되어 끝을 보았어야 할 전쟁의 ‘내키지 않는 정지’ ”로 내면화시켜왔다. 이는 남북한 사이의 긴장이 발생하기만 하면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 사회가 이성을 상실하는 현상을 불러온다. 극한의 대결이 상호 파멸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초래할지라도 일단은 상대방을 응징해야만 한다는 호전적인 주장에 압도당하게 되는 것이다.

‘조국해방전쟁’, ‘미제국주의와 이승만의 반역적 행동’에 의해 촉발된 전쟁으로 한국전쟁을 규정하고, ‘민족’과 ‘인민’을 강조하는 북한의 입장이나 북한의 불법 기습 남침으로 인한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는 남한의 입장은 모두 실제 전쟁으로 인해 불의의 죽음을 당한 ‘인민들’, 지금까지 전쟁 후유증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남북한의 ‘인민들’, 수백만 이산가족, 군에 징집되었다가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입은 병사들의 비참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전쟁은 ‘행위로서의 전쟁’은 종료되었으나 ‘상태로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남북한의 전쟁 체험은 분단과 적대, 군비 지출, 전쟁의 내재화를 통해 남북한을 군사형 사회로 지속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김동춘은 1)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보는 클라우제비츠의 정의에 따라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수단이고, 정치적 의도를 따르는 것”이라 파악한 뒤 역으로 푸코의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국가권력 혹은 지배방식은 전쟁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 질서가 반복, 재생산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입장을 통해 “전쟁 중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은 전쟁 후 한국 정치에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었는가?”라고 묻는다. 이는 다시 “전쟁 중 발생한 일들이 이후 한국정치나 사회에서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있다.

2)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는 틸리의 주장에 입각해 전쟁이란 궁극적으로 국민국가 형성작업의 연장이며, 전쟁과정을 통해 국민국가는 제 모습을 갖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즉, 전쟁은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그것을 근대의 질서로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데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국의 지배집단의 국가형성(state-building)과 국민형성(nation-building)과 정당성 창출의 근거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의 나머지 장들 - 2장 피난, 3장 점령, 4장 학살 - 은 위의 두 가지 문제의식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역사적 실례를 통해 우리 사회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 역사로서의 현재로 기능하는 ‘한국전쟁’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한다.

2. 피난

한국전쟁 기간 중 한국인(남북한)들이 보여준 태도는 생존을 최우선으로 둔 매우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좌우 이념 대립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어느 측으로부터도 처벌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체득된 것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인민군에게,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국군에게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일종의 ‘건국신화’로 기능하며 국가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를 극적으로 부각시켜주는 사건은 ‘피난(Exodus)’으로 한국전쟁의 거의 모든 시기를 통해 남북한 인민들이 선택을 강요받은 결과이다. 그러난 피난은 북한에 의한 ‘인민의 지배’를 긍정하는 것도, 남한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지배를 긍정한 결과이기 보다는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 보존에 치중한 경향에 의한 것일 수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 남북한 전체 민중들이 극적으로 체험한 피난의 경험은 현재의 한국사회가 노출하는 사회적 속성(피난사회)과 일치한다.

전쟁 당시 남한 정부는 온전한 ‘국민국가’, ‘주권국가’의 지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는 국민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이승만의 권력의 마키아벨리적 성격과 국가 자율성 부재). 트로츠키의 말대로   “모든 국가는 폭력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폭력이 정당성을 획득(권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에 의한 통치(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 남한 정부의 국가적 정당성은 반공이라는 부정적 구호 외에는 어떠한 목표도 없었던 이승만 정권이 국가 자체의 수호만을 목적(반공지상주의)으로 한 국가폭력 상황으로 몰아감에 따라 심각하게 훼손당한다. 전쟁이란 곧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도래를 의미하듯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한 민중의 비자발적 기회주의는 자신의 세속적 출세를 위한 자발적 기회주의와 분리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문제는 생존을 위해 밤에는 인공, 낮에는 대한민국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강요에 의한 협력'을 관용으로 눈감아줄 정도의 아량과 여유는 남과 북,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피난행동은 국가가 더 이상 보호자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민중들이 제 살길을 찾는 것이다. 이때 ‘국가’가 무책임한 행동을 보일 경우 민중들이 제 살길을 찾기 위한 이기주의적 행동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만연되면 ‘피난사회’가 되는 것이다.
6.25 발발 직후 피난의 다른 모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자유세계’라는 담론의 허구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국민’이라는 정치공동체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본문 132쪽>


3. 점령

내전으로 출발한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공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발전하였고, 전선은 한반도 남북을 여러 차례 이동하였다. 그 결과 이들 지역 주민들은 ‘국가’가 바뀌는 일을 두 번 이상 겪게 되었다. 점령은 전쟁에서 승리한 측이 패배한 지역의 주민들을 자신의 복속 하에 두는 과정이며, 자신의 정치경제질서를 강압적으로 이식한다. 비록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양측의 상호 점령이 전쟁의 산물이긴 했으나 그 기원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일제 잔재 청산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개혁의 의지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국가 안보는 가장 중요한 국가 목표가 되고, 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국가라는 공동체 유지와 보존의 목적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 과정에서  “국가 조직은 군대 조직과 같이 되고, 국민은 군인이 되고, 국가의 법은 군대에서 통용되는 명령”과 동일시되어 무조건 복종을 강요한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남북한 양측의 점령 정책은 이와 같이 군사적 목적에 종속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치 행위는 곧 전투행위로 간주되어 각료회의나 대의 기구의 심의와 논의 없이 시행되었다. 결국 남북한 양 국가 모두에서 국가는 신(神)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적’과 ‘나’의 이분법을 강요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정한 정치 이념, 즉 이데올로기를 견지하도록 강요하고 사람들을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따라 구분한 다음 자신의 편에 선 사람은 용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으로 취급한다.<본문 193쪽>


이렇듯  “과도하게 정치화된 전쟁 상황에서 국가의 신격화, 신앙 대상화 현상”은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반공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신앙처럼 되며, 국민은 이들 “국가가 표방하는 정치의 신도”가 되어야 했다. 근대 유럽의 종교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이단의 결과는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거친 후 남한에 국가와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이 생겨났으며, 대한민국의 국가 토대를 튼튼하게 해주었다. 분단 상황에서 북한의 호전성은 남한 정권을, 남한의 호전성은 북한 정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적대적 공범자들”이다.

4. 학살

한국에서 정부 수립 이후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국가의 형성(무력기구의 중앙 집중과 국가독점화)기에 해당한다. 국가형성을  “법과 제도가 완비되는 ‘문명화의 과정’ ”이라고 보았을 때, “정부 수립 후의 2년은 국가가 폭력기구를 완전히 독점하는 기관이 되기에는 그리고 국가가 감정 중립적인 조직으로 안정화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전시 작전 과정에서 적을 살해하는 행동은 재판을 통해 적 혹은 적과 내통한 자를 처형하는 일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정당화된’ 공권력 수행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여 전쟁을 수행하면서 적을 살해하거나 법치 체제 아래에서 재판을 통해 처형하는 것은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살인행위이나 ‘정당화된 살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식성과 정당성을 표방하고 있는 국가권력이 사실상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적으로 의심되는’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마구잡이로 처형할 경우 이는 학살로 분류되어야 한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벌어진 폭력, 대량학살은 정부 수립 과정(국가형성)에서 벌어진 정치폭력과 사적인 보복 등의 연장선상에 이루어진 것이며, ‘전투’로서의 전쟁 뒤에 가려져 있는 ‘또 다른 전쟁’으로 민중의 체험과 기억 속에 남겨진 전쟁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대량학살만큼 한국전쟁의 성격과 경과 그리고 의미와 그 결과를 잘 보여주는 사실은 없다. 한국전쟁 전후의 모든 학살은 공권력과 국가기구에 의해 주도된 것  - 사적 보복의 양상을 지니는 경우조차도 결국 전쟁이란 정치적 상황과 군경의 실질적 묵인 하에 이루어졌으며, 규모와 조직적인 면에서도 공권력의 개입에 의한 학살 - 이며, 남북한 양측이 모두 서로를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  - 남북한 간의 전쟁이 통상적인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 -에서 비롯되었고, 남북한 국가 간의 안정된 관계 속에서 돌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해방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정치 갈등이 가장 극적이고 치열한 형태로 분출된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학살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한국전쟁은 1948년 초 이후 국가 수립을 향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이 내전으로 다시 국제전으로 비화된 20세기의 대표적인 전쟁”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건설은 전쟁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국가의 역사는 곧 학살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김동춘은 오늘의 시점에서 누구를 위한 국가 건설이었는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피학살자가 국가건설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들은 그 국가가 어떤 국가이며, 누구의 국가이며, 그 국가의 정치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의 관점에서도 비판되어야 하지만 반쪽 국가가 과연 그러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건설되었어야 했는가?”라는 질문에 의해서도 도전받아야 한다.
전쟁시의 학살은 국가 탄생의 비밀이다. 국가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하게 감추려 한다. 그러나 출생은 대체로 일생을 지배하게 된다, 학살은 먼 과거의 일이지만, 학살을 저지른 국가는 그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본문 285-286쪽>


5. 국가주의를 넘어서

전쟁시 인민군에게 고초를 당한 남한의 지배층과 지식인층은 ‘애국자’가 되었지만, 이미 한국전쟁 과정에서 ‘애국적인’ 국민들이 한강다리를 건너려다가 물에 빠져죽은 일을 알고 있는 대다수 민중들은 국가가 더 이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지 못하며, 또 책임져 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하고 생생한 집단적 학습이었고, 그러한 학습은 이후의 의식적 ․ 무의식적 행동으로 반복되었다. 즉 민중들은 국가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지 못한다고 판단하면서 오직 자신의 살길만을 찾게 되었다. <본문 303-304쪽>


한국전쟁에서 나타났던 국가권력과 국가기구에 의한 학살은 4.19혁명, 베트남전, 5.18광주항쟁에서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무수한 의문사와 녹화사업, 공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인권 침해 등의 상황에서 다시금 반복되었고, 한국전쟁에서 나타났던 지배 권력 집단의 무책임은 이후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위기 사태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형태로 드러난다. 역대 거의 모든 정부에서 관료와 정치인들이 부정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이들은 거의 대부분 곧바로 풀려나 이전과 같은 지위를 누리거나 이전보다 더 나은 지위를 누린다.

전쟁은 비상사태이며, 그것의 정치적 표현은 비상사태체제이다. 휴전 후 50년은 항구적인 비상사태체제였다. 비상시의 기본권 제한조치들, ‘국가안보’를 위한 국민의 기본권 제한, 사상과 토론의 자유 억제 역시 전쟁시 통용된 지배 질서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부역자, 즉 적에게 협력한 자에 대한 처벌도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중략>… 전쟁 당시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사실상 ‘죽은 목숨’과 같았듯이,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은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국가보안법에서 말하는 ‘반국가단체’라는 것은 원래 북한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이제 한국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북한을 이롭게 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었다. …<중략>… ‘피난의 정치’와 ‘무책임의 정치’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온 민중들의 처세의 논리 역시 전투가 종료된 후의 ‘사실상의 전쟁’ 상황 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본문 302-303쪽>


김동춘은 한국전쟁의 양대 당사자인 남북한 정치권력과 국가의 속성은 일본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폭력국가의 유산을 승계한 것이고, 이런 폭력국가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복종적인 의식과 행동이 미처 극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학살이 발생했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 결과가 빚어진 원인을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책임으로 귀결시키기 이전에 먼저  “양측의 지배집단이 형성된 국내외적 조건, 그리고 해방 직후의 정치 갈등이 정치폭력으로 시작하여 결국 무장투쟁,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남북한의 지배집단”이었고, 그 최대 피해자는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남북한 민중들이다. 그렇기에 국가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일단은 민족 중심적 시각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민족 문제를 사회적 ․ 인간적 차원에서 즉 사회 구성원의 차별, 고통과 희생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을 주문한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도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는 한 존중될 수 있는 가치이며, 인간을 노예나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상황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주장하자는 주장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열망은 문명화 ․ 인간화의 한 과정이기는 하나 문명화 ․ 인간화의 종착점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통일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위적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 …<중략>… 우리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통일국가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야 한다. <본문 308쪽>


권인숙은 『대한민국은 군대다』에서  “한국은 국가단위의 힘의 균형에 의해 평화가 유지된다는 논리를 깊이 내면화한 사회”이며, “가해자/ 피해자의 구도에서 가해자만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다는 힘과 평화의 관계에 대한 집단적 경험 논리가 상식이 된 사회”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집단적 경험논리의 체득은 분명히 한국전쟁에 의한 것이었다.

식민지 경험과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적 전쟁 참여, 일본에 대한 미국의 공격과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위에 의한 해방, 이후 강대국에 의한 국토 분할, 한국전쟁과 강대국들의 개입과 그로 인해 얻어진 휴전 등을 겪으면서 형성된 논리는 강한 국가만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고, 국민의 운명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논리에 기초하여 강한 국가만이 평화를 유지할 것이라는 논리는 세 가지 특수성을 낳는다. 첫째는 강한 국가주의 사회의 탄생이고, 둘째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개의 거의 연속적 전쟁을 거친 나라임에도 평화운동이 부재하였고, 셋째는 전쟁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가졌음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깊숙이 군사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 36-37쪽>


이러한 논리 - 강한 국가만이 국민을 보호할 수 있다 - 는 논리는 “국가를 역동적인 주체”로 설정하고 있으며, “근대화 실현의 최선의 단위”로서 국가주의적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이때 민중의 생존을 위한 기회주의(‘피난의 정치’와 ‘무책임의 정치’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온 민중들의 처세의 논리)는 어떻게 국가주의와 결합하는가?( 80년대 진보 세력 혹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논리 역시 권인숙이 비판하는 “강한 국가 건설의 논리”에서 일정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문제는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