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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판도라의 호기심을 통해 발견한 희망, 금서(禁書)

판도라의 호기심을 통해 발견한 희망, 금서(禁書)


우리가 흔히 ‘문화’라고 부르는 일상의 공간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지배적 문화가 대중에게 널리 유포되는 장이자, 동시에 이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병존하는 공간이다. 문화(일상)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다양한 정체성, 저항력과 지배계급의 통합력 사이의 투쟁의 장(battle field)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일상문화란 이와 같이 미시적인 영역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지배적 문화)와 대중(다중)이 매일 반복적으로 벌이는 투쟁과 타협이 서로 ‘타협적 평형(compromise equilibrium)’을 이룬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금서, 혹은 판금도서란 지배계급이 허용할 수 없는 금지된 지식 - 타협적 평형을 붕괴시킬 수도 있을 만한 파괴력 - 을 담고 있다고 간주되는 책을 의미한다. 금서란 당대에 발간 혹은 보급이 금지 ․ 제약 당한 책을 말하며, 검열제도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금서의 범위는 단순히 법률로 정리된 것이기 보다는 그 책을 발간·보급·유통하여 처벌당하거나 심지어 읽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책을 말한다. 이러한 금서는 대체로 정치적 이유(체제의 안전, 이데올로기, 공안질서 등), 종교·신앙적 이유, 사회적 이유(음란·외설 등)를 들어 만들어진다.

지배와 피지배계급의 문화적 투쟁이 역사 이래 지속되어 온 것처럼 금서의 역사는 책의 역사라 할 만큼 연원이 오래되었다. 금서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중국의 진시황(기원전 259∼210)이었다. 그는 인류 최초의 분서사건인 분서갱유(焚書坑儒, 기원전 213년)를 통해 백성에게 꼭 필요한 의약과 복술, 농경에 관한 글과 진나라의 기록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살라 버리고, 그 이듬해에는 유학자 460명을 산 채로 매장시켰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은 2대 칼리프 오마르 1세(재위기간 634~644)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뒤 도서관에 보관된 장서들을 모두 땔감으로 썼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태종이 참위술서(讖緯術書)를 요서(妖書)라 하여 모두 불태우도록 했고, 정조 9년에는 『정감록』에 대해 금서령을 내렸다. 금서는 왕정과 공화정, 종교를 불문하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를 넘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책(인쇄물)에 대한 검열제를 만들어낸 것은 종교개혁에 대항하고, 지동설의 유포를 막기 위한 교황청의 시도에 의한 것이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이념 및 정치권력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학문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트리엔트 종교회의(1545~63년)를 통해 이단에 해당하는 책들을 선정하여 이른바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을 지정했다. 우리가 흔히 색인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인덱스(index, 색인)”란 말은 이처럼 본래 금서목록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수도사들처럼 금지된 책들을 탐독했다. 도리어 이런 책을 찾아 읽다보니 금서목록이 닳고 닳아 ‘색인(index)’이란 말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금서목록에 수록된 책들은 1966년 폐지될 때까지 무려 400여 년간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외에도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는 모든 서적의 무허가 인쇄가 금지되었고, 영국의 경우에는 런던 ․ 옥스퍼드 ․ 케임브리지 이외의 지역에 인쇄기 설치가 허가되지 않았다. 19세기 이전까지 책은 자유롭게 인쇄되고, 읽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금서가 가장 많이 양산된 시절은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였던 제1공화국 시절엔 극도로 궁핍했고, 전후였던 지라 원칙적인 금서는 있었다고 해도 실질적인 금서는 별로 없었다. 4월 혁명을 통해 사상의 자유가 표출되었지만, 뒤이어 5.16쿠데타로 집권한 제3공화국은 수많은 금서들을 양산하면서 엄격한 사상통제를 실시했다. 유신을 계승한 제5공화국은 온갖 책들에 구실을 붙여 금서를 만들었지만, 금서가 된 책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어 도리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가짜 김일성’설을 담아 당시 정권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최고의 반공서적이랄 수 있는 이명영의 『김일성열전』은 김일성에 대해 다뤘다는 이유로, 1981년 발간된 무협소설 『무림파천황』은 정파(正派)와 사파(邪派)의 대결 구도를 변증법을 통해 설명했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판금조치 당했다. 당시 독재정권은 길 가던 시민들의 가방 속을 뒤지며 불온문서를 소지하고 있는지 검열했다. 이와 같은 사상과 표현에 대한 검열 및 처벌은 민주화된 현재까지 국가보안법 및 기타 법률 속에 온존하고 있으며, 지난 권위주의 시대 만들어졌던 금서에 대한 해제 조치는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유럽사 교수인 로버트 단턴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 프랑스인들은 어떤 금서를 읽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책과 지식의 전파 과정을 통해 프랑스혁명이 가능했던 원인을 찾는다. 단턴이 주목하고 있는 금서들은 뜻밖에도 오늘날 고전의 반열에 오른 계몽주의 서적들이 아니라 대중들이 전제왕권의 눈을 피해 읽던 대중문학서들이었다. 단턴은 이런 대중문학서들 가운데 어떤 것도 프랑스인들에게 전제군주의 폭압에 저항하라거나 사회질서를 전복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신 이런 금서들은 왕권은 신에게서 부여되었다는 왕과 귀족의 권위를 밑으로부터 붕괴시켰다. 일견 경박해 보이는 대중문학서들은 마치 우리네 마당극의 해학과 풍자처럼 근엄한 왕과 귀족들을 조소하고, 우스개로 만들어 구체체(앙시앵레짐) 질서에 근본적인 타격을 가했다.

지금까지 ‘민주화항쟁’으로만 기록되어 온 87년 민주화운동은 이후 20년 동안 긍정과 부정을 떠나 우리 사회를 이전 ‘권위주의’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 변모시켰다는 점에서 서구의 68혁명에 비견될 만한 혁명이었다. 그와 같은 87년 혁명,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진지함과 경박함, 계몽과 음란을 떠나 지배계급이 밀실에서 금지시켜온 것들에 대한 대중의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세상의 모든 신화들이 증명해주듯 인간이 품고 있는 앎에 대한 의지는 판도라의 불행과 프로메테우스의 불온, 아담과 이브의 타락, 도마의 의심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판도라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노예에서 주인으로,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통해 지혜를, 도마의 의심을 통해 믿음을 얻는다. 그것이 지식의 힘이고, 오늘날까지 갇혀있는 금서, 금지된 지식을 자유롭게 풀어내야 할 이유이다.

2006.9.25.월요일자 <한성대신문>(38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