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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문화연구란 무엇인가 - 문화연구의 위기 혹은 기회

문화연구란 무엇인가 - 문화연구의 위기 혹은 기회
- 존 스토리 엮음, 백선기 옮김(2004), 『문화연구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북스1)


언제나 존재하였으며 결코 지배계급의 공식문화와 합쳐지지 않았던 민중의 독특한 웃음 문화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결코 과거 인류 역사의 문화적, 문학적 삶과 투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를 조명할 때에, 우리는 자주 "각 시대의 말을 믿도록", 즉 그 시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많건 적건)의 주창자들을 믿도록 강요받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중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민중의 순수하고 흠없는 표현을 찾아서 해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는 중세와 중세 문화에 대해 매우 단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세계사라는 드라마의 모든 움직임들은 웃고 있는 민중들의 합창 앞에서 공연되었다.(물론 민중은 스스로가 세계사라는 드라마의 참가자이다. 그러나, 다른 출연자들과는 달리 - 다른 차이점들은 별개로 하고 - 민중은 양면가치적인 웃음을 웃을 권리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중략>... 민중문화는 세계사의 각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 모든 시대에, 광장은 항상 존재하였던 것이다.
2)

문화연구의 문제의식
20세기 초엽 미하일 바흐찐(Mikhail M. Bakhtin)이 했던 “언제나 존재하였으며 결코 지배계급의 공식문화와 합쳐지지 않았던 민중의 독특한 웃음 문화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결코 과거 인류 역사의 문화적, 문학적 삶과 투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말은 오늘날 아더 아사 버거(Arther Asa Berger)의 “수억의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온 매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진지한 관심과 연구를 기울여야 할 가치가 있다.”는 말로 반복된다. 서구에서 이루어진 문화연구의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대중문화는 그 대립항에 어떤 개념이 놓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표상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중문화는 그것을 논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고급문화, 민속문화, 대량문화, 지배문화, 노동계급문화, 민중문화 등 다양한 문화범주의 상대적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다. 이 말은 결국 문화연구의 앞머리에 접두사격으로 붙어 있는 ‘문화’의 개념을 별도로 다루지 않고서는 문화연구의 정의도, 문화연구의 문제의식도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가장 오래된 ‘문화’의 의미는, 이 단어가 곡식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15세기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농업(agriculture)'과 ‘원예(horticulture)’가 그것이다. 이 의미는 더욱 발전해 16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작(cultivation)'의 관념을 식물이나 동물에서 인간의 정신으로 전이시키면서, 어떤 개인, 집단 혹은 계급이 경작되거나 양육된 정신과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18세기의 문화가 독특한 계급적 함의를 획득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화란 용어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생산한 실제 작품뿐만 아니라 교양을 갖춘 엘리트들이 예술을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일반적인 문명의 상태라는 것이다. 문화의 개념은 20세기에 노동계급과 하층 중간계급의 ‘대중문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가장 최근에 출현한 ‘문화’의 의미는 ‘문화가 무엇인가’ 보다는 ‘문화는 무엇을 하는가’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접근들과 다른 형태를 보인다.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3)을 가장 발전적으로 받아들인 윌리엄스에 의해 문화는 하나의 사물(예술)이나 상태(문명)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실천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문화는 의미를 생산하는 실천이며, 의미화하는 실천이다(물론 새로운 정의가 출현했다고 해서 이전의 정의들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문화연구에서 입문서 격으로 다뤄지는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쓴 존 스토리는 『문화연구란 무엇인가』의 서장에서 콜린 스파크스를 인용하며 문화연구를 규정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4)한 바 있다. 문화연구는 90년대 중엽 이후 한국 사회에서 신선한 연구 분야로서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크게 유행5)하고 있다.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과 기술분야에 이르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문화연구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문화연구는 마치 모든 곳에 존재하는 듯 보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해 한 마디씩 할 자격이 있거나 하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문화연구가 진보적 입장을 취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원인은 특히 서구의 이론적 유행에 민감한 한국적 풍토가 작용한 바도 크겠지만, 문화가 진보적 연구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연구되어 오던 ‘사회’를 대신하는 주제로 받아들여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화연구는 문화적 관습과 권력과의 관계를 폭로하고 이 관계들이 어떻게 문화적 관습을 지배하고 형성하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문화연구는 윌리엄스 이래의 전통을 받아들여 문화가 사회적 ․ 정치적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개별적인 실재로 간주하지 않으며 문화가 나타내는 범위 내에서 사회적 ․ 정치적 맥락을 분석한다. 문화연구 속에서 문화는 항상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때의 문화는 연구 대상이자, 동시에 정치적 비판과 행동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문화연구는 지식의 구분을 폭로하고, 지식의 암묵적 형태(즉, 지역적인 문화에 기초한 직관적 지식)와 객관적(이른바 보편적인) 형태상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반본질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문화연구는 비판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사회를 재구성하고,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의 한 분야, 학제로 포함되기 보다는 역사적 프로젝트(project)화하려 한다.

이와 관련해 그로스버그6)는 문화연구가 지닌 힘과 매력은 부분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특성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첫째. 문화연구는 변화하는 역사적 프로젝트이다. - 문화연구는 학계 외부에서 대립적인 지적 전통의 하나로 출발했다. 둘째. 문화연구는 아카데믹하고 좁은 인식론적 용어로 자신의 이론적 적절성을 정의(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 문화연구의 이론은 현대세계에서의 위치를 설정하는 특정한 실천, 구조 및 투쟁과의 관계와 전략적 개입의 가능성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나치의 독일 지배에 대한 반성에서 출현했던 것처럼, 영국의 문화연구 또한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대한 영국 내 신좌파의 반응으로 출현했다.) 셋째. 문화연구의 특징적인 간학제적 양식은 문화적 실천과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의 대부분이 명백한 의미에서 문화적이지 않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 문화연구는 학문적 ․ 정치적으로 필요하고 활용 가능한 자원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이용하여 문화를 설명하려 한다.

문화연구를 추동하고, 투쟁해 온 개념들의 정의는 그 자체로 문화연구의 성격을 드러내준다. 물질주의, 물질적 실천, 인간이 무엇을 하고,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는지에 대한 관점에서 인간 현실을 기술한다. 물질주의는 사람들의 세계를 사회, 문화, 정치, 기술, 경제적 관계들로 설명한다. 반본질주의, 아무 것도 미리 보장된 것은 없고, 어떤 관계도(상응하여) 필요하지 않으며, 어떠한 정체성도 내재되어 있지 않은 수렴적 역사를 기술한다. 권력은 차이를 만들고, 관계를 형성하고 정체성과 위계를 구조화할 뿐만 아니라,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적 주체에 힘을 실리게 한다. 환원주의. 모든 역사를 하나의 입장으로 엮어내는 유일한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합(연결)은 특수성에 대한 문화연구의 방법론적 공헌을 규정한다. 실천을 접합시키기 위한 투쟁은 실천의 맥락들을 구성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대중성, 정치적 공헌으로서 대중성은 ‘반엘리트’주의적이며 문화연구는 종속이 조작 같은 것이 아니며 전제적 복종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대중은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살려나간다.


문화연구의 지역적 확산 및 문화정책화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이름은 잘 알려진 바대로 1964년 영국 버밍엄 대학에 설립된 현대문화연구소(CCCS)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대문화연구소는 레이먼드 윌리엄스, 스튜어트 홀, 리처드 호가트 등 좌파 비평가 및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뤘고, 이 연구소는 처음부터 역사·철학·사회학·인류학·문학비평 등을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문화연구는 마르크스는 물론 알튀세르와 그람시,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의 성과를 차용했다. 특정 문화 텍스트에 대한 비평을 넘어 문화생산-분배-수용 과정을 둘러싼 모든 문제로 연구 영역을 넓혀갔다. 문화연구는 현대문화연구소의 창립 이전과 이후, 그리고 Post-CCCS의 단계로 구분7)할 수 있는데, 창립 이전의 문화연구는 경험주의, 좌파 리비스주의에 의한 것이고, 창립 이후에는 리차드 호가트(미디어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관계), 스튜어트 홀(주체형성론, etnography), 리처드 존슨(주체의 역사적 실천의 문제)를 거쳐 1984년 문화연구의 학제화 ․ 제도화를 통해 지역연구(Local-Studies)로 확대되고, 이 시기에 문화정책으로의 전환(제도적 개입)이 이루어진다. 문화연구가 문화정책으로 전환하던 시기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시기는 주로 대처 수상의 임기8)와 겹친다.
 
1972년 대처 수상의 임기에 해당하던 1979년에서 1990년 무렵 영국의 문화연구는 분열되어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인도 등지로 옮겨졌다. 특정 지역에서의 문화연구는 영국의 문화연구와 달리 정치적이기 보다는 심미적이고 텍스트적인 분석에 열중했다. 또 어떤 지역에서 문화연구는 좀 더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소외 집단의 곤경과 주변부 담론에 관여하기도 했다. 본래 학문 외부적 공간에서 비판적인 연구였던 문화연구는 학문 분야 가운데 하나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로스버그는 특히 미국에서의 문화연구는 빠르게 제도권 내로 편입9)되었고, 전문화되었으며 주로 기호학과 문학이론에서 차용해온 고유의 전문용어들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좌파적인 지적 전통이 부재했던 미국 문화연구를 영국 문화연구와 더 멀리 떼어놓게 된다. 미국에서의 문화연구는 정치적 ․ 문화적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학자들의 영역이 되었다. 영국 문화연구에서 기본적인 요소들로 취급되던 권력과 정치학, 계급과 지적 형성에 대한 문제가 미국에서는 중요하게 취급받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래엄 터너10)는 영국에서 출발한 문화연구는 그 자체로 이미 앵글로색슨 중심주의(잉글랜드적 시각)를 설정하고 있으며, 호주의 문화연구 역시 이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이를 흉내 내고 있다고 비판한다. 호주의 문화연구는 호주인의 생활 속성을 계급이나 하위문화적 구별이 아닌 국가로 구별하여 구축하는 것이 하나의 전형처럼 되었다. 호주에서의 국가 정체성 개념은 식민지의 과거를 벗어나서 자신을 구성하는 국가에 있어서 다소 상이한 국가적 기능을 제공한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과거의 회복을 시도하는 국가에서 국가 정체성이 제공하는 기능과는 다르며 1970년대 호주 영화산업을 지원한다는 정부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보수적 헤게모니가 되기에 충분했다. 호주 영화는 본국과 해외에서 상업적 기능보다는 호주를 표현하는 기호적 의미들을 제공함으로써 호주의 공식적이고 보수적인 문화정체성 형성을 옹호했다. 그래엄 터너는 문화연구의 영국적 모델의 지배는 그 지배의 본질과 효과들을 문제시하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문화연구는 중심부와 마찬가지로 주변부를 ‘연구’해야 하며 주변부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어내야 한다.

존 프로와 미간 모리스11)는 현재의 호주의 문화와 산업정책, 신자유주의와 문화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다문화주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경제적 문제에 대한 ‘문화적 해결책’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호주에서 정치적 엘리트들은 문화를 자신의 의지대로 재작동시키고 개조시킬 수 있는 매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경제적 생산성이란 목표에 다른 모든 문화적 목표를 종속시킨 신자유주의적 문화 개념은 현재 호주 문화연구에서 사용되는 문화개념의 한 가지 차원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호주는 국가 정체성의 문제를 영국의 문화적 ․ 인종적 유산을 회피하고, 새로운 다문화주의 정책을 통해 이룩하려 한다. 호주의 다문화주의 정책은 타협적 구성물이지만, 인종적 공동체의 수준에서 상상적인 정체성을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공동체 내의 차이와 모순(예를 들어 계급, 인종, 젠더)을 은폐시키는 경향이 있다. 결국 호주의 다문화주의는 국민의 신분 개념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백인 정착민의 개념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현재의 인종(앵글로 켈트족)에 대한 문화적 보장에 도전하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다른 아시아 - 태평양 나라들과의 무역의 증대라는 정부의 경제적 목표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인종주의를 제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호주의 문화연구 활동은 ‘국가적’ 문화와 ‘국가적’ 정치의 강력한 개입으로 인한 대립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고, 일상의 정치학과 ‘개인적’ 삶의 정치성에 대해 페미니즘과 일정하게 결합해야 한다.

이엔 앙12)은 세계화된 미디어체제에 대한 민속지학적 비판의 문제를 모색하고 있다. 그는 먼저 문화연구가 그동안 광범위한 대중성을 획득했으며 ‘지배적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음을 전제한다. 그는 문화비판의 목적을 위해 수용자 경험을 정당화하거나 ‘수용자 측면만을 취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수용을 본질적으로 심리학적 과정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이를 보다 깊이 정치화된 문화로 개념화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개 수용자 집단에 대한 보다 민속지학적인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적 삶을 살아나가는, 다차원적인 맥락’에서 모순적이고 복잡한 영역의 한 분야로 수용이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헤게모니적 힘의 구체적 의미를 개발시키는 것이 문화연구 차원에서 중요하다. 민속지학적 시각은 초국가적 세계체제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 의해 촉발되는 추상적이고 관망적인 시각을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세계시스템에서 독립적인 문화 정체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정체성은 세계 시스템에 의해 인정된 문화적 틀과 관련하여 자신을 규정하고 위치시켜야 한다.

그러나 초국가적 미디어 체제(세계적인 뉴스네트워크)들은 자신의 본거지를 대변하는 경향이 있으며 주변부를 중심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영구히 추구하려 한다. 이들을 통해 세계의 시공간은 압축되어 이른바 지구촌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세계화라고 한다. 국가 자체의 힘은 세계 자본 앞에서 약화되었으며 더 이상 영토의 경계, 법과 규정을 강요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세계는 미국의 문화적 상징에 의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통합적 방식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사실상 초국가적 미디어 시스템의 확산은 구조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구체적인 문화적 맥락에서 타협될 수 있는 역전될 수 없는 과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급진적 경험주의를 열린 이론화와 결합시키는 비판적 시각, 민속지학적 방법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측면에서 지역적 세밀함에 대해 주목하고, 지구적이며 역사적인 의식을 명시하고 있는 수용자들에 대한 민속지학의 비판적 잠재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즐겁고 창조력이 풍부한 실천가들이면서 동시에 고통 받고 혜택 받지 못한 주체들”에 의해 드러나는 문화비판의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문화연구자가 자신의 정체성(인종, 민족, 계급, 젠더 등)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분리와 학제 혹은 국가기구로의 포섭
앞서 살펴본 대로 문화연구는 문화좌파적인 전통에 인문주의와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 프랑스의 이론적 구조주의의 영향(레비스트로스, 바르트, 알튀세르) 속에 있다. 세계 문화연구의 이론적 종주국으로 간주되는 영국의 문화연구는 마르크스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화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우선 문화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연구의 흐름, 그리고 영국의 문학 문화(Literary Culture) 전통이란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문화연구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을 인정하고 수용했다. 문화연구는 문화적 힘이 어떻게 사회구조에 역사적 형태를 부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사회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문화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역사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 연구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1946년 공산당 역사가 그룹의 창설에서 비롯되며, 그 그룹의 중핵은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의 학생 운동 세대 출신이었다. 그들은 파시즘에 대항한 인민전선의 역할로 인해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 로드니 힐튼(Rodney Hilton),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빅토르 키에르난(Victor Kiernan), 존 세빌(John Saville), 에드워드 톰슨(Edward Thompson) 등이 그 주요 구성원이었다. 이와 반대로 영국 마르크스주의는 1930년대 영국의 문학 문화(Literary Culture)와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영국 좌파의 급진적 문화가 주로 작가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문학 문화(Literary Culture)는 영국의 지식인 문화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가진다. 이러한 경향들이 영국 현대 역사연구 맥락에서 한 특징이 되며 나아가 문화연구가 발생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문화연구는 마르크스주의와 여러 면에서 겹치거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우선 산업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 성별 ․인종적 혈통에 따라 불공평하게 구분되며, 문화는 분열이 형성되고 추구되며, 지배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와 이에 저항하는 하위집단과 소수자 집단의 투쟁의 장이 된다는 가정, 문화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측면이다. 그러나 문화연구가 마르크스주의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문화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환원론과 경제결정론을 배격한다는 데 있다.

“영국 문화연구는 … 복잡해지고 통속화된 유사 맑스주의가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 사이의 관계를 사고하려고 할 때 이용하는 토대 상부구조 모델과의 논쟁을 통해서, 그리고 맑스주의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어떤 경제주의와 환원주의의 비판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허위의식의 문제와 더불어 필수적이면서 계속되고 있는 아직 끝나지 않은 논쟁 속에 위치한다.” - 스튜어트 홀

“문화연구는 환원주의와 경제주의에 반대하는, 토대 상부구조의 은유에 반대하는, 허위의식의 개념에 저항하는 급진적 질문의 형태로 생겨났다 … 프레데릭 제임슨(F. Jameson)과 데이비드 하비(D. Harvey)와 같은 비판가들에 의해 지적된 전-포스트모던 맑스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지지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돌아가는 것은 문화적, 정치적 관계를 기계적이고 회고적인 역할로 위치지움으로서 문화와 정치에 대해 경제적 관계와 경제적 결정의 우선성을 단정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안젤라 맥로비13)

토니 베넷은 문화연구의 미래를 위해 문화와 권력의 관계에 대해 필수적인 조건들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를 특정한 행정의 영역으로 간주할 때, 문화 규정(정의)에서 정책에 대한 고려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으며, 특수한 행정부의 대상, 목표 및 테크닉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문화의 영역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가 행정의 ‘대상’이자 ‘도구’로 형상화되는 새로운 사회관리(경영) 분야를 생성한다며 문화라는 용어가 종속계층의 삶의 방식을 준거하는 한에서 행정의 ‘대상’이나 ‘도구’라고 주장한다. 베넷은 그람시적 헤게모니 개념이 문화연구에서 제도에 대한 무관심한 경향을 만들었고, 역으로 문화연구가 소위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로 부르고 비판했던 것들과 더불어 작업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문화연구 안에 ‘정책’을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일종의 교정책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넷의 그람시적 헤게모니 개념 비판은 문화연구가 학제 내 포섭되는 위험성과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의 근본적 뿌리라 할 수 있는 비판적 이론으로서의 문화연구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베넷의 입장과 헬드의 주장14)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에서 본질적으로 계급관련의 문제들로 환원될 수 없는 특정한 유형의 모든 쟁점을 주변화하거나 배제하게 되는 문제, 환경이나 남성의 여성 지배로 인해 제기되는 쟁점들, 또는 다른 인종이나 민족 집단이 특정 인종이나 민족집단을 지배하면서 제기되는 쟁점들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 어렵다는 난제가 있다. 모든 이해의 차이가 계급으로 환원될 수 없고, 자원배분과 같은 의견의 차이가 다양한 입장에서 유래될 수 있다면,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많은 사회운동이 1989년 이래 추구해왔던 것처럼 대안적인 정치 전략 및 정치 프로그램의 발생과 그에 관한 논쟁이 가능한 제도적 공간을 창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하윤금의 비판15)대로 ‘문화정책론’은 특히 대중 미디어 영역에서 하버마스의 ‘공론장’(public sphere) 이론을 토대로 한 공공영역의 확보문제로 연결되면서 이런 개입방식과 운동방식은 신자유주의적 현실정치 속에서 우파 정책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함에도 현행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획의 내용이란 측면에서는 결국 매우 유사한 접점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과 같이 되지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심연을 굽어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말처럼 애초에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출발한 문화연구가 ‘정책’을 설정하고 이에 참여함으로써 국가기구의 일부가 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문화연구의 위기 혹은 기회

문화연구는 우리의 역사적 삶의 공간과 일상을 재구성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를 발견하고, 자신의 지역적 정체성 - 지적 비판으로서 그리고 정치적 개입으로서 -을 접합시키기 위한 전략적 노력의 일환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문화연구는 - 미국의 문화연구만이 아니라 -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문화연구 역시 오늘날 몇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학계 외부에서 대립적인 지적 전통의 하나로 출발했던 문화연구가 점차 학제 내부로 흡수되는 과정을 통해 점차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인식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화연구 역시 점차 학문의 한 분야로, 학문제도와 권력구조의 일부로 변모해가고 있다. 다른 하나는 문화연구가 마치 서구가 제공하고 초국가적 미디어들이 선전하는 대중문화를 정당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국의 문화연구는 초기에 주로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지녔던 주로 (남성)노동자 문화의 측면만을 크게 부각시키는 민족적 ․ 가부장적 편협함(결과적으로 앵글로색슨의 문화적 식민지화 작업에 봉사할지도 모를 앵글로색슨의 하위계급에 대한 연구)을 보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계급 지배적이고 인종적으로 구분된 사회에 여성과 흑인을 포함시켰다. 또한 문화연구는 주로 대도시적 삶과 그 주변부적 관심사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며, 도시와 다른 형태로 변별되는 정주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문화연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우선 문화연구가 서구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기본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옹호자가 되겠다는 애초의 공언된 목표에도 불구하고, 문화연구는 식민지 시대와 탈식민지 시대 백인 중심의 서구와, 문화 및 문명과 지속적인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이들이 취사선택하여 분석하고 대중과 소수자들의 표상으로서 옹호하는 대부분의 문화는 영국, 혹은 서구적인 것들에 국한되며, 차이를 유지하고, 다원주의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구 속에서 대중(popular)은 이미 가정(假定)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문화연구는 이미 성취된 업적 이상의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동어반복적인 연구들 - 텍스트비평들, 뮤직비디오, 대중문화, 청년 하위문화 스타일 등에 관한 연구 - 을 이미 진부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다. 종종 비서구 지역의 문화연구는 자신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 물론 비서구지역도 충분히 서구화되어 있지만 - 서구의 대중문화와 이론을 수입하는 한 차례의(이전에도 경험했던) 열풍으로 그치고 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의 문화연구가 지닌 다른 문제는 문화연구가 문화정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앞서 그래엄 터너, 존 프로, 미건 모리스 등의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화연구의 문화정책으로의 전환 과정은 문화연구 본래의 비판적 정체성에 혼돈을 가져오고 있다. 이를 한국 사회의 상황에 빗대어보면 서구 유럽은 ‘복지국가 위기론’이 제기되는 가운데서도 복지 예산의 비율이 우리보다 2배 이상 지원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미 ‘분배우선정책’이라느니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아우성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문화정책론자들의 주장 혹은 문화연구의 본래 입장(소외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옹호, 문화복지)이 관철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사실 문민정부 이후 부각되기 시작한 문화 ․ 문화정책이란 결국 이전의 권위주의 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한 레토릭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민정부 이후 추진된 정부(국가기구)의 문화정책 가운데 정책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문화(복지)정책에 대해 아우성 대신 환호성이 우선하는 현실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문화정책이란 결국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대의 정부주도 중공업 우선 성장정책을 문화에 적용시켜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문화정책들16)은 지식정보사회에서의 국가경쟁력 강화의 측면에서 문화적 공공영역의 창출보다는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민영화, 시장화)과 맞닿아 있다(국내의 경우에도 문화연구에서 문화정책으로의 변화를 무비판적으로 추인할 경우 이를 비판할 세력의 부재라는 흡사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연구는 학문의 한 분야로 포섭되면서 사회학, 심리학, 혹은 인류학, 역사학 같은 다른 분야들 속에서 학문적 윤곽을 잃고 사라질 수도 있다. 80년대가 문화연구 ‘없는’ 문화운동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문화운동 ‘없는’(혹은 빈곤한) 문화연구, 그리고 현재는 문화연구 없는 문화산업(정책)의 시대가 되었다. 80년대의 문화가 문화적, 예술적 수단을 사용하여 급박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려했다면, 90년대는 사회운동의 퇴조 속에 대중매체문화의 팽창과 일상적 소비와 여가 생활이 증대하면서 ‘담론과 체험’의 차원에서 문화연구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연구가 문화정책적 차원에서 문화산업 육성의 하위 분야로 포섭되는 결과만을 산출하게 된다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형성되기 시작한 사회적 공공영역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속성들은 시민사회 내부의 냉소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며, 냉소는 다시 사회적 ‘재봉건화’의 위험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문화연구의 미래는 전적으로 새로운 이론의 창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애초에 출현할 당시에 품었던 비판 의식, 사회의 제 분야에 널리 분포하여 존재하는 권력의 다양한 형태를 폭로하고, 논쟁적인 비판을 거듭하는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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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연구란 무엇인가”의 모든 장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으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로렌스 그로스버그의 「문화연구의 순환」과 토니 베넷의 「문화연구정책」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래엄 터너, 존 프로, 미건 모리스, 이엔 앙의 논문은 각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생각되어 이 글에서는 정리된 부분 이상을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 미하일 바흐찐, 이덕형, 최건영 옮김(2004),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아카넷, 721-722쪽

3) 사실 막스 베버가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맑스주의는 전형적으로 생산영역 밖의 어떤 지배적 형태로 무시하였다. 그람시의 시각으로 볼 때, 모든 억압적 구조들을 영속시키는 데 공헌하는 미묘하지만 널리 침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통제와 조작의 형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과거의 모든 사회주의 운동에서 획득한 정치적 전략의 진보를 퇴보시켰던 분석적 결핍의 내용이다.칼 보그, 강문구 옮김(1992), 다시 그람시에게로, 한울, 49쪽

4) 어떤 면에서 우리가 문화연구에 대하여 뚜렷한 경계선을 긋는 것과 적절한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느 것으로도 문화연구의 단일한 이론이나 방법론을 지적하고 단일한 이론이나 방법론으로써 문화연구를 특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학비평, 사회학, 역사학, 미디어 연구 등에서 적당히 모아놓은 관념들, 방법들 및 개념들이 문화연구라는 편리한 이름으로 수렴되고 있다.존 스토리 엮음, 백선기 옮김(2004), 『문화연구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북스, 22쪽 재인용

5) 앞의 책 『문화연구란 무엇인가』의 옮긴이(백선기)는 ‘역자 서문’을 통해 이러한 열기를 ‘패션적 열풍’이라고 진단하면서 1980년대 초반의 ‘비판 커뮤니케이션 연구’, 1990년대 초반의 ‘기호학’,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비교하면서 문화연구는 이런 학문적 ‘패션’이나 ‘열풍’으로서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6) 앞의 책, 369~371쪽

7) 이동연의 문예아카데미 2003 여름강좌 「대중문화연구의 키워드 - 문화연구 : 이론인가 운동인가」에서의 구분을 따른 것이다.

8)  “80년대 대처주의의 등장은 대학의 인문학자들이나 문학이론가들에게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것은 대학에도 시장의 논리를 강요했고 그것을 빌미로 대학의 교과과정을 직업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대처 정부는 대학의 진보적인 비판세력을 대학운영의 비효율성을 초래한 일차 원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이러한 압력은 대학의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사실 70년대 말까지 영국의 대학은 대학 밖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자체의 자율성을 십분 보장받았다. 대학의 학문연구 또한 대학 자체에 맡겨졌기 때문에 대학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대학교수의 안락한 보금자리였고 사회비판세력의 거처가 될 수 있었다. 비판적 이론들 역시 대학의 이러한 보호 기능 때문에 사회제도나 대학제도보다는 그 내부에 통용되는 가치만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대처정부는 진보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호하는 대학교육의 제도까지 수정을 요구하였다. 일순간 제도는 첨예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 억압적인 기능이 부각되었다. 가치 비판과 이론 탐구에만 전념해온 진보적 이론가들은 대처주의를 계기로 그동안의 가치비판이 그 가치를 뒷받침하는 제도에 대한 비판 없이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http://www.saehaneng.com/data/papers/nka_journal_2002_44_1_02_kimyonggyu.htm이후 영국의 문화연구는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신사회이론 등의 영향 속에서 경제적 하부구조와 정치적 상부구조의 분리를 정식화한다.

9) 2005년 10월 7일 인터넷판 <한겨레>에는 중앙대학교에 대학원 과정으로 문화연구학과가 개설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지난 92년 영문학자인 강내희(중앙대 교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간 『문화과학』의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개설된 중앙대 문화연구학과의 출범은 그동안 여러 문화연구자·문화비평가들이 ‘재야’의 교양강좌 형태를 빌려 파편적으로 진행했던 비판적 문화연구 수업이 대학원의 정식 학제 안으로 포섭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http://www.hani.co.kr/kisa/section-005006000/2005/10/005006000200510071840307.html

10) 앞의 책, 639~664쪽

11) 앞의 책, 680~724쪽

12) 앞의 책, 481~513쪽

13) 하윤금, 「문화연구의 패러다임 위기」, 『진보평론』, 제14호에서 재인용,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2&no=339

14) 데이비드 헬드, 박병용 옮김(2000), 「자유주의, 맑스주의, 민주주의」, 『모더니티의 미래』, 현실문화연구, 45-46쪽

15) 문화정책론’은 특히 대중 미디어 영역에서 하버마스의 ‘공론장’(public sphere) 이론을 토대로 한 공공영역의 확보문제로 연결된다. 부르주아 공론장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는 하버마스의 이론을 토대로 한 이와 같은 네오-하버마스적인 현실 문화·미디어 정치에의 개입방식은 직접적인 정책 개입 외에도 비정부 조직, 즉 NGO나 수용자 운동 등을 통하여 주로 이루어진다. 이런 개입방식과 운동방식은 신자유주의적 현실정치 속에서 우파 정책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함에도 현행의 문제 해결을 위한 기획의 내용에서는 서로 매우 유사한 시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즉 양자는 공통적으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갈등과 모순이 국가나 정치적 조절, 관료적 권위 등에 의존해서는 더 이상 적절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기획은 자본의 입지를 넓히고 국가의 권위를 제한하는 탈규제 정책을 통하여 정책적 과부하를 해결하며, 사유재산, 시장, 노동윤리, 가족, 과학적 지식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동원과 시민 사회 안의 비정치적이고 핵심적인 영역의 조직화로 나아간다. 이를 위하여 국가는 다양한 코퍼러티즘(corporatism)적 합의를 유도하고 합법적인 NGO운동을 승인하게 되고 보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국가 속에서 생겨나는 점증하는 사회 갈등의 안전판을 마련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에 대한 공적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신사회운동, 혹은 시민운동의 방향과 현실적으로 일치하는 지점이 생기고 이는 다양한 현실 개혁적인, 문화 개혁적인 NGO운동 속에서 드러난다. 그 결과 현재 신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발전을 돕고 보조하는 다원주의 기획과 접합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 하윤금, 앞의 글

16) 예를 들어 정부의 문화예술육성책은 마치 일본 소니의 컬럼비아 사(社) 인수 사례와 흡사한 형태를 보인다. 일본의 소니가 문화적 콘텐츠 없이 베타방식을 고집한 나머지 VHS방식에 밀려나게 된 이후 컬럼비아를 인수하여 문화적 콘텐츠를 소유하고, 이를 무기 삼아 자신들의 새로운 기술을 문화산업적으로 강제하겠다는 전략은 결국 글로벌기업 소니의 약화를 초래했다. 이질적인 기업문화, 영역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기업을 인수하는 것만으로 혹은 새로운 사업 목표를 설정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문화산업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소니사의 패착이라 했을 때, 현재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부산의 영상도시 육성계획은 이질적인 목표, 문화, 영역을 지닌 정부의 개입을 통해 문화산업의 진흥을 꾀한다는 목표를 수립했다는 공통점을 지닌 셈이다. 예를 들어 국제영화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는 이유만으로 부산 영상중심도시가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어째서 깐, 베니스, 로카르노, 모스크바는 오늘날까지 영상중심도시가 되지 못했을까’란 의문에 먼저 답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