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편지

- 유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개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 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그랬다면 후회가 없었을까? 묻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만약 진정으로 후회가 없고자 했다면 사랑하기 전에 이미 떠났어야 할 일이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뒤엔 '사랑도 감동도' 없다.
오직 '나'만 그렇게 홀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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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