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2001)
감독 : 송일곤
출연 : - 혜나(김혜나), 유진(임유진), 옥남(서주희)
- "슬픔과 희망 사이 그곳엔 신비한 힘이 있다." 라는 카피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 영화 <꽃섬>.
단편 영화들로는 이미 유명한 감독인 송일곤의 첫번째 장편 영화이다. 사실 나는 <꽃섬>을 보기 전에 몇 차례 송일곤 감독의 영화들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명성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단편 영화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허세 같은 것.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영화는 영화로서의 생명이 절반 이상 뚝 떨어진다는 나의 단견이라면 단견이 그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 속 배우들은 어쩐지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은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나 역을 맡았던 김혜나는 아직 배우는 학생이었고, 두 명의 다른 배우들 역시 영화 연기자라기 보다는 연극으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 촬영 방식을 택해서 시나리오를 나누고, 분할하여 촬영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이야기 순서대로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같은 장소에서 촬영할 일이 별로 없는 로드 무비의 성격상 그 방법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었다.
<꽃섬>
이 영화에 대해서 그다지 길게 말할 기분은 아니다.
각기 다른 삶의 고통과 질곡을 안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이 그들의 슬픈 감정을 잊기 위해 혹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슬픔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하는 꽃섬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일들을 이 영화는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때로는 연극 무대를 스케치한 듯 그렇게 주섬주섬 챙겨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칫 지루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빠른 호흡에 익숙해진 탓이다. 일생동안 모든 동물이 하는 호흡의 수가 정해져 있다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렇게 햇 각 동물들의 평균수명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 호흡 수와 심장 박동수가 빠르면 빠를 수록 동작도 빠르고 성격도 급하다고 하는데 그 예를 들어 코끼리와 생쥐의 심장 박동수는 코끼리가 생쥐보다 훨씬 더디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은이런 영화를 자주 보게 되면 오래 산다인가? 글쎄, 사람에 따라서는 느릿느릿 말하는 사람을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사람들도 있고 보면 반드시 호흡의 빠르고 느림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송일곤 감독은 시종일관 관객들로 하여금 그저 지켜보도록 만든다. 감독은 아마 고집이 무척 센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였다. 관객은 누구나 극중의 어느 한 인물을 골라 자신과 동일시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극중 배우 누구하고도 쉽사리 동화될 수 없는 자신을, 감독은 스스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섣부른 페미니즘 영화처럼 남성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도록 부추기지도 않는다. 어떤 면에서도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주로 여성이라고 해서 이 영화가 페미니즘적인 영화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나의 생각엔 우리에게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페미니즘 설화. 이어도의 전설이 자꾸만 생각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란 사상에도 계급과 동서양을 나누는 어떤 구분이 있다면(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동양의 그것과 서양의 그것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듯하다. 그것은 마치 토종벌들이 꿀을 채집하여 집에 가져갈 때 머리를 집 입구에 받고, 그 안에 채집해온 꿀들을 저장하는 풍경과 서양벌들이 꿀을 채집하여 꿀을 저장할 때 항상 외부 적의 침공에 대비하여 머리를 밖으로 하여 꿀을 저장하는 모습처럼 다른 것이다.
토종꿀벌을 이용한 꿀통 근처에 양봉꿀벌이 나타나면 토종꿀벌들은 서양꿀벌의 습격으로 금새 전멸하게 된다고 한다. 서양의 페미니즘 신화가 아마존의 여전사들로부터 비롯되었다면 동양, 그중에서도 한국의 페미니즘 신화는 어쩌면 이어도 전설에서 발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존의 여전사들은 남자들의 대륙을 공격하고, 그로 인해 아마존의 여왕이 헤라클레스에게 굴복당하고 마는 데 반해서, 우리 이어도 전설의 여자들은 그저 남자가 없는 평화로운 섬으로 존재한다. 적극적인 네거티브가 아니라 떠남으로 해서 혹은 도착함으로 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이 영화 <꽃섬>을 보며 일부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 <꽃섬>에서는 가장 반항적인 캐릭터인 '혜나'마저도 엄마의 친구가 따라주는 맥주 한 잔을 넙죽 마시고 더이상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묻지 말라는 말에 변변한 말대꾸 없이 물러서고 마는 순둥이이다. 그리고 포구에 드러누워 꺼이꺼이 목놓아 운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지만 그 누구의 탓도, 책임도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거나 자신탓이라고 자책하지도 않는다. 혹은 신에게 갈구하여 얻은 목소리를 잃은 '유진' 정도가 자학하여 스스로 자살하려고 하지만 혜나와 옥남에게 구출된 뒤로는 누구보다도 조용한 사람이 되고만다.
<꽃섬>이 나에게 올해 본 10편의 좋은 영화 안에 들게 된 까닭은 상처입은 사람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에 대한 좋은 해답을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상처입은 사람을 질질 끌고 꽃섬에 갈 의사는 없다. 다만 지켜볼 뿐이다.
때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극도의 무기력함,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죽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사랑하는 나머지 상대방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감이 배반당하는 순간, 그리고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그 많은 일들에 대해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으로서 느껴야 하는 고통 역시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에 얹어진 돌덩이 같이 무거운 마음 하나 나눠짐으로 해서 함께 함으로 해서 우리는 영화 속의 유진처럼 죽음조차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 <꽃섬> 한 편만으로 송일곤 감독의 미래를 점쳐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의 미래를 기대해볼 뿐이다. 그리고 참고로 알려드리자면 꽃섬은 남해에 실제하는 섬이다.
* 2001년 12월에 썼던 리뷰라 현재 송일곤 감독의 미래와는 상관없는 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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