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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문학

파블로 네루다 -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0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고혜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0년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파블로 네루다. 시인을 추억하는 방법은 많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그 시인의 시를 마음에 품는 것이다. 내년(2004년)이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언제 태어났건, 그가 언제 죽었건 간에 그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이었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의 시를 마음에 담고 있는 한 우리들 역시 그와 함께 영원한 청춘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아버지는 그가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네루다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고 체코 출신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의 이름을 본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의 이름을 본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은 것은 이 무렵 벌써 그 자신이 계급적 동질성이란 의식을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사망한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 테무코에 자리잡았고, 그는 조국의 개척지라는 토양에서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영감을 얻었다.


'우리 어머니를 화냥년, 개년으로 불러가면서. / 혼자서 마셨겠지. 오후의 차를. 고독하게. / 영원히 주인 잃은 내 낡은 구두를 바라보면서/ 내가 지금 거기서 열대 기후, 중국 쿨리들의 가난, / 그렇게도 나를 힘들게 했던 끔찍한 열병, / 아직도 증오하는 지겨운 영국인들에 대해 불평이나 하며 / 그곳에 있는 양, 큰 소리로 나를 저주하지 않고는, / 내 병, 내 밤의 꿈, 내 음식을 생각해낼 수 없을 거다.'


우리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 경험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공직 생활을 훌륭하게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 했고, 그의 이런 소망은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으면서 성취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니며 외교관으로 살았다. 비록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그는 칠레 본국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 그런 탓에 이 무렵을 회고하는 그의 글들과 시에서는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시집 "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들을 엮은 것이다.


'주변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 / 노동자, 인력거를 끄는 쿨리, 농장의 쿨리, / 몸이 망가진 채 돌아다니는 이들, / 거리의 개들, / 무시받고 사는 가난한 이들. / 여기 상처받고, / 존재가 아닌, 그저 발에 불과할 뿐인, / 인간이 아닌, 그저 짐꾼에 불과한, / 걷고, 걷고, 땀 흘리고, 땀 흘리고, / 피땀을 흘리고, 영혼도 없어진 다음, / 이들은 이렇게 있다. / 외롭게 / 누워서 / 이제야 발뻗은 신세가 되었다. 이들 무쇠다리들이. / 배고픈 이들은 기쁨에 취할 / 암울한 권리를 산 것이다.' 「동양의 아편」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네루다를 추억하는 많은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칠레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인민연합의 아옌데와 후보 단일화를 통해 칠레의 민주화를 앞당겼고, 스페인 내전기에 희생당한 로르카의 친우였다. 물론 이런 사실들은 파블로 네루다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다. 그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에 일어나는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될지 모르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죽었고, 노 시인은 낙담하여 건강을 잃고 세상을 등졌다.

우리는 먼저 네루다를 시인으로 기억해야 한다. 네루다의 삶이 바로 시인의 삶이었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있는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우리가 네루다를 기억하는 방식은 그의 시를 읽는 것일 게다. 그 중에서도 청춘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건져올린 이 시집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도 참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