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독이란 성교를 통해 전파되는 대표적인 질병으로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명 '화류병(花柳病)'이라고도 하는 성병은 영어로는 'venereal disease'라고 하여 보통 V.D.라고 약칭된다. 재미있는 것은 'venereal'이란 단어의 어원이 비너스(Venus)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의학계에서는 결핵, 나병, 성병을 일컬어 3대 망국병(亡國病)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성병으로 분류된 질병인 '임질, 매독, 연성하감, 성병성 임파육아종, 서혜육아종' 의 다섯 가지였으나 최근에는 비임균성 요도염과 에이즈(AIDS)가 추가되었다.
질병 중에는 인류의 생활상과 역사 자체를 변화시킬 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13세기의 나병, 14세기의 페스트(흑사병), 16세기의 매독, 17-18세기의 두창(천연두)과 발진티푸스, 19세기의 콜레라와 결핵, 또한 20세기의 유행성 감기(인플루엔자)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십자군 원정의 결과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한 페스트는 중세사회 자체를 붕괴시키고 근대의 문을 활짝 연 계기가 되기도 했다. 1348년 한 해 동안에만 6천만에서 7천만 명에 이르는 유럽인들이 페스트의 엄청난 위력에 목숨을 빼앗겼다. 이런 전염병의 기승은 장원이라는 토지에 묶인 농노의 노동력에 기반한 경제 구조를 그 뿌리부터 붕괴시켰다. 미국은 북미대륙에서 인디언들을 절멸시키는 한 방법으로 천연두균을 묻힌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선물했고, 그 결과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전멸당했다.(세균무기의 엄청난 위력을 일찌감치 증명해 보인 셈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은 결핵이 창궐하도록 했고, 20세기 초엽의 유행성 인플루엔자(구체적으로는 스페인 독감)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그리고 그의 부인 에디트 하름스를 비롯한 2,500만 명을 희생시켰다. 인류의 역사는 질병에 대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류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수많은 질병들이 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완전히 사라지거나 거의 퇴치되었지만 유독 '매독'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매독의 기원과 역사
인류의 역사와 비슷한 연륜을 지닌 매독의 기원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고대로부터 존재해왔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콜롬버스에 의한 유래설이다. 고대존재설은 석기 시대의 유골에서도 매독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고대의 문헌에서 매독이라고 생각할 만한 질병의 기록이 있는 점을 근거로 하고, 고대의 유럽에 매독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콜롬부스 일행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전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원래 유럽에도 있던 질병인 매독이 이 시기에 특별히 더 창궐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콜럼버스 일행이 신대륙을 발견한 뒤에 유럽에 매독이 크게 퍼진 것은 확실하다. 혹자는 그런 까닭에 매독을 '신대륙 원주민들의 복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1492년 콜롬부스 일행이 제1회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은 1493년 3월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유럽에 매독의 만연되기 시작해 몇 년만에 유럽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매독이 동양까지 퍼지게 된 것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우회하는 해상교통로를 개척한 뒤의 일로 그들 일행이 기항한 인도, 말레이 반도 등에 먼저 퍼지고, 이 지역과 상업적 교류를 하던 중국인에게 옮겨져 1505년경에는 이미 '광동창(廣東瘡)'이라고 불리며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에서 유입된 창병(瘡病)이란 뜻에서 당창(唐瘡)또는 광동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1493년 쯤 유럽에 첫발을 디딘 매독이 세계를 돌아 중국에 퍼진 것은 1505년경, 일본은 1512년, 조선은 1515년쯤 당시 명나라를 거쳐 육로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서양의 어려운 교류와 불편한 교통 상황을 감안할 때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조선까지 유입되는 데 걸린 20년 남짓한 시간은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참고로 1981년 미국 뉴욕에서 첫 에이즈 환자가 발생한 지 5년만에 국내에서 첫 환자가 발견된 것과 비교해보면 정말 빠른 속도로 전파된 셈이다.)
1494년 나폴리 왕국을 두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이 전쟁은 그후 65년간 지속되었다.) 프랑스 샤를르 6세의 군대는 이탈리아를 침공해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강간했고, 그 결과 프랑스 군대에 성폭력을 당한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매독을 비롯한 여러 성병들이 발병하기도 했다.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성병을 「프랑스병french disease」이라 부르며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비단 이탈리아만의 경우는 아니었던지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도 '매독'을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 유럽에서 매독이 창궐하게 된 또 다른 계기는 잦은 전쟁으로 인한 성폭력과 매춘 때문이었다. 매독은 그 발생 원인의 90%가 성교로 인한 직접 감염이다.
나선형 모양을 가진 매독트레포네마(Treponema pallidum)라는 병원체(病原體)의 감염으로 인해 생기는 만성전염병인 '매독'에 걸리면 매독균의 침입부위(주로 음부의 피부나 점막)에 1-2mm 크기(완두콩만한)의 응어리가 나타나고 곧이어 가래톳(림프절)이 붓고, 전신의 림프절이 붓기 시작한다.<물론 경우에 따라 오럴섹스(oral sex)의 경우엔 입 주변에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날 무렵을 제1기 증상이라고 한다.
일단 매독에 감염되어 3개월쯤 지난 뒤 제2기에 이르면 미열을 수반한 두통과 관절통, 권태감 등의 증세가 나타나며 일명 '장미반점'이라고 하는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3년쯤 지나 제3기에 이르면 피부에 응어리졌다가 그 부분이 단단해지고 다시 헐면서 마치 분화구 모양의 흔적들을 남기게 된다. 사타구니와 겨드랑이, 유방 등에서 진물이 흐르는데 이 진물에도 역시 매독균이 포함되어 있다. 좀더 심해지면 구개부(口蓋部)가 파괴되고 콧날이 뭉개져 떨어진다. 매독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신체의 중요한 신경계까지 파고들어 정신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독일의 작곡가 슈만은 매독으로 정신 분열을 일으켜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문명은 매독이다(Civilization is Syphilization).
- 시빌라이제이션은 시필라이제이션이다.
매독의 공포로 인해 금욕적인 생활을 주장한 청교도가 유행하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매독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서양의 19세기(빅토리아 시대)는 산업의 발달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성적 방종을 통제하여 노동하는 것에 사람들을 집중시키려 하였다. 혹시 대화 중에 성기나 성적인 표현을 입에 담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으며, 음란하다고 여겼다. 점차 성에 대한 얘기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적인 장소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가 되어 갔다. 품위 있는 사람은 자기 부인이 임신했다는 말조차도 그녀가 지금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고 돌려서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임신'이라는 단어조차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일으키는 단어가 된 것이다. 재생산을 위한 성행위만이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쾌락을 위한 성행위나 여성의 오르가즘은 낭비로 여겼고, 남성의 쓸데없는 정액 방출 또한 낭비로 생각되었다. 노동을 위한 에너지를 위해 성생활은 통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런 엄격한 성도덕 관념을 에티켓으로서 당시 부르주아 사교계에 통용되었으나 그들이 실생활에서도 엄격히 지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들의 이런 도덕관은 유럽이 지배했던 아니 유럽의 문명이 전파되었던 지역에서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실제 유럽은 방탕했다. 페니실린이 발견되기 전까지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는 매독의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해가던 시절을 빈에서 보낸 스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했다.
"독신으로 지내는 친구들은 열이면 열, 창백한 안색으로 당황하여 나를 찾아오곤 했다. 어떤 이는 매독을 이미 앓거나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고, 또 다른 친구는 여자가 가진 아이의 유산 문제로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세 번째 친구는 가족 모래 치료할 치료비가 없어서였고, 네 번째 유형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돈을 지불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다섯 번째 친구는 윤락가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에곤 쉴레/ 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시공사 中에서>
당시 유럽의 대중가요는 일상적인 매춘을 미화시켜 윤락가에서 얻는 밤의 즐거움을 노래했다.(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의 남편이 그녀에게 전염시킨 병도 매독이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저술한 한나 아렌트의 아버지 파울 아렌트도 매독 환자였으므로 그녀의 어머니는 한나 아렌트를 임신하는 일에 두려움을 가졌었다. 매독은 본인의 잘못과 무관하게 운명처럼 병을 물려받은 태아의 선천매독은 25%는 분만 전에 사망하고, 25%는 출생후 수주내에 사망하며, 나머지 50%는 정신적 내지 육체적 불구아가 되어 버린다.) 매독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이설이 있기는 하지만 콜롬부스 시대의 선원들을 포함해서 그 병을 주로 전염시키는 존재들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남성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부르주아 사회는 오히려 그 병의 원인을 여성들의 책임인 것처럼 덮어씌우려 했는데 그 결과가 '팜므 파탈(femme fatal, 요부)'이었다. 가끔 혼인빙자 간음범죄자가 자신과 관계했던 여인들의 신체 특성 등을 기록하는 일이 신문지상에 등장하곤 하는데, 사실 그 원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루돌프였다. 그는 이 일로 당시 유럽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왕자 시절 파리의 고급 사창가들을 두루 섭렵해 난봉꾼의 대명사가 되는 등 당시 유럽의 지배층은 허리 위로는 부르주아 사회의 완고한 도덕관을, 밑으로는 환락의 극치를 달렸다. 1900년 4월 30일 하루 동안 프로이센에서 성병 치료를 받은 사람이 모두 4만 1,000명(그중 베를린 1만 6,000명)이었으며 베를린 남자 1000명 중 142명이 성병 환자였다고 한다.<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학고재 中에서>
부르주아 시대의 예술은 때로 이런 팜므 파탈의 이미지와 요부상을 통해 부르주아 사회의 현실을 고발했다. 아놀드 하우저는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와 쌍둥이 짝이다."라고 말한다. 왜 부르주아 시대 여성의 이미지가 창부의 모습으로 귀결되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부르주아 혁명에 동참한 예술가들은 함께 귀족이 지배하던 앙시엥 레짐을 타도하는데 성공했으나 부르주아지들은 혁명의 성공 뒤에는 그들을 버렸다.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뒤에도 그랬듯이 혁명이 끝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는 것은 언제나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시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을 구가하는 황금 시대"라 불렀다. 이 시기의 독일은 1895년부터 계속된 호황을 누렸고,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은 식민지를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부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풍요를 누렸다. 게다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이 시기 더욱 일취월장하여 로베르트 코흐는 폐결핵의 병원체를 발견했고, 바이엘 연구소에서는 아스피린을 만들어냈다.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엑스선이라는 광선을 발견했고, 특허국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특허 신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는 가스 조명이 전깃불로 대체되었고, 거리엔 새로운 명물인 승합버스가 등장하였다. 사람들은 새로운 유흥거리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영화라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를 발명해냈다. 이 시대의 유럽인들은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실내의 먼지를 제거했고, 잉크가 채워진 만년필을 통해 글씨를 쓰게 되었으며, 미국인 질레트가 만든 면도기를 통해 집에서도 안전하게 면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막대한 부와 영광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식민지 착취를 통한 경제적 호황은 예술, 문학, 회화, 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명작과 대작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유럽 문명의 화려함에 가려진 골수와 치마 속은 매독균에 감염된 줄도 모른 체 썩고 있었다. 최후의 번영이었다.
유럽문명과 함께 전파된 매독과 세기말에 출현한 새로운 성병 AIDS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어 갈 무렵 유럽의 당시 사람들은 그야말로 조화와 평화의 시대를 만끽했다. 전쟁다운 전쟁을 목격하는 일도 없이 사람들은 노년을 맞이했고, 많은 이들이 전쟁은 결투나 복수와 같이 야만스러운 전통이며 문명인들은 그것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당시가 그리 평온한 세기말은 아니었으며 사회, 정치, 사상 등의 각 분야에서 격변의 징후를 드러내는 많은 꿈틀거림이 있었음을 가르쳐 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팽창해가는 유럽 문명의 기술적 진보는 분명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매독을 퇴치할 수 있는 의약품들이 개발되어 완치가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어떤 것이 나타나도 불안을 느끼지 않았고, 때가 오면 곧 억압하여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조화와 평화의 세기는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종언을 알렸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민족주의에 고무되어 단결하고 통일국가를 이룩했으나 동시에 민족주의는 아직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식민지 민중들을 각성시켰고,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돌입한 신흥 민족 국가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결국 국가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서로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가열된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대량 학살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전쟁기술의 진보로 이어진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 당시 사람들 중 누구도 이 전쟁이 그 해 크리스마스까지 계속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이 전쟁은 6,500만의 사람들을 전장에 내몰았고, 그중 1,000만 명이 전사하는 4년간의 전쟁이 되었다. 이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에는 국가가 암암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승인한 위안소가 설립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목전에 둔 최후의 돌격 전에 이곳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쾌락을 즐겼다. 그리고 최후의 돌격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원치 않는 질병도 함께 얻었다.
전쟁은 끝났고, 여성들은 전쟁으로 소모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자본의 필요에 의해 그대로 공장에 남게 되었고, 경제적 부를 축적한 결과 남성 중심의 사회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1493년 유럽의 신대륙 발견 이후 대대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한 매독은 당시 유럽 전역을 떠들석하게 만들었고, 유럽 문명의 전파와 비슷한 속도로 전세계에 퍼져 나갔다. 매독은 서양 근대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유럽문명의 화려한 번영이 종언을 고한 뒤 세계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1493년 유럽에서 매독이 창궐한 지 근 500년쯤 뒤 미국은 새로운 성병 AIDS(후천성면역결핍증)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어떤 이들은 에이즈의 등장이 근대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물론 당시의 대다수 유럽인들이 매독이란 질병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들 역시 지금 당장 AIDS라는 질병이 '근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이 될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달된 의학과 성지식을 가지고도 매독의 완전한 퇴치에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유럽인들이 기술의 발달과 부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번영과 조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믿었던 당시처럼 어쩌면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새로운 세기의 평화와 번영이란 허울, 근대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거나 끝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어본다.
참고하면 좋은 책들
첨단의학시대에는 역사시계가 멈추는가/ 황상익/ 창작과 비평사/ 1999
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 황상익/ 한울림/ 1998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 문학사상사/ 1998
<2002/02/22 >
질병 중에는 인류의 생활상과 역사 자체를 변화시킬 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13세기의 나병, 14세기의 페스트(흑사병), 16세기의 매독, 17-18세기의 두창(천연두)과 발진티푸스, 19세기의 콜레라와 결핵, 또한 20세기의 유행성 감기(인플루엔자)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십자군 원정의 결과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한 페스트는 중세사회 자체를 붕괴시키고 근대의 문을 활짝 연 계기가 되기도 했다. 1348년 한 해 동안에만 6천만에서 7천만 명에 이르는 유럽인들이 페스트의 엄청난 위력에 목숨을 빼앗겼다. 이런 전염병의 기승은 장원이라는 토지에 묶인 농노의 노동력에 기반한 경제 구조를 그 뿌리부터 붕괴시켰다. 미국은 북미대륙에서 인디언들을 절멸시키는 한 방법으로 천연두균을 묻힌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선물했고, 그 결과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이 전멸당했다.(세균무기의 엄청난 위력을 일찌감치 증명해 보인 셈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은 결핵이 창궐하도록 했고, 20세기 초엽의 유행성 인플루엔자(구체적으로는 스페인 독감)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그리고 그의 부인 에디트 하름스를 비롯한 2,500만 명을 희생시켰다. 인류의 역사는 질병에 대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류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수많은 질병들이 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완전히 사라지거나 거의 퇴치되었지만 유독 '매독'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매독의 기원과 역사
인류의 역사와 비슷한 연륜을 지닌 매독의 기원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고대로부터 존재해왔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콜롬버스에 의한 유래설이다. 고대존재설은 석기 시대의 유골에서도 매독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점과 고대의 문헌에서 매독이라고 생각할 만한 질병의 기록이 있는 점을 근거로 하고, 고대의 유럽에 매독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콜롬부스 일행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전자의 주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원래 유럽에도 있던 질병인 매독이 이 시기에 특별히 더 창궐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콜럼버스 일행이 신대륙을 발견한 뒤에 유럽에 매독이 크게 퍼진 것은 확실하다. 혹자는 그런 까닭에 매독을 '신대륙 원주민들의 복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1492년 콜롬부스 일행이 제1회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은 1493년 3월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유럽에 매독의 만연되기 시작해 몇 년만에 유럽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매독이 동양까지 퍼지게 된 것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우회하는 해상교통로를 개척한 뒤의 일로 그들 일행이 기항한 인도, 말레이 반도 등에 먼저 퍼지고, 이 지역과 상업적 교류를 하던 중국인에게 옮겨져 1505년경에는 이미 '광동창(廣東瘡)'이라고 불리며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에서 유입된 창병(瘡病)이란 뜻에서 당창(唐瘡)또는 광동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1493년 쯤 유럽에 첫발을 디딘 매독이 세계를 돌아 중국에 퍼진 것은 1505년경, 일본은 1512년, 조선은 1515년쯤 당시 명나라를 거쳐 육로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서양의 어려운 교류와 불편한 교통 상황을 감안할 때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조선까지 유입되는 데 걸린 20년 남짓한 시간은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참고로 1981년 미국 뉴욕에서 첫 에이즈 환자가 발생한 지 5년만에 국내에서 첫 환자가 발견된 것과 비교해보면 정말 빠른 속도로 전파된 셈이다.)
1494년 나폴리 왕국을 두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이 전쟁은 그후 65년간 지속되었다.) 프랑스 샤를르 6세의 군대는 이탈리아를 침공해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강간했고, 그 결과 프랑스 군대에 성폭력을 당한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매독을 비롯한 여러 성병들이 발병하기도 했다.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성병을 「프랑스병french disease」이라 부르며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비단 이탈리아만의 경우는 아니었던지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도 '매독'을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듯 당시 유럽에서 매독이 창궐하게 된 또 다른 계기는 잦은 전쟁으로 인한 성폭력과 매춘 때문이었다. 매독은 그 발생 원인의 90%가 성교로 인한 직접 감염이다.
나선형 모양을 가진 매독트레포네마(Treponema pallidum)라는 병원체(病原體)의 감염으로 인해 생기는 만성전염병인 '매독'에 걸리면 매독균의 침입부위(주로 음부의 피부나 점막)에 1-2mm 크기(완두콩만한)의 응어리가 나타나고 곧이어 가래톳(림프절)이 붓고, 전신의 림프절이 붓기 시작한다.<물론 경우에 따라 오럴섹스(oral sex)의 경우엔 입 주변에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날 무렵을 제1기 증상이라고 한다.
일단 매독에 감염되어 3개월쯤 지난 뒤 제2기에 이르면 미열을 수반한 두통과 관절통, 권태감 등의 증세가 나타나며 일명 '장미반점'이라고 하는 붉은 반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3년쯤 지나 제3기에 이르면 피부에 응어리졌다가 그 부분이 단단해지고 다시 헐면서 마치 분화구 모양의 흔적들을 남기게 된다. 사타구니와 겨드랑이, 유방 등에서 진물이 흐르는데 이 진물에도 역시 매독균이 포함되어 있다. 좀더 심해지면 구개부(口蓋部)가 파괴되고 콧날이 뭉개져 떨어진다. 매독의 가장 무서운 점은 신체의 중요한 신경계까지 파고들어 정신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독일의 작곡가 슈만은 매독으로 정신 분열을 일으켜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문명은 매독이다(Civilization is Syphilization).
- 시빌라이제이션은 시필라이제이션이다.
매독의 공포로 인해 금욕적인 생활을 주장한 청교도가 유행하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매독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서양의 19세기(빅토리아 시대)는 산업의 발달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성적 방종을 통제하여 노동하는 것에 사람들을 집중시키려 하였다. 혹시 대화 중에 성기나 성적인 표현을 입에 담게 되면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으며, 음란하다고 여겼다. 점차 성에 대한 얘기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적인 장소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가 되어 갔다. 품위 있는 사람은 자기 부인이 임신했다는 말조차도 그녀가 지금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고 돌려서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임신'이라는 단어조차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인 욕망을 일으키는 단어가 된 것이다. 재생산을 위한 성행위만이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쾌락을 위한 성행위나 여성의 오르가즘은 낭비로 여겼고, 남성의 쓸데없는 정액 방출 또한 낭비로 생각되었다. 노동을 위한 에너지를 위해 성생활은 통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런 엄격한 성도덕 관념을 에티켓으로서 당시 부르주아 사교계에 통용되었으나 그들이 실생활에서도 엄격히 지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들의 이런 도덕관은 유럽이 지배했던 아니 유럽의 문명이 전파되었던 지역에서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실제 유럽은 방탕했다. 페니실린이 발견되기 전까지 유럽의 부르주아 사회는 매독의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해가던 시절을 빈에서 보낸 스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했다.
"독신으로 지내는 친구들은 열이면 열, 창백한 안색으로 당황하여 나를 찾아오곤 했다. 어떤 이는 매독을 이미 앓거나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고, 또 다른 친구는 여자가 가진 아이의 유산 문제로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세 번째 친구는 가족 모래 치료할 치료비가 없어서였고, 네 번째 유형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자에게 어떻게 돈을 지불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다섯 번째 친구는 윤락가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에곤 쉴레/ 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시공사 中에서>
당시 유럽의 대중가요는 일상적인 매춘을 미화시켜 윤락가에서 얻는 밤의 즐거움을 노래했다.(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의 남편이 그녀에게 전염시킨 병도 매독이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저술한 한나 아렌트의 아버지 파울 아렌트도 매독 환자였으므로 그녀의 어머니는 한나 아렌트를 임신하는 일에 두려움을 가졌었다. 매독은 본인의 잘못과 무관하게 운명처럼 병을 물려받은 태아의 선천매독은 25%는 분만 전에 사망하고, 25%는 출생후 수주내에 사망하며, 나머지 50%는 정신적 내지 육체적 불구아가 되어 버린다.) 매독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이설이 있기는 하지만 콜롬부스 시대의 선원들을 포함해서 그 병을 주로 전염시키는 존재들은 예나 지금이나 주로 남성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부르주아 사회는 오히려 그 병의 원인을 여성들의 책임인 것처럼 덮어씌우려 했는데 그 결과가 '팜므 파탈(femme fatal, 요부)'이었다. 가끔 혼인빙자 간음범죄자가 자신과 관계했던 여인들의 신체 특성 등을 기록하는 일이 신문지상에 등장하곤 하는데, 사실 그 원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루돌프였다. 그는 이 일로 당시 유럽의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왕자 시절 파리의 고급 사창가들을 두루 섭렵해 난봉꾼의 대명사가 되는 등 당시 유럽의 지배층은 허리 위로는 부르주아 사회의 완고한 도덕관을, 밑으로는 환락의 극치를 달렸다. 1900년 4월 30일 하루 동안 프로이센에서 성병 치료를 받은 사람이 모두 4만 1,000명(그중 베를린 1만 6,000명)이었으며 베를린 남자 1000명 중 142명이 성병 환자였다고 한다.<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학고재 中에서>
부르주아 시대의 예술은 때로 이런 팜므 파탈의 이미지와 요부상을 통해 부르주아 사회의 현실을 고발했다. 아놀드 하우저는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와 쌍둥이 짝이다."라고 말한다. 왜 부르주아 시대 여성의 이미지가 창부의 모습으로 귀결되었는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부르주아 혁명에 동참한 예술가들은 함께 귀족이 지배하던 앙시엥 레짐을 타도하는데 성공했으나 부르주아지들은 혁명의 성공 뒤에는 그들을 버렸다.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뒤에도 그랬듯이 혁명이 끝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는 것은 언제나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시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을 구가하는 황금 시대"라 불렀다. 이 시기의 독일은 1895년부터 계속된 호황을 누렸고,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은 식민지를 통해 들어오는 막대한 부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풍요를 누렸다. 게다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이 시기 더욱 일취월장하여 로베르트 코흐는 폐결핵의 병원체를 발견했고, 바이엘 연구소에서는 아스피린을 만들어냈다.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은 엑스선이라는 광선을 발견했고, 특허국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특허 신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는 가스 조명이 전깃불로 대체되었고, 거리엔 새로운 명물인 승합버스가 등장하였다. 사람들은 새로운 유흥거리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영화라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를 발명해냈다. 이 시대의 유럽인들은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실내의 먼지를 제거했고, 잉크가 채워진 만년필을 통해 글씨를 쓰게 되었으며, 미국인 질레트가 만든 면도기를 통해 집에서도 안전하게 면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막대한 부와 영광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식민지 착취를 통한 경제적 호황은 예술, 문학, 회화, 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명작과 대작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유럽 문명의 화려함에 가려진 골수와 치마 속은 매독균에 감염된 줄도 모른 체 썩고 있었다. 최후의 번영이었다.
유럽문명과 함께 전파된 매독과 세기말에 출현한 새로운 성병 AIDS
19세기에서 20세기로 바뀌어 갈 무렵 유럽의 당시 사람들은 그야말로 조화와 평화의 시대를 만끽했다. 전쟁다운 전쟁을 목격하는 일도 없이 사람들은 노년을 맞이했고, 많은 이들이 전쟁은 결투나 복수와 같이 야만스러운 전통이며 문명인들은 그것을 반복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당시가 그리 평온한 세기말은 아니었으며 사회, 정치, 사상 등의 각 분야에서 격변의 징후를 드러내는 많은 꿈틀거림이 있었음을 가르쳐 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팽창해가는 유럽 문명의 기술적 진보는 분명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매독을 퇴치할 수 있는 의약품들이 개발되어 완치가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어떤 것이 나타나도 불안을 느끼지 않았고, 때가 오면 곧 억압하여 퇴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조화와 평화의 세기는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종언을 알렸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민족주의에 고무되어 단결하고 통일국가를 이룩했으나 동시에 민족주의는 아직 독립을 성취하지 못한 식민지 민중들을 각성시켰고,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돌입한 신흥 민족 국가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결국 국가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서로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가열된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대량 학살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전쟁기술의 진보로 이어진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 당시 사람들 중 누구도 이 전쟁이 그 해 크리스마스까지 계속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이 전쟁은 6,500만의 사람들을 전장에 내몰았고, 그중 1,000만 명이 전사하는 4년간의 전쟁이 되었다. 이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에는 국가가 암암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승인한 위안소가 설립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목전에 둔 최후의 돌격 전에 이곳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쾌락을 즐겼다. 그리고 최후의 돌격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원치 않는 질병도 함께 얻었다.
전쟁은 끝났고, 여성들은 전쟁으로 소모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자본의 필요에 의해 그대로 공장에 남게 되었고, 경제적 부를 축적한 결과 남성 중심의 사회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1493년 유럽의 신대륙 발견 이후 대대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한 매독은 당시 유럽 전역을 떠들석하게 만들었고, 유럽 문명의 전파와 비슷한 속도로 전세계에 퍼져 나갔다. 매독은 서양 근대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유럽문명의 화려한 번영이 종언을 고한 뒤 세계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1493년 유럽에서 매독이 창궐한 지 근 500년쯤 뒤 미국은 새로운 성병 AIDS(후천성면역결핍증)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어떤 이들은 에이즈의 등장이 근대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물론 당시의 대다수 유럽인들이 매독이란 질병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들 역시 지금 당장 AIDS라는 질병이 '근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이 될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달된 의학과 성지식을 가지고도 매독의 완전한 퇴치에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유럽인들이 기술의 발달과 부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번영과 조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믿었던 당시처럼 어쩌면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새로운 세기의 평화와 번영이란 허울, 근대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거나 끝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어본다.
참고하면 좋은 책들
첨단의학시대에는 역사시계가 멈추는가/ 황상익/ 창작과 비평사/ 1999
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 황상익/ 한울림/ 1998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 문학사상사/ 1998
<2002/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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