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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사회과학

레드 콤플렉스 - 강준만 외 | 삼인(1997)

레드 콤플렉스 - 강준만 외 | 삼인(1997)

우리는 어떤 영화배우나, 감독들에 대해 알고 싶을 때 ‘필모그래피(filmography)’란 것을 살핀다. 필모그래피란 ‘특정 배우감독의 작품 리스트; 영화 관계 문헌’을 의미한다. 영어에서 ‘그라피(graphy)’란 말을 동양의 그것으로 바꿔보면 대략 ‘~지(誌), ~기(記)’의 뜻을 갖는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기록을 일대기(一代記)라고 할 때의 그것과 같은 말이다. 어떤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그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궁금해지고,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영화보기, 영화읽기 하는 것은 오늘날 영화에 취미를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해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중적인 시도인데, 종종 어떤 배우들은 그에 대해 처음 받았던 인상과 달리 도대체 이런 영화엔 왜 출연했지 하는 의문이 들만큼 형편없는 영화들에 출연한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이것을 영화배우의 것이 아니라 일반인으로 바꿔 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경력(經歷) 혹은 이력, career, record라고 한다. 이것이 곧 ‘a personal history’이고, 한 개인이 삶으로 증명해낸 자신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배우가 연기는 잘할지 몰라도 시나리오를 볼 줄 모른다거나, 배우로서의 자의식은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필모그래피는 영화배우나 감독들이 남기는 인생의 긴 꼬리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꼬리 혹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강준만 교수에 대한 열혈 팬들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역시 그가 만들었던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의 시도가 우리 사회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영화 <넘버3>에서 최민식이 한석규와 한바탕 주먹질을 한 뒤 떠들어대던 이야기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니….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 저지른 사람이 죄지.” 우리 사회는 종종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책임으로부터 면책되어도 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용인하는 집단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강준만 교수가 시도한 ‘인물비평’이란 그 성격상 지니고 있는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임이 방기되고 무화되어 버리는 우리 사회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긁어주는 효자손이자 인물의 사후에 발행되는 평전(評傳)의 전통조차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인물의 생전에 펼쳐지는 평가란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레드 콤플렉스』는 강준만이 추구하던 인물비평에 대한 시도가 일반 출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것이 지난 1997년의 일이니 과거를 쉽게 잊는 우리네 관행에 따르면 잊힐 법도 하다. 물론 거기엔 인물비평보다는 다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침잠해 있는 듯 보이는 강준만의 발언들이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지 못하는 탓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는 질기고 오래간다. 『레드 콤플렉스』, 일명 적색공포증이라 할 수 있는 이 질긴 광증(狂症)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포이다. 그 공포의 핵심은? 이것을 외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내부적 요인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북한의 존재’이란 실체적 그림자 혹은 유령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에 의한 적화통일 야욕’이다. 탈북이 홍수를 이뤄 우리 정부도, 이를 부추기거나(?) 돌보고 있는 NGO들조차 뒷감당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자신이 없다.


국가보안법 폐지문제를 두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잠시 후 대법원에서 이례적인 언사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강하게 주문하고 나섰다. 이 책은 노무현 정권의 출현 이전에 나온 책이다. 그런 까닭에 손석춘은 이 책의 총론격인 「왜 레드 콤플렉스가 문제인가-적색 공포증 조장에 앞장선 한국 언론」 이란 글을 통해 『레드 콤플렉스』의 질긴 뿌리의 한쪽이 착근해 있는 곳, 이를 다시 널리 유포시키고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제의하고, 대미공조보다 민족공조가 우선할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어떤 의미에서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런 거침없는 언사는 역시 ‘YS’니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가 이런 언사들을 해준 덕으로 뒤이은 DJ 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조차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언론에 의한 조문 파동을 겪으며 전면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책이 나온 뒤 우리는 몇 차례에 걸쳐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있다.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말하고 이제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확실한 민주주의 체제를 떠올렸다. 매우 더디게 진행되긴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출범 이후 언론개혁의 진전은 최소한 방송사에서만큼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비록 안티조선 운동이 <조선일보>의 수적인 우세를 잠재우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일반인들에게 <조선일보>가 지닌 어떤 폐해(?)들, 그들의 정체성을 실감하게는 해주었다. 물론, 언론에 의한 레드 콤플렉스 유포는 현재에도 여전하며, 그들의 국가안보상업주의 역시 더욱 공고해지면 했지, 덜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현상 하나를 발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사실은 얼마나 깊은 뿌리를 지녔고, 깊이 은폐되어 있었는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신시절 유신헌법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변호사시험에 통과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매우 정치적인 수사법이면서 동시에 작금의 상황을 미리 예견한 듯한 언급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온 지난 1997년은 우리나라 법조계 초유의 법조비리로 몸살을 앓았던 해이기도 하다. 지난 1997년 의정부 법조인들과 1998년 대전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가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 사실을 실감했고, 반대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진일보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5.16 군사쿠테타 이후 군부독재정권은 삼권 분립을 약화시키고, 법조인들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기 위해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철퇴로,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승진을 비롯한 각종 혜택으로 길들여 왔다. 그 결과 1997년 이전까지 우리는 비록 법조계가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더라도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것은 정통성 없는 정부가 법조인들의 비리와 부패를 사실상 통제하지 않고 방치한 결과물이었다.

지난 97년 법조비리 사건 이후 우리 사법계는 자정노력과 더불어 구조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을 수호하는 법조계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검찰을 통해 제기된 구속영장이 전직 판사라는 이유로 기각되는 일이 잇따르며 사법계 내부에 온존하고 있는 뿌리 깊은 특권의식이 여전함이 드러났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이라는 반인권적, 반헌법적 법률을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등, 시대정신과 우리 헌법 정신을 과연 온당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책 『레드 콤플렉스』에서는 박홍(전 서강대 총장), 이문열(소설가), 김영삼(전 대통령), 한완상(통일부 총리), 김대중(전 대통령), 리영희(교수), 조정래(소설가), 윤이상(작곡가), 서준식(인권운동가) 등 아홉 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때로 가해자로 혹은 때로 피해자로 이 책에 의해 호명된 이들이다.

작가 조정래는 이런 엄혹한 시대에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작성했다. 동료작가가 작품 발표를 위해 두 통의 유서를 쓰는 동안 다른 한 명의 작가는 200만부 판매기록을 남기는 대베스트셀러 작가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그런 그가 바뀐 시대와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최근 이런 글을 남겼다.

“레비스트로스는 백인도 인디오도 서로에게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상대를 짐승으로 의심했던 쪽보다는 신이 아닌가 의심했던 쪽이 더 인간답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같은 태도다. 우리가 빠져 있는 대립과 갈등이 어떠한 것이건,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을 길러보자.”

그는 현재 우리 사회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상호간의 몰이해와 불화 속에 갈등국면을 고조시켜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나는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지난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오면서 저런 글을 썼다면 그를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아니 존경했을 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서로 존중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이해하자는 말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국가정보부의 남산 지하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던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하는 이들”에 대해 그간 이문열이란 작가가 보였던 모습이나, 안전기획부에서 용공조작과 고문으로 심신을 상해 끝내 유명을 달리 해버린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처했던 현실에 비해 지금 과거사 규명과 청산 작업이 결코 더 잔인할 수는 없다. 그때 그들에게 보장되어야만 했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은 바로 그때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 누리는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합법적인 힘의 균형 장치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 역시 바로 그러한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런 시기엔 권력의 시녀, 권력의 시종장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영화배우들조차 과거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의 이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가 정치인, 법관, 학자, 시인이든 현재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과거 그의 걸음걸이를 살피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삼권분립의 보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역시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당신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은 웬일일까. 언젠가 “그 시절, 국보법 폐지를 반대한 법관들”이라는 제명으로 당신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다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눈 덮인 들녘을 지나 갈 때에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말라. 오늘 남긴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나는 언젠가 이 책 『레드 콤플렉스』가 더 이상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길 소망해본다. 그러나 오늘 다시 이 책을 펼쳐 읽으며 새삼 마음이 아픈 것은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