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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공연/음반

염쟁이 유氏

사회, 문화와 예술 전방위적으로 살펴보고 기획하여 청탁하고,잡지를 만들고, 때때로 글을 쓴다. 그것이 나의 직업이다.  잡지(雜誌)쟁이... 그게 나의 직업이고, 나는 그 직업을 천직으로 여긴다.  

초등학생 때 나는 스파이가 되고 싶었다. 스파이가 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잘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든 관심을 가졌고, 잡학다식하여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퀴즈왕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스파이를 꿈꾼 아이가 자라서 퀴즈왕이라니... ^^;;;

스파이도 퀴즈왕도 해본 적이 없지만 대신에 현실적으로 나의 천성과 부합되는 일이 서양에서는 매거진이라 하고, 동양에서는 잡지라 부르는 매체의 편집장이 되었다. 매거진이란 말보다 잡지란 말이 이 매체의 성격을 실천적으로, 내용적으로 잘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매거진이란 말이 '탄창'이란 뜻도 가지고 있는 만큼 그 자체로 공격적인 느낌이 나는 반면 잡지란 말은 수동적이고, 한 편으론 천격(賤格)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나의 미적인 감각에도 어울린다.

어쨌든 나는 문학으로 출발해서, 미술,  음악, 사진, 영화, 만화에 두루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이 중에서 음악을 제외하고, 다른 한편으론 음악을 포함해서 저장되는 매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장되지 않는 매체에 취약하다. 영화의 경우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보다는 DVD나 비디오테이프로 보는 것을 좀더 즐기는 편이다. 반복해서 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반복해서 들어야만 한다. 난 한 번도 천재적인 재능에 대해 부러워해본 적이 없으며, 그것을 높이 평가해본 적도 없다. 천재에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나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단 적절한 수명이 필요하고, 때를 잘 만나야 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죽기 전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다면 천재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때를 잘 만나서 다시 재확인되지 못한다면 천재가 남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사랑해주는 누군가 소수의 사람들이 없다면 그가 남긴 것이 어디에 남겨질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죽어버린 천재를 사랑하지만 살아있는 천재를 아끼지 않는 법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읽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이나 무용, 음악회 같이 일회성으로 끝나버리는 예술 장르에 대해서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하지만 한 번 보고도 오래도록 읽어낼 만한 천재적 자질이 없으므로 깊이 천착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어제 거의 몇 년만에 처음으로 연극을 봤다. 김민기의 <지하철1호선>을 몇 해 전에 보고 처음있는 일이다. 표가 생겼고, 표를 물릴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본 것이지만 결론은 매우 재미있었고, 나름대로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업인 염쟁이 일을 평생동안 해온 염쟁이 유씨가 자신의 마지막 전통 염습을 치르는 과정을 연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노드라마였다. '죽음'을 다루기 때문에 무거울 것이란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도입과 전개 과정이 경쾌한 연극이었다.  



내가 연극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와 지근거리에서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사람이 내 앞에서  '정색'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갑자기 다른 인격이 출현하는 사람이 두렵다. 그 사람과 친하면 친할 수록 정색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두렵다. 마치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친근함으로부터 버림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파이가 나의 천직이 아니란 걸 알았다. 만약 내가 일관성 있는 인간으로 남들에게 비춘다면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를 먹고 산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 당신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누군가 믿어주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보람이다.  

연극 <염쟁이 유씨>는 지난 2008년 연말부터 오는 3월까지 인켈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연극이다. 배우 유순웅 씨가 염쟁이 유씨를 연기하는데 배우의 마스크란 말 그대로 마스크란 생각이 들었다. 눈빛 하나만으로 그는 조폭(조폭 연기 할 때는 선글라스를 착용해서), 사기꾼 장례대행업자, 아들 역할까지 종횡무진 연기해낸다. 모노드라마인 탓에 장면 전환을 어찌할까 생각하며 보았다. 역에 맞는 적절한 분장이 필요할 테니까. 그런데 그런 처리 과정도 깔끔하다. 그리고 분장이 필요없을 만큼 배우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다른 캐릭터를 소화해낸다.  

요즘 막장드라마라고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해도 <아내의 유혹>이 인기라는데, 난 이 드라마를 보며 극중 주인공이 같은 얼굴로 나오는데 어떻게 상대가 그녀가 누구인지 몰라볼 수 있는가가 가장 큰 의문이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내가 '나'이도록 하는 요소는 매우 많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속 주인공이 갈망했던 것처럼 냄새일 수도 있고, 기척일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 성격이나 품성, 기질이니 다양한 말로 사람을 표현하지만 나를 '나'이도록 하는 것은 결국 인격(퍼스낼리티)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복잡하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인격이란 정체성(아이덴티티)과 달라서 타인이 기대하고, 바라보는 나란 사람의 페르소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 때 그 사람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그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사람이 내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정색한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정색이란 말은 '正色', 얼굴빛을 바로 잡다는 뜻이다. 엄정하게 자신의 얼굴을 내비춘단 말인데, 다시 말해 정색, 그것이 본색(本色)이다. 본색은 자신만이 안다.  

<염쟁이 유氏>는 마지막에 가서 정색을 하고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죽음을 치뤄내는 과정에서 유씨는 과장, 부장, 회장이 되려고 힘들게 고생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송장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 뿐이니까.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송장이 될지 그것이 잘 사는 일만큼이나 잘 사는 일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염습하는 과정은 일반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없는 과정이다. 누군가 가까운 지인이 죽었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너무 가까운 사람의 염습과정일수록 우리는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모습. 염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마치 잘 포개놓은 북어같이 메마른 피부, 얼어붙은 동태처럼 꾸덕꾸덕해진 몸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너무나 현실이었기에 비현실을 보는 것 같았고, 초현실적인 상황 같았다. 입관 절차가 끝나고 장지를 향해 발인한 뒤에야 비로소 나는 그 숨막히는 죽음의 현장이 현실이 되었다. 장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터진 눈물이 아닌 울음은 매장 절차가 모두 완료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를 대신했던 분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까지 눈에 생생하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2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不居, 是以不去.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며 천하의 사람들이 선함을 아는 것은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고, 어렵고 쉬운 것은 서로를 이루며, 장단(長短)은 서로 비교되기 때문에 드러나고, 고하(高下)는 서로 기울어지며, 음성(音聲)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前後)는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일부러 하지 않고도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침을 행한다. 천지자연은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노고를 사양하지 아니하며 만물을 자라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그에 머무르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떠나가지 않는다.

누구라도 죽음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는 없다. 그건 당사자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고, 죽임의 반대말이 살림이다. 죽임이 살림을 파괴하는 시대, 죽음이 삶을 겁박하는 시대에 사는 두려움에 비하면 정색하는 두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더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그러나 선과 악이 본래 한 몸에서 비롯되었고, 삶과 이별이 또한 하나이듯 <염쟁이 유씨>를 본 뒤 앞으로는 정색하는 두려움과도 자주 마주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