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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카피레프트운동과 정보민주주의


카피 레프트(copyleft) 운동과 냅스터(Napster) 그리고 정보 민주주의


"어떤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황금률(대우받고자 하는 대로 행하라 - 성서)이라고 생각한다." - Richard Stallman.

mp3나 리눅스(Linux), 냅스터(Napster)를 포함한 카피 레프트 운동에 대해서 솔직히 뭐라고 자신있게 말할 만큼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명확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명확한 입장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냅스터와 mp3에 대해 직접 이해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헤비 메탈 밴드 메탈리카(Metallica)와 갱스터 랩 뮤지션 닥터 드레(Dr. Dre)는 냅스터를 반대했고, 하드코어 밴드 림프 비즈킷(Limp Bizkit)과 하드코어 랩 뮤지션 퍼블릭 에니미(Public Enemy)는 냅스터를 지지했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골치 아픈 이들도 많이 있으리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가 어느 한 가지 관점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워낙 난해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규정짓는 문제의 핵심은 '저작권'문제와 정보 공유(혹은 정보민주주의, 전자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 그렇다면 저작권(copyright, ⓒ)이란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자. 저작권이란 것은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Max Weber)가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발생을,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주의의 교리 하에서 금욕(禁慾)과 근로에 힘쓰는 종교적 생활태도와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는 그 무렵에 생겨난 것이다. 저작권의 개념이 생겨날 무렵의 모짜르트가 가난에 시달리며 결국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작권의 개념이 생겨나기 전의 작곡가들은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악보가 출판될 때 약간의 돈을 받거나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직접 연주하거나 교회나 귀족이 하사하는 돈 이외에는 자신의 저작에 대해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없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바흐나 헨델, 하이든 등의 작곡가들이 교회나 귀족 계급에 평생 얽매여 살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사실상 이들을 등지고서는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 저작권의 개념이 성립되면서 비로소 예술가들은 더 이상 고용주(교회, 귀족 계층)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쳐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 혁명 못지 않은 성과였다.(물론, 프랑스 혁명을 포함해 그 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자각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한 결과이겠지만) 이렇게 저작권의 원래 취지는 저자의 창조적 노동을 권장하여 공공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산업혁명기에 수많은 발명이 서구 사회에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 바로 이 저작권 덕이기도 했다. 반면 이런 저작권 개념에 둔감했던 동아시아는 종이, 화약, 나침반, 활자 등 세계 주요 발명품들을 발명했음에도 그 이후 발전이 더뎌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세상이 아날로그로 굴러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저작권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배타적인 권리가 되었다. 우리는 인터넷 상에서 프로그램 하나를 다운 받을 때마다, 혹은 MS사의 윈도우 프로그램 하나를 설치할 때마다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프로그램들을 설치할 때마다 수없이 많은 경고를 접해야 한다. 과거의 저작권이 귀족이나 교회와 같은 사회 상류 계급의 구속으로부터 예술가와 발명가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지금의 저작권은 또다시 자본에의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프로그래머는 자신이 밤을 세워 제작한 프로그램에 대한 저작권을 갖지 못한다. 이제 이런 배타적 권리를 가진 것은 '자본'이 되었고 프로그래머라고 지칭되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행한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서조차 소외되고 있다. <모던 타임즈> 이후 지속되는 노동 소외 현상은 <디지털 타임즈>에도 반복된다.

냅스터(Napster) 유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얼마 전까지 냅스터를 통해서 mp3를 전송받고, 또 누군가는 나의 하드 디스크에 저장되어 있는 mp3를 다운로드해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냅스터란 무엇인가? 냅스터는 엄밀히 말해서 음악 파일,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 파일을 전송하는 프로그램들 중 하나를 말한다. 냅스터는 mp3 파일을 전문적으로 전송하는 프로그램으로 개발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이제까지와 다른 점은 인터넷 상의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서버에 접속한 사용자들 개개인의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파일을 다운로드한다는 점이다. 1:1 전송방식이라는 의미에서 P2P(peer to peer) 방식이라고 불리는 냅스터는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mp3가 유령이라면 냅스터는 그 유령들의 공동체이자 네트워크인 셈이다. 웹이라는 공적 공간에 게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 공간인 하드 디스크에 저장했을 뿐이므로 이전처럼 'mp3의 불법 업로드'라고 주장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재판에서 패배한 냅스터는 더 이상 그런 서비스를 할 수 없다.
자, 이제 당신에게 한 가지만 질문해 보도록 하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만약 국내의 수입 음반사나, 다국적 레코드사들이 그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몇 가지 규칙 - 국내 정서에 부합되지 않는다 거나 상업적 가치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 에 의해서 수입하지 않았거나 라이센스 생산을 하지 않은 음반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들을 수 있을까? (물론 국내외 인터넷 음반 구매 사이트를 통해서 음반(음원)을 구매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까지 냅스터를 통해서 미리암 마케바(Miriam Makeba)와 밥 말리(Bob Marly)의 (I shot the sheriff)를 들을 수 있었던 이들에게 이제는 그런 창구 자체가 막혀 버렸다. 이것은 단순히 냅스터의 위법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냅스터 판결은 단지 냅스터 서비스의 사용 또는 유료화 유무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을 통해 앞으로 개발될 모든 소프트웨어와 무료 인터넷 정보 공유 서비스가 철퇴를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저작권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안을 공유권이란 개념에서 찾아왔고, 냅스터는 초창기에 이런 이념을 실천하는 실험의 장이었기에 그 의미가 컸다. 그러나 냅스터 측은 독일의 미디어 그룹인 베르텔스만과 전격 제휴해 상업화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냅스터는 서비스 초기부터 RIAA(미국음반산업협회)와의 숨겨진 뒷거래가 있다는 루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계 사회주의 웹사이트 저널’에 따르면 냅스터가 그동안 보여 준 ‘성장하는 데이터베이스’의 파급효과는 사이버 세계에서 ‘디지털 재산’이 어떻게 제도권과 연결돼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예로 평가된다. 서비스 초기 ‘무료음악의 시대’를 공언해 네티즌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성장한 냅스터가 폐쇄를 목전에 두고 이제 ‘가장 자본주의적인 미래의 수익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2001. 2.16일자 <파이낸셜뉴스>
pontifex@fnnews.com 고현석 기자 기사 중 재인용)

이 말은 냅스터가 처음부터 상업화 전환이라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회원을 모집하고 당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의미가 된다.

정보 민주주의와 카피 레프트 운동의 뿌리
정보 민주주의(혹은 전자 민주주의)와 카피 레프트 운동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바나 목적하는 바가 비슷하면서도 약간씩 다르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정보 민주주의가 인류에게 공헌할 수 있는 정보(혹은 지적 재산)를 일부 이익 집단(국가를 포함해서)이 독점할 수 없게 하고, 사회 공공재로 취급하여 공유하자는 것이라면 카피 레프트는 정보 공유 운동을 모든 지적 재산권으로 확장한 것으로 오랫동안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지적 창조 작업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는 독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카피 레프트 운동은 정보 민주주의(전자 민주주의)의 실천적 수단이 된다.
정보 공유와 정보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경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이들이 주장하는 정보의 공유, 정보 민주주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물론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도 약간의 이견은 존재하지만) 다음의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 AT&T는 초창기인 지난 1875년 전화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특허를 수집했다. 이 때문에 라디오의 도입이 약 20년 늦춰졌다. 제너럴 일렉트릭(GE)도 특허관리를 통해 형광등의 도입을 지연시켰다. 형광등은 당시 이 회사 소유의 백열등 시장을 위협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2001. 2.15일자 <파이낸셜뉴스>
pontifex@fnnews.com 고현석 기자 기사 중 인용)

자본에 의한 저작권의 독점 혹은 정보의 독점이 빚어낸 사례들이다. 단순히 라디오의 도입이 20년 늦어지고, 형광등의 도입이 늦어진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맥락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얼마 전 개봉되었던 <컨스피러시conspiracy>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대통령의 사생활조차 만천하에 공개되는 미국이지만 실제 미국에는 정보의 공개를 40-50년 심지어 100년 이상 공개를 금지하는 법률이 있다. 이런 '음모 이론(conspiracy)'이 영화화되고 있는 배경에는 미국이란 사회 자체에 일반 국민 대중이 알 수 없는 비밀 작전(가령 '콘트라게이트'와 같은)이 실시되고 있고, 비밀정보기구가 정보를 장악하고 있다는 의심에 기초하고 있다. 간혹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미국의 정보공개금지법에서 해제된 문서를 통해 굴절된 우리 현대사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새로 밝혀졌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특정 집단에 의한 정보 독점은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시기를 놓치게 하고, 정보를 장악한 집단에 의해 역사가 굴절되는 사태를 바로잡을 수 없도록 한다.

정보 민주주의는 큰 맥락으로 보자면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주의' 요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카피 레프트 운동 역시 그런 점에서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한다는 명목으로 인류의 전멸까지도 가능한 핵무기를 개발하였고, 이를 실제로 사용한 경험이 있다. 기본적으로 무기라는 것이 통제 가능한 것이어야 무기로서의 실효성이 있다고 할 텐데 핵무기는 통제 불가능이라는 점에서 이미 무기가 아니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해 1942년 9월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오펜하이머와 시카고 대학의 엔리코 페르미를 중심으로 원폭개발을 위한 연구·실험에 착수하였을 때 인류 전체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갈 수도 있는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전세계 인류 중 극소수의 사람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 프로젝트 책임자인 오펜하이머 박사조차 첫 원폭실험 현장에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고 중얼거릴 만큼 원자폭탄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이후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적 사회 분위기는 사라졌고,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과학기술을 과학자들의 세계에만 맡길 수 없다는 자각이 생겨난다.
과학기술의 독점이 불러오게 될 또다른 폐해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유전자 복제 기술을 살펴보자. 프린스턴 대학 분자생물학과 교수인 리 실버의 <리메이킹 에덴>(1998. 한승)은 앞으로 10세대가 지난 2350년의 미래를 다음과 같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두 가지 계층, 즉 과거 세대의 유전자를 전통 방법(성교를 통해)으로 이어 받을 수밖에 없는 '자연인'과 고가의 최신 인공유전자를 주입받아 탄생한 '부유유전자 계층'으로 양극화한다. 이 두 계층은 오랜 세월 서로 결혼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지다 보니 실제 유전적 거리도 점점 멀어져 급기야는 두 계층 사이에서는 임신이 불가능해지고 인간과 침팬지처럼 두 인간계층은 별종으로 치달아간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혹자는 생명공학(유전자 공학)의 유용성에 대해 주장한다. 이를테면 생명공학이란 과학기술이 인류의 환경문제, 의료문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공학을 통해 새로 개발된 종자를 이용하면 지금보다 척박한 땅에서 더 많은 수확량을 거두어들일 수 있고, 병·해충에도 강하기 때문에 농약 사용이 줄어들어 환경 오염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환경, 의료, 식량문제는 단순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뿐 더러 이미 현재의 과학기술로도 어느 정도는 해결 가능한 것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에서 낭비되고 버리고 있는 식량자원만 잘 운용하더라도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자전쟁'이라고 까지 일컬어지는 신품종 개발에 있어서 다국적 종자회사들은 새로 개발된 종자를 뿌려 수확한 종자들에서 씨앗을 거두어들일 수 없도록 유전자 조작을 가하고 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매번 종자회사에 돈을 지급하고 씨앗을 구매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자본의 논리에 충실했던 과학기술이 생명공학 기술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자본의 논리'에서 초연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우문(愚問)이다.

카피 레프트 운동이 걸어가야 할 머나먼 길
앞으로 모든 저작물들에 대한 디지털화가 이루어지면 이런 카피 레프트 운동은 더욱더 많은 분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카피 레프트 운동은 기본적으로 모든 저작물이 공공의 일반적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있다고 믿으며, 결코 불법 복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저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가 취득한 지식과 정보가 인류가 쌓아온 공동의 재산이라고 했을 때 공공선을 위해 좀더 자유롭게 수정하고, 공유하여 지식과 정보가 특정 전문가 집단에 의해서만 취급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카피 레프트 운동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너무나 많다. 국내의 전업 시인이나 작가들,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경우엔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며, 인류에 공헌하는 지식이나 연구란 것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과 같이 개인적인 저작물들도 있겠으나 막대한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결과가 되거나 연구의 정체를 초래할 것이다. 지금까지 정보 민주주의(전자 민주주의)와 카피 레프트 운동이 치중해 온 분야가 주로 인터넷과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던 이유도 이런 어려움들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속통신망의 보급과 함께 인터넷의 대중화 속에서 카피 레프트 운동이 논의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의 출범을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아 왔다. 그 이유는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체가 새로운 빅 브라더의 출현이 될 것인지 아니면 중심 권력이 사라지고 다양한 이해와 욕구를 창출하고 수용할 수 있는 나눔의 장이 될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대중의 호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인터넷이 품고 있는 이상이 정보의 독점이 아닌 정보의 공유에 있고, 인터넷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지식과 기술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이들의 공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새로운 지식, 정보,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그 이전에 축적된 지식들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버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보 민주주의(카피 레프트) 운동은 과학 기술에 대한 시민(네티즌)참여 운동이며, 카피 레프트 운동의 이런 상호 소통성은 앞서 이야기했던 과학기술을 비롯해 인류가 축적해 온 전문지식의 공유를 통해 과학기술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해 갈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다. 카피 레프트 운동은 네티즌의 각성을 통해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의 원활한 의사 소통에 기반한 사회적 상호 학습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다.

<2001.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