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기의 기대감에 설레었던 사람들에게 21세기는 전쟁을 통해 앞으로의 인류에게도 시련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하는 과감함을 보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02년 괴테는 파우스트 제1부를 완성했고,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작품 31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고야는 옷입은 마야, 나체의 마야를 그렸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실이 프랑스에 알려지며 전란의 조짐이 싹트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0년 전인 1902년 제1차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고, 한성-인천간 전화가 개통되었습니다. 러더퍼드는 방사성 원자의 붕괴설을 발표했고, 흡슨 <제국주의론>, 좀바르트 <근대 자본주의>, 크로체 <역사의 이론과 역사>를 저술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로부터 가장 가까운 과거였던 20세기를 전란과 파괴, 살육의 시대로만 기억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동시에 20세기는 희망의 세기이기도 했습니다. 20세기는 전인류가 비로소 진정한 하나의 세계로 통합된 세기였으며, 서양의 문명이 동양으로만 강제로 주입되던 100여년의 역사를 되돌리는 물꼬를 튼 세기이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전반기의 시작은 세계인류의 70% 이상이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미국, 벨기에,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스페인, 일본 등 10여 개 국가들의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상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을 통해 일본은 근대를 학습했고, 탈아입구(脫亞入邱)의 기치 아래 제국주의의 길로 빠르게 국가체제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20세기의 출발은 분명 유럽 대륙에 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행복한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은 인류가 인간의 이성(理性)을 통해 현실 세계에서 체현해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사회체제라고 생각했던 시스템을 실험대에 올린 최초의 혁명이었습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서구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대안으로서 받아 들여졌고, 자본주의 종말을 의심치 않았던 이들에게는 자본주의 대안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 러시아 10월 혁명이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의 몰락을 앞당겼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압제하의 민족에게 이런 희망은 불꽃이 되었고, 작은 불꽃은 들판을 태우고 결국 20세기 중반에 이르렀을 무렵, 제국주의자들도 현재와 같은 상태로는 식민지들을 지속적으로 운영해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냉전은 20세기 중반기로부터 20세기 말에 이르기 까지 전세계를 달구었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은 서로에게 겨눈 핵무기들을 통해 뜨거운 체제 경쟁을 벌여 나갔고, 관료화된 현실사회주의(스탈린주의)는 이전의 많은 다른 사회주의자들도 경고했듯이 민중의 뜨거운 혁명 열기를 배신한 채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냉전의 와중에서 이들 세계를 지배했던 양대 진영 소련과 미국은 세계 각국에서 그들의 직접적인 대결을 대리할 만한 존재들을 찾아 치열한 경쟁을 벌여나갔고, 그 와중에서 많은 민족과 사람들이 희생 당했습니다.
20세기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고, 1990년 동서독의 통일로부터 1991년 소련 연방의 해체에 이르는 시기에 끝났습니다. 그후는 사실상 새롭게 시작되는 21세기의 준비과정이었으며 21세기는 미국의 세계 패권 국가 등극이라는 형태를 갖추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은 미국이 전세계를 향해 '전쟁의 해'를 선포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그 첫 번째 전장은 아프가니스탄의 산중에서 시작되었고, 다시 필리핀의 밀림이 될지, 이란, 이라크의 사막이 될지를 결정할 일만 남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반도. 북한이 될지도 모릅니다. 최근 미국의 MGM영화사는 북한을 주적으로 하는 007영화 제20탄을 기획 중에 있고, 우리나라의 주연급 배우들을 북한군 특수부대 장교역에 캐스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그 역할을 맡겠다고 나서는 배우가 없다는 점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인류의 20세기 정신사가 타민족의 주권과 인권을 희생시키고 노예화 하는 것에 반대하여 세계 여러 민족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는 형태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21세기는 또다시 전쟁과 테러, 약소국가의 주권에 대한 강대국의 몰염치한 무력 과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부한 격언을 생각지 않더라도 우리가 과거 20세기로부터 얻은 교훈이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역사 앞에서 우리의 21세기가 지난 세기의 교훈을 새롭게 다지지 못한 까닭을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20세기의 교훈을 관념적으로만 체득했던 것은 아닌지, 20세기의 사회 복지와 민주주의의 실현을 단지 자본주의의 너그러운 자비와 혜택을 통해 얻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20세기 말엽 사회주의의 몰락을 자본주의 미국의 승리로 착각하도록 방임한 데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그동안 세계를 안정시켜 왔던 변증법적 긴장이 무너져 버린 뒤 세계 패권국가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한 미국의 힘 앞에서 21세기는 우울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평화는 아직도 요원한 일이며, 다시 제3의 전장이 한반도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많은 수구 보수 언론들은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며 다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21세기는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선택이 우리들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올 한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들의 손으로 결정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 차례의 선거들이 있으며 우리의 일상에서도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그 작은 선택들이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치개혁을 희망한다면, 지역주의의 사슬을 끊고 싶다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선택을 하면 됩니다. 일단 손놓고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변화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단지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합니다. 나와 나 아닌 다른 사람.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세상의 50%는 변하는 것이며, 우울한 21세기의 전망 또한 변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최인훈 선생의 저서『문학과 이데올로기』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2002년 처음 보내드리는 <유리병편지>를 닫겠습니다.
"참여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러므로 각자가 인간을 미래로, 열려진 지평으로 인식하느냐 닫혀진 지평 속에서 환상의 초월만이 가능한 존재로 보느냐는 데에 귀착된다. 얼핏 생각에 개체로서의 인간은 한정된 역사적 시간이라는, 갇혀진 지평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인간을 그렇게만 본다면 인간에서 '부정'의 계기를 간과하는 것이며, 인간은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출하려는 존재이며, 그렇지 않다면 물체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부단히 현실을 부정하여 나날이 새롭게 사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200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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