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삶을 생각하기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될까봐 두려워라// 세상이 나를 버릴 때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나는// 아침햇살에 내 인생이 따뜻해질 때까지/ 잠시 나그네새의 집에서 잠들기로 했다// 솔바람소리 그친 뒤에도 살아가노라면/ 사랑도 패배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마른 잎새들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내가 울던 날/ 싸리나무 사이로 어리던 너의 얼굴// 이제는 비가 와도/ 마음이 젖지 않고// 인생도 깊어지면/ 때때로 머물 곳도 필요하다" - 정호승, 쓸쓸한 편지
창 밖이 부옇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누는 정담과 덕담들 속에 앉아 있노라니 문득 외톨이였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계시지 않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번번이 속절없는 마음으로 맞으며 따스한 품이 많이 그리웠더랬습니다. 그래서 늘 제 주변에 사람들로 가득하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사랑도 기술이 필요한지라 제 곁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 어딘가는 여전히 대책없습니다. 많이 아팠고, 아파보았기에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한 겨울의 고슴도치처럼 서로를 아프게 합니다. 가까이 하자니 가시에 찔리고, 멀리 하자니 이 세월들을 견뎌내기에 너무 춥습니다.
한 때 냉소를 가장하여 이 세월을 견뎌보려고도 했습니다.
모든 낙관들이 무대책으로 보일 때, 절망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한겨울의 절망 속에서 그래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만들고, 책을 읽고 그것을 소비하여 밥벌이를 하면서, 늘 내 밥벌이의 부끄러움에 대해 고민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절망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기에 우리는 절망에 익숙합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소통에 능하지 못합니다. 가혹한 경쟁 사회라고 늘 세상이 떠들기에 내가 너를 죽이고, 내가 너를 딛고 서야만 세상 더 높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 보고 사는 것이 복되고 다행한 것이라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남의 탓이기만 해서야 세상살이는 여전할 겁니다. 그렇다고 '내 탓이오'를 거듭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더 나아질리 없습니다.
때로 사랑도 패배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때로 희망이 절망보다 더 거짓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96년의 1월 1일... 사랑 때문에 많이 아팠더랬습니다. 그 무렵의 일기장을 열어보니...
바람은 몰운대를 향해 불어온다. 구름이 쉬어 갔다는 전설 속의 그곳엔 아름다움이 있었다. 죽음의 서슬 퍼런 살기가 나의 육신에 두려움을 불러 일으켜 준다. 아리아리한 아픔이 얼음 배인 발목으로 한기를 쉴새없이 지어 나르고 나는 그곳에서 얼어붙는다. 우리 모두 잘못 살고 있어. 라고 바람은 나에게 미친 듯이 타이르고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혼자 바람의 계곡에 서 있다. 병깊은 슬픈 세월이 내게 오지 말라 이르고 나, 이곳에 몸져누워 한 세월을 보낸다. 바람은 언제나 낯익고 그 바람은 내게 슬퍼, 슬프다 라고 귀뜸 해준다. 슬프지 않은 한 세월을 우리는 연민으로 맞이하고 있다. 눈 속에 내 청춘, 발목이 묶였다.
들리는가. 미친 바람의 노래. 흐르다 흘러 얼음이 되어 굳어 가는 이 강산의 눈물이 나는 보인다. 그리고 그 강가에 발을 담그고 엷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님을 깨우친다. 미친 바람은 불어온다. 어디에서 너는 흘러오고 있는지···. 바람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유배되어 온 바람처럼 이제 갈 곳이 없다. 마음이 없는 바람은 아무것도 불어오지 못하고 불어 가지 못한다. 다시 사랑을, 내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을까?
사실 십 년 전의 고민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과도한 확신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만 무언가 믿을 만한 것, 무언가 의지할 만한 것은 언제나 필요한 법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생명체도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한 채, 멸종을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내내 위기였습니다. 더이상 나무 위에서 살기를 거부한 이래 인류는 늘 위기 상황 아래에서 생존을 위해 고민하며 살아왔고, 그 결과 오늘날의 우리들도 여전히 생존에 대한 번민 속에서 전전반측(輾轉反側)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집 사람 몰래 비자금 꽁쳐두고, 지갑을 열어보며 흐뭇해 하는 사람인 제가 여러분보다 세상을 좀 더 잘 사는 법을 알리 없습니다.
그저 세상을 좀 더 잘 살고 싶다.
그것이 현재 제가 고민하는 바입니다.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 농업시장 개방에 반대하다 전경의 방패에 찍혀서 숨지는 농민이 더이상은 없기를... 또 전경이 그들 앞을 막아서는 일이 없기를, 아니 애초에 그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구조가 없어지기를...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별인 지구가 더이상 인간에 의해 회복불가능하게 망가지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다소 거창하게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제가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희망합니다.
작게는 제 주변의 여러분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제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일들만 일어나길 희망합니다. 이곳이 여러분 모두에게 작은 숨통이 되고, 여러분의 깊어진 인생을 담고서도 때때로 쉴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일, 작더라도 실천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일... 그것이 거창한 대의 명분이나 결국엔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하는 모호한 이론보다 명확한 실천을 행하는 것이 비록 사랑이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절, 거짓이 진실보다 진실해보이는 이 시대, 희망이 절망보다 거짓인 이 사회에서 우리가 우리의 숨통을 열어내는 일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과 함께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합시다.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과 다른 것이 아니길 희망합시다. 불행과 행복은 따로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함께함으로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도록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더 나은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오늘 멈추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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