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권혁범, 삼인(2004)
"무인도를 꿈꾼다"는 말 속에는 단지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은 아닐 게다. 그 말엔 존 레논의 소박한 무정부주의 찬가 "Imagine"의 노랫말처럼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서의 "천국"도, 딛고 올라서야 할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 오는 "지옥"도, 우리를 옭죄는 "국가"도, 탐욕을 부추기는 "소유"도 없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담고 있다. 나 하나쯤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서 세상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기에 일탈은 곧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경우에만 아름답고, 즐거운 상상일 수 있다.
그 누구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공안기관 요원들에게 끌려가 욕조물을 흠씬 들이키다 목이 눌려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박종철). 그 누구도 민주주의와 직선제 개헌을 외치다 날아온 최루탄에 두개골이 함몰되어 식물인간처럼 지내다 끝끝내 숨을 거두고 싶어하지 않는다(이한열). 그 누구도 남편에 의해 홍콩의 작은 아파트에서 목졸려 숨지길 바라지 않는다. 더군다나 죽임 당한 뒤에 북에서 내려보낸 여 간첩으로 몰려 남은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길 바라는 일은 없다(김옥분). 그 누구도 이라크에서 길을 가다 자동소총에 난사당해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간신히 생존해서 귀국한 뒤에도 여전히 걷지 못하는 몸으로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오무전기 노동자들). 그 누구도 피납되어 살려달라는 애절한 호소를 무시당한 채 목이 잘려나가는 고통 속에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김선일).
더군다나 국가라는 추상적인 민족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인 희생이 아닌 타의에 의해 억울하게 맞이하는 죽음 같은 것은 원치 않는다. 죽은 뒤에 아무리 열사가 되고, 애국자가 되고, 순교자가 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600여년 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의 책임 -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에서도 누누이 밝히고 있듯이 로마인에게는 종교도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는데 기독교의 침투로 말미암아 로마의 시민의식이 붕괴되어 로마인의 특성인 실용적인 기풍과 전투 의지를 약화시켜 그 결과 로마가 붕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로마라는 국가 자체를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신의 것으로 돌렸으므로 - 이라는 역사가들의 논리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정의를 빼버리고 크게 보면, 왕국이 범죄집단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범죄집단도 조그만 왕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범죄 집단은, 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에서, 협약에 따라 약탈품을 나눠 가지는 결사체에 의해 묶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만약 이 악행집단이 부도덕한 무리들로부터 많은 지원자를 획득하여 영토를 획득한 후 거점을 구축하고, 도시들을 탈취하여 사람들을 복속시킨다면, 그 집단은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왕국이라고 사칭하고, 침략의 비난이 아니고 정당성을 획득하여 그 왕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한 재치있고, 사려깊은 대답을 보자. 왕이 그에게 자신에게 대항할 때의 네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해적이 대답하기를 '세상을 정복할 때의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배로 그것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와 해적 집단 사이에는 규모의 차이를 제외하고 도덕적인 차이는 없었다. 두 집단 모두 성공을 위해 내적 조화와 조직에 의존하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취하고 파괴하는 그들의 능력에 의해 성공여부를 평가받는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체첸을 향한 러시아의, 이라크를 향한 미국의 행위를 보라.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일컬어 국가테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권혁범의 저서 "국민국가로부터의 탈퇴"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국가주의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불행한 국민들,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 혹은 이에 저항할 기력을 잃은 지식인들(혹은 중독되어 있는)에게 향하는 적절한 예방백신, 해독제 구실을 한다.
립셋의 정의에 따르자면, 지식인이란 "문화, 즉 예술, 과학, 종교를 포함하는 상징세계를 창조하고, 배분하고, 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물질세계와 구분되는 정신세계의 창조자이자, 전파자이며, 실천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권혁범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지적인 저술 행위와 실천으로서의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는 한 ‘비판적’ 지식인이, 우리 사회와 인간에 대해 그 나름의 이해와 소망을 담은 통찰이자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개인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국민적/민족적 정체성"에 의한 것이다. 이런 국민적 정체성, 국민됨으로 사유하기는 다른 모든 정체성을 종종 압도해버린다. 현실정치의 테제인 "국가안보"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이를 위해 국민이라 불리는 집단이면서 동시에 해체해보면 개인일 수 밖에 없는 근대적 개념의 개인이 지닌 기본적 인권을 유보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근대성과 더불어 식민적 요소들, 전근대적 질서들이 혼재해 있다. 국민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기준 속에는 이렇듯 전근대적 가부장제, 혈통주의를 품는다. 국가라는 상상공동체는 종종 국경이 아닌 단일민족 신화와 같이 혈연에 의해 규정된다.
국가주의는 민족주의와 만나고, 민족주의는 보수와 진보라는 양 진영 사이에 다리를 놓고, 이 둘을 묶어주는 최소공약수가 되어준다. 국익이라는 이름 아래 반미민족주의는 종종 국가주의의 우산 아래에서 행복한 밀회를 즐긴다. 친미와 반미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하나의 회로판에서 신호(사안, 사건)에 따라 서로 도체가 되었다가 부도체가 되는 반도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국익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다른 모든 개별적인 보편을 능가한다. 권혁범의 문제의식은 탁월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몇몇 요소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단지 이 책의 저자 권혁범만이 풀고 해결해나가야 할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우파 지식인들(지식인은 결코 하나의 성향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에 대해 쏟아내는 비판과 동일한 강도의 비판을 마음속으로 동의를 보내는 지식인들에게도 보내야 한다. 지식인은 "권력(특히 근대국가), 시장(좁게 보면 지식시장), 여론(공론공간)" 사이의 긴장을 통해 자리매김되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에 대한 비판은 그가 한동안 속해있던 "당대비평"의 문제 제기들 "우리 안의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다. 권혁범의 비판들에 대해 구구절절이 다 옳다고 외치다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허탈하기 쉽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우리가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권혁범의 국가, 권력, 집단에 대한 비판은 본질적으로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도달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토피아"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권혁범의 비판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그의 근본주의적 비판은 더욱더 공허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국가주의와 파스즘으로 흐를 수 있는 집단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할 수 있지만 그것을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설령, 현실변혁의 동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이 크롬웰의 신성정치화될 가능성(즉, 또다른 폭력)이 열려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가 빠질 수 있는 공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은 논리적 프로그램만을 따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UN의 보고에 의하면 1991년 냉전해체 이후 2001년 9.11 이전까지 전세계 약 45개 지역에서 57번의 주요 분쟁이 발생하였다. 분쟁의 결과로 36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시기에 일어난 분쟁의 최대 희생자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고, 이들 민간인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과 같이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분쟁의 또다른 특징들은 그것이 국가간의 분쟁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해체에 따른 국가권력의 부재상황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 국민주의를 회피할 필요는 여전히 인정된다 할지라도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명과 권리,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공동체의 존재의 필요성이란 고전적인 명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권혁범의 비판적인 주장들을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민족 단위, 국가 단위의 도덕으로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어려운 까닭은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고전적인 명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장 자끄 루소의 고전 "사회계약론" 의 세계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권혁범의 주장이 현실적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근대 국가의 역할 자체를 부인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이 어느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하며 공동체를 재구성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유럽공동체의 출범과 같이 민족에 기반한 근대적 국가개념의 해체와 새로운 물적 토대에 기반한 지역 공동체의 출현은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근대화의 숙제에 우리는 여전히 발목을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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