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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바람구두가 선정한 2006년의 책 - 월간 <함께사는길>, 2006. 12월(통권162호)

바람구두가 선정한 2006년의 책
(2005. 10월부터 2006년 10월까지)
우리에게 2006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 질문에 답하기 전, 우리는 잠시 20년 전의 오늘을 떠올려보는 것이 좋겠다. 1986년은 아시안게임이 있던 해이고, 한동안 “86, 88”은 번영을 이룩해줄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 시대의 우리들은 지금보다 암울했을까? 이 무렵 한국의 노동자들은 주당 52.4시간 노동으로 세계1위를 차지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미국의 전폭기들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폭격했고, 소련에서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7월에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다.


과거를 기억하는 서로 다른 방식


양극화와 비정규직의 양산, 정치개혁실패가 잇따르면서 권위주의 독재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현실인식은 극단을 달린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1.2』(책세상, 2006)은 지난 시대의 필독서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대한민국이 성취한 결과를 부정하는 좌파 민족주의 진영의 자학사관을 담은 책이라고 비판한다. 이 책의 편집위원들은 엄밀한 고증에 입각한 학문적 성과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론 노 대통령이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했다는 발언과 그런 분위기에서 과거사 청산 법안들이 만들어지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올해가 다 가기도 전에 대한민국이 성취(?)한 또 하나의 결과를 보여주는 두툼한 책 『야만시대의 기록 - 고문의 한국현대사』(역사비평사, 2006)가 출간되었다. 앞의 책이 노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발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책은 지난 2004년 12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열린우리당의 이철우 의원에 대해 “지금도 조선노동당 간첩이 국회에서 암약”하고 있다고 말한 사건을 보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올바른 청산과 정의의 복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과거사는 언제라도 정치의 중심에 부각될 수 있는 뇌관이다. 그 이유는 과거사가 단 한 번도 깨끗하게 청산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철우의 경우에도 과거 재판기록만 놓고 보자면 자백한 간첩이다. 권인숙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당시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믿거나, 그 재판기록이 “한 번 들어오면 대통령도 무사히 나갈 수 없다”던 고문 기술자들의 고문과 용공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본주의, 성장과 시장 논리가 제압한 도박판에서 살아남는 법

언제인가부터 우리 사회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신조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좌파 신자유주의’, ‘인권을 위한 전쟁’, ‘평화를 위한 핵실험’이 그것이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르포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프로메테우스, 2006)을 통해 핵발전소를 책임진 성실한 한 가장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온가족을 잃는 참사를 피할 수 없었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확히 20년 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발생한 체르노빌 참사는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발표하지 않았고(대략 1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 지금도 체르노빌에는 192톤의 핵연료가 미봉된 채 잠들어 있다. 우리가 북한의 공포와 미국의 증오 사이에서 벌어진 핵실험에 찬성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난 해 우리는 한 과학자가 벌인 언론플레이에 얼이 빠졌던 경험이 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지금도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태연자약하게 벌어지는 것일까? 도로시 넬킨과 로리 앤드루스는 『인체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궁리, 2006)를 통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동안 우리 몸의 생체(유전자) 정보에 특허권이 부여되고, 이를 상품화하여 이익창출의 도구로 삼는 시장과 생명기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황우석의 숭고한(?) 연구를 위해 몸 바친 이들에게 난자체취의 위험성은 사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황우석의 생명공학이 가져다 줄 풍요의 도마 위에서 우리의 몸(유전자, 생체정보)은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일들에 둔감한 걸까? 얼마 전 모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TV광고는 미인선발대회를 코믹하게 엮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47%는 주가지수연동정기예금에, 48%는 환매조건부 채권에 투자하며 5%는 부족한 미모에 조금 더 투자”하겠다는 미인의 소감 뒤엔 좀더 긴 뒷이야기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더 이야기해보라는 권유에 참가자는 “얘들아!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고 외친다. 젊은 세대는 언제나 기성사회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기 마련이지만, 오늘의 젊은 세대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자기경영, 자기혁신에 전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그런 논리를 담고 있는 경영처세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당연하지만 정말로 개처럼 벌어도 좋은 걸까? 지난 해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마시멜로 이야기』(한경BP, 2005)의 이중번역 논란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어디로 향하는지 잘 보여준다.

만화 『타짜』(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는 대중적 호응에 힘입어 영화화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대 배경을 갖고 있는 만화 『타짜』에서 자전거를 갖고 싶었던 곤이의 소박한 욕망은 결국 그의 청춘을 도박판에 저당 잡히도록 한다. 빨치산과 국군이 밤낮으로 번갈아 출몰하던 지리산에서, 살벌한 승부가 펼쳐지는 도박판에서 주인공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깨달은 것, 다른 타짜들처럼 죽거나 손가락이 잘리지 않고, 몸성히 살아남는 방법으로 깨우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멈췄다. 그것만이 돈을 위해 체면도, 염치도 없이 벌거벗은 욕망들이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도박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

1986년엔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라는 <아, 대한민국>의 노래가사처럼 유람선이 정말 한강 위로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아~ 대한민국”을 외친다. 다만 지금의 “아~”는 풍요와 번영을 상징 조작했던 그 시절의 외침과 달리 한숨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의 집권 세력은 이른바 민주화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한숨짓고 있는가? 다가오는 2007년 새해는 개인적으로는 87년 시민‘혁명’이라 규정하는 87년 민주화운동이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우리는 바로 그 시민혁명이 만들어냈던 87년 체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고비에 서 있다.


박태균의 『우방과 제국』(창비, 2006)이나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2006)는 모두 미국의 일방적인 세계체제와 직접적인 관계 속에 살펴야 하지만, 문제의 복잡성을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한미FTA'라는 하나의 사안을 두고 우석훈은 크게 세 가지 층위의 각기 다른 고민거리를 제기한다. 첫째는 생산력 중심, 발전 중심의 패러다임은 결국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폭주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 둘째는 기존의 87년 체제에 의해서는 어떤 대통령이 선출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체제를 개혁하거나 보수하기 어렵고, 호민관으로 선출된 대통령 자신의 폭주를 국민직접행동 이외에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것, 셋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라도 새로운 시스템을 상상해 내고, 그것을 국민적 합의에 의해 도출해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즉, 우석훈은 우리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느닷없는’ 한미FTA 폭주를 통해 우리 사회의 경제시스템, 국가시스템 전반에 걸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폭주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박태균은 그간의 한미관계가 대등할 수 없었던 것은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정권들의 태생적인 한계에도 있지만 ‘국가안보’를 빌미로 ‘정권안보’에 치중한 정권을 경제성장 혹은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승인해온 우리들 자신에게도 있음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만약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면 한미관계는 좀더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무엇인가? 87년 혁명 이후 어느새 20여 년간 지속된 절차적 민주화에 의해 수립된 민주주의 정부 아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한미관계의 불평등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박태균은 이것이 지속되는 독재의 유산이며,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사회진화론적인 약육강식 담론을 우리들이 내면화한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통해 누렸던 경제적 ‘특수’를, 미국과의 동맹으로 덩달아 우리도 ‘제국’이 될 수 있다는 음험한 욕망이 왜곡된 한미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상상력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가 꿈꾸셨던 대한민국입니다.”라는 CF가 있었다. 이 광고에 대해 반감을 품은 이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 광고가 호명하는 아버지들이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것은 사실이고, 분명 그들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은 배고픔을 극복하는 대한민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를 저당 잡히긴 했지만 분명히 성공했다. 그러나 87년 체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었지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줄 것인가. 우리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그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 할 때이다. 이제 소개하려는 두 권의 책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 해답의 단초가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순홍 유고전집 1. 2 - 생태학의 담론, 정치생태학과 녹색국가』(아르케, 2006)과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길, 2006)가 그것이다. 책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지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합리적이고, 급진적 실천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책 소개를 가름하고자 한다.

<출처 : 함께사는길, 2006. 12월(통권1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