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1993년
책을 읽다보면 가끔 문학평론가 김현의 한탄스런 독백이 떠오르곤 한다. 세상엔 매일같이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책을 평론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평론가로서 자신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이냐는 것이 그의 한탄이었다. 물론 김현은 이 부분을 능숙하게 변명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대해서야 누군들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지난 1993년이고, 내가 구한 것은 2002년 4판째의 것이다. 거의 10년에 걸쳐 모두 4판을 인쇄했으니 결코 많은 부수가 팔린 책은 아니며, 어쩌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우연한 기회에 위에 올린 '달나라의 장난'님의 독후감을 읽고 대관절 어떤 책이길래 저런 서평이 가능한가 하는 궁금증에서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책을 만나게 해준 그 인연에 대해 몹시 감사하는 마음이다.
소설이란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잠시의 여가를 위한 노리개로 전락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사무실에서 점심 시간이 지난 뒤 입가심을 위해 껌을 씹는 동안 잠시 읽거나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소일 삼아 잠시 읽는 데 적합한 소설이 대량으로 쏟아지는 시대에 어찌보면 200쪽이 조금 넘는 이 소설집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는 1909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용산국민학교와 경성중학교를 나오고,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42년 요절한 사람이다. 식민지 시절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 작가의 작품을 펼쳐들고 읽는 소회도 만만치 않건 만 이 작가의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도저히 말로 퍼 옮길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반추(反芻)라는 말이 있다. 소나 염소 같은 짐승이 씹어 삼킨 먹이를 다시 입 속으로 끄집어 올려 씹는 행위에서 비롯된 이 말은 이 책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에 정말 부합하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고심을 싫어하는 게으름이 나의 모든 것 이었던 게지. 나보다도 휠씬 모자라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것을 갈고 닦는데 전념한 결과 당당히 시인이 된 자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야.호랑이가 되어 버린 지금에야 겨우 그것을 깨달었지 뭔가.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타는 듯한 회한을 느낀다네" - <산월기> 中에서
<산월기>, <명인전>, <제자>, <이능> 4편의 짤막한 단편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고전 속의 인물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그것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의 열기가 가슴 저 밑으로부터 끓어오르도록 한다. <산월기>와 <명인전>은 각기 다른 의미에서 서로 호응하게 되어 있는데, <산월기>의 경우엔 세상과 담쌓은 한 예술가가 결국 몰락해가는 모습을 때로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그리면서도 동양적인 고전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명인전>은 노장의 세계에 빠져든 예술가, 장인이라 불러야 할 한 인물의 모습을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묘파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를 다루고 있는 <제자>에 이르면 이 젊은 작가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서양의 고전주의와는 다른 동양의 고전주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가끔 왜 우리에게는 그리스 로마신화 같은 그런 세계가 없냐고 투덜대는 이들에게 늘 해주고 싶은 말은....그런 무식한 소리하지 말고....먼저 <논어>를 읽고, <사기>를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이능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보고 있지 않은 듯하면서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숙연한 두려움으로 떨었다. 지금도 자신의 과거가 옳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소무라고 하는 남자의 존재가,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고, 그 흔적이 지금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능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개 없는 자신은 소무를 말할 수 없이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능은 몹시 두려움에 떨었다." - <이능> 中에서
작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란 것이 무엇인지 이 네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와 각기 다른 주제를 통해 전달하는데 막힘이 없고, 읽는 동안 내내 숨이 턱턱 막혀오는 감동을 준다. 하마터면 묻혀버렸을 이 책을 근 10년이란 시간 동안 절판시키지 않고 꾸준하게 출판해준 <다섯수레>라는 출판사와 이 책이 소문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하게 팔리도록 해 어느덧 4판을 찍어 내 손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이 책을 읽어준 안목있는 독자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꾸준히 읽을 수는 있다. 그러므로 계속 좋은 책을 찾아 읽을 수밖에.....
책을 읽다보면 가끔 문학평론가 김현의 한탄스런 독백이 떠오르곤 한다. 세상엔 매일같이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책을 평론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평론가로서 자신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이냐는 것이 그의 한탄이었다. 물론 김현은 이 부분을 능숙하게 변명하고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대해서야 누군들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지난 1993년이고, 내가 구한 것은 2002년 4판째의 것이다. 거의 10년에 걸쳐 모두 4판을 인쇄했으니 결코 많은 부수가 팔린 책은 아니며, 어쩌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책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우연한 기회에 위에 올린 '달나라의 장난'님의 독후감을 읽고 대관절 어떤 책이길래 저런 서평이 가능한가 하는 궁금증에서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책을 만나게 해준 그 인연에 대해 몹시 감사하는 마음이다.
소설이란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잠시의 여가를 위한 노리개로 전락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사무실에서 점심 시간이 지난 뒤 입가심을 위해 껌을 씹는 동안 잠시 읽거나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소일 삼아 잠시 읽는 데 적합한 소설이 대량으로 쏟아지는 시대에 어찌보면 200쪽이 조금 넘는 이 소설집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는 1909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용산국민학교와 경성중학교를 나오고,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42년 요절한 사람이다. 식민지 시절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 작가의 작품을 펼쳐들고 읽는 소회도 만만치 않건 만 이 작가의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도저히 말로 퍼 옮길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반추(反芻)라는 말이 있다. 소나 염소 같은 짐승이 씹어 삼킨 먹이를 다시 입 속으로 끄집어 올려 씹는 행위에서 비롯된 이 말은 이 책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에 정말 부합하는 말이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고심을 싫어하는 게으름이 나의 모든 것 이었던 게지. 나보다도 휠씬 모자라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그것을 갈고 닦는데 전념한 결과 당당히 시인이 된 자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야.호랑이가 되어 버린 지금에야 겨우 그것을 깨달었지 뭔가.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타는 듯한 회한을 느낀다네" - <산월기> 中에서
<산월기>, <명인전>, <제자>, <이능> 4편의 짤막한 단편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고전 속의 인물들을 다시 만나게 한다. 그것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의 열기가 가슴 저 밑으로부터 끓어오르도록 한다. <산월기>와 <명인전>은 각기 다른 의미에서 서로 호응하게 되어 있는데, <산월기>의 경우엔 세상과 담쌓은 한 예술가가 결국 몰락해가는 모습을 때로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그리면서도 동양적인 고전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명인전>은 노장의 세계에 빠져든 예술가, 장인이라 불러야 할 한 인물의 모습을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묘파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를 다루고 있는 <제자>에 이르면 이 젊은 작가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서양의 고전주의와는 다른 동양의 고전주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가끔 왜 우리에게는 그리스 로마신화 같은 그런 세계가 없냐고 투덜대는 이들에게 늘 해주고 싶은 말은....그런 무식한 소리하지 말고....먼저 <논어>를 읽고, <사기>를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이능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보고 있지 않은 듯하면서 역시 하늘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숙연한 두려움으로 떨었다. 지금도 자신의 과거가 옳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소무라고 하는 남자의 존재가,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고, 그 흔적이 지금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래도 이능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개 없는 자신은 소무를 말할 수 없이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능은 몹시 두려움에 떨었다." - <이능> 中에서
작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란 것이 무엇인지 이 네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와 각기 다른 주제를 통해 전달하는데 막힘이 없고, 읽는 동안 내내 숨이 턱턱 막혀오는 감동을 준다. 하마터면 묻혀버렸을 이 책을 근 10년이란 시간 동안 절판시키지 않고 꾸준하게 출판해준 <다섯수레>라는 출판사와 이 책이 소문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꾸준하게 팔리도록 해 어느덧 4판을 찍어 내 손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이 책을 읽어준 안목있는 독자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꾸준히 읽을 수는 있다. 그러므로 계속 좋은 책을 찾아 읽을 수밖에.....
'REVIEW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근대 작가 12인의 초상 - 이상진 | 옛오늘(2004) (0) | 2010.12.23 |
---|---|
노튼영문학개관 - M.H. 에이브럼즈 지음 | 김재환 옮김 | 까치(1999) (0) | 2010.12.08 |
1916년 부활절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음, 황동규 옮김 / 솔출판사(1995) (0) | 2010.11.30 |
이시카와 타쿠보쿠 시선 - 민음세계시인선 55 (3) | 2010.11.06 |
조지 오웰- 동물농장 (0) | 2010.10.27 |
이현배 - 흙으로 빚는 자유:옹기장이 이현배 이야기/ 이현배/ 사계절출판사(2000년) (0) | 2010.10.19 |
조태일 - 국토 (0) | 2010.10.19 |
김수영 -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03 (1) | 2010.09.16 |
조세희 - 침묵의 뿌리 / 열화당 (0) | 2010.09.15 |
파블로 네루다 -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0 (0) | 2010.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