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금지 - 구와바라 시세이 / 눈빛(1990)
지난 2005년은 여러모로 흥미 있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한 해였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이자, 1905년의 을사조약 100년인 해이다(그 외에도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Don Quixote)』가 세상에 나온 지 4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안데르센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거기에 우리가 일본과 한일청구권협정(1965년)을 맺은 지도 40주년이 된다. 우리에게 해방과 지배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복원이라는 의미를 담는 사건들이 같은 끝자리수를 갖는 해에 모두 일어났다는 것은 시간차를 두고 생각해볼 여러 가지 것들을 던져준다.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 1936년생이니 어느덧 칠순이 넘은 사진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사진들은 낯설지 않은 풍경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런 만큼 그의 작품들 역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눈빛에서 출판된 『촬영금지 : 한국 - 격동의 4반세기』에 수록된 사진들은 1964년부터 촬영된 우리시대의 초상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째 장의 제목은 <1. 반일(反日)과 친일(親日)의 틈새에서>이다.
1965년, 한국은 하나의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불안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조국의 독립으로부터 20년,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12년째의 일이다. 수도 서울과 지방의 대학에서 한일 국교 수복의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학생 데모로 혼란했고, 급기야는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그것은 1950년 이승만 정권을 와해시킨 4.19혁명에 이은 민중의 봉기라고 할 수 있는 격동의 시기였다. 한일 국교 수복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도 과거 36년간에 걸친 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상기시키고, 민중의 이념과 일본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일합병은, 한국인의 토지와 언어, 심지어는 이름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빼앗았다. 이 가혹한 역사를 경험해야 했던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일본과의 국교 수복은 너무나 빨랐고, 그만큼 충격도 컸다. <본문 27쪽>
1965년 4월 19일 4.19혁명 5주년 기념일엔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로 얼굴을 적시며 도로 위를 걷는다. 그 옆으로 "헌병"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군용 지프와 트럭에 철모를 쓴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이들은 침묵 속에 거리를 걸으며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다음 페이지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진 한 장이 펼친 페이지 구성으로 들어 있다. 비에 흠뻑 젖은 대학생들이 모두 비감한 표정으로 손에는 책을 쥐고, 우산을 들었으나 펼쳐 쓰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걸어온다. 누구하나 웃지 않는다. 다음 장에는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기동대에 쫒겨 달아나던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시궁창 속에 빠져 달아나고 있는 모습이다. 연이어 민족의 굴욕을 상징하듯 시궁창물로 더럽혀진 태극기를 펼쳐 보이는 이들이 서 있다. 굴욕외교에 맞선 시위대와 시궁창물을 뒤집어쓴 태극기.
▶ 가랑비를 맞으며 침묵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서울, 1965, Kuwabara Shisei.
그것이 1965년 한 일본인 사진작가가 대신 바라본 대한민국의 얼굴이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1936년 일본 시마네에서 출생하여 1960년 동경종합사진전문학교를 졸업한다. 그가 일본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1962년 일본사진비평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신인상을 수상하면서부터였다. 이 해 그는 ‘미나마따병’을 주제로 개인사진전을 열었다. 그는 일본 구마모토와 가고시마 두 지역에서 발생한 괴질인 미나마타병을 오랫동안 취재해 왔다. 1956년 첫 환장의 발병 사례가 보고된 이래 신일본질수수유공장의 폐수에 다량 함유된 수은중독이 원인으로 판명되기 까지 일본 기업은 이를 부인해 왔다. 원인모를 괴질로 지역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원인 규명은커녕 진상조사조차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 평화롭던 어촌은 죽음의 마을로 변해간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이 과정을 촬영한 사진집 『미나마타병 1960-70에 관해서』로 1971년 일본사진가협회상을 수상한다.
▶ 미나마타, Kuwabara Shisei.
그의 첫 해외여행지는 한국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저는 1964년 7월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저에겐 최초의 외국방문이었죠. 방문 목적은 일본의 그래픽저널 월간지인 「타이요(太陽)」의 '분단 한국'이란 특집 기획기사를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한 ․ 일간에 외교관계가 열리지 않았던 때로, 일본인들이 방문하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저는 특파원자격으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구와바라 시세이는 50여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며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는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우리의 모습을 일본인인 ‘구와바라 시세이’가 담아낸 것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어두운 모습일 수 있고, 부끄러운 역사일 수 있는 순간들을 많이 촬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 『촬영금지』는 특히 그런 모습들이 많다. 그가 보도사진을 촬영하던 당시는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1989년 9월 서울에서 열렸던 그의 사진전에서도 실제로 이런 항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왜 이처럼 가난한 한국의 모습을 찍어 전시하는가, 그것도 일본인이..."
◀ 청계천, 1965, Kuwabara Shisei.
이에 대해 구와바라 시세이는 "사진, 특히 보도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찍히는 쪽에 상처를 입히는 냉혹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찍히는 사람이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얼굴을 돌려버리는 사람.... 나는 어쩌면 많은 한국인에게 상처를 입혀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이 행위는 아니었다. 다만 사라져 없어져 가는 역사의 현장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과연 우리는 이 노작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앞의 인터뷰에서 88년까지 한국 사진을 촬영한 뒤 이후에는 한국에서 작업을 별로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예, 한국에도 이젠 젊고 유능한 사진가들이 많이 등장해서 외국인인 제가 기록할 필요가 없어진 것도 이유입니다. 그리고 좀 모순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에는 별 매력을 못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의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한국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제겐 큰 행운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사진들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가난한 약소국, 과거 그가 속해있는 나라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 대한 비판이나 편견이 아닌 말없는 따뜻함과 애정이 배어나온다. 그 역시 보도사진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Feature Photo(기획사진)’이라고 한다는데, 기사에 보도탐사라는 분야가 있듯 ‘기획사진’이라는 것은 사진에 스토리가 담긴 것을 의미한다. 즉, 현장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사건 하나, 인물 하나를 추적하며 연속적으로 담아내는 사진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순간의 긴박함이 배어나오는 사진들에서조차 뭔가 정적인 느낌들이 묻어난다. 그는 『촬영금지』의 넷째장인 <4. 한국인의 얼굴과 발자취>에서 한국인들, 한국의 민중들에 대해 더할 수 없는 애정을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취재를 통해서 한국이 걸어온 역사의 발자취와 민중들의 꾸밈없는 삶을 기록하고자 했다. 최근까지 한국이 이루어온 고도의 경제성장이나 근대화를 찬양하거나 반대로 비판하는 것은 용이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배후의 이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의 희생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쉽지 않다. 나는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된 이들의 오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본문 89쪽>
▶ 청계천, 1965, Kuwabara Shisei.
구와바라 시세이와 한국의 인연이 따뜻했던 것만은 아니다. 두 번째 한국 체제 기간 중이던 1965년 12월 그는 강제출국조치 당해 한국을 떠나야 했고, 이후 3년간 그의 출입금지조치는 풀리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관광 비자를 얻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으나 그 이후엔 다시 한국행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다. 이런 그를 돕기 위해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재일교포 친구 이강 씨가 나섰다. 그는 한국에 취재차 들를 때마다 여러 곳에 구와바라 시세이의 선처를 호소했고, 덕분에 그의 한국행은 다시 가능해졌다. 그러나 1971년 10월 15일 한국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강은 검은 지프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그에게 북한을 왕래하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간첩행위를 했다는 죄명이 쓰인 것이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그가 과연 북한에 갔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김대중이 입후보한 대통령 선거를 취재할 때, 김대중이 일본에 들렀을 때 그와 함께 회식했던 인연으로 연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1975년 2월 1일 구와바라 시세이의 친구 한 명이 또 한국에서 행방불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고 반년,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되기 3개월 전인 1975년 1월 1일 재일교포 김달남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에게 씐 혐의는 북한에 밀항, 비밀공작원이 되어 한국에서 파괴활동을 한 북한의 비밀공작원이란 것이었다. 그에겐 사형이 구형되었고, 그의 항소는 기각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오는 순간, 재일교포 김달남, 일본명 타츠오의 목숨을 구명해준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1978년 크리스마스 아침, 김달남 씨는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구와바라 시세이가 직접 경험한 우리의 근현대사의 단면들이기도 하다.
▶ 열차편으로 포항에서 부산군항으로이동하는 청룡여단 병사들, 1965, Kuwabara Shisei.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15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한국의 정치상황은 유신독재의 장거리 터널을 건너고 있었다. 그는 1980년 광주를 촬영하지 못한데 대한 뼈아픈 소감을, 광주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동안 그는 계엄군의 보안 통제 속에 광주에 진입하지 못한 그 소감을 밝힌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남녘땅 빛고을에서 빚어진 피의 참사를 그 당시 서울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성스러운 선혈이 뿌려진 광주로부터 직선거리로 268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 있으면서도 광주의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갈 것을 갈구하면서도 갈 수 없었던 보도사진가에게는 단 한 장의 사진조차 없다. 역사의 현장에 참가할 수 없었고, 그것을 기록할 수 없었던 분함은 패배감에서 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의 좌절이었다.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한국의 젊은이들, 특히 다큐멘터리에 뜻을 둔 제군들에게 나의 과거의 체험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보도 사진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상을 기록하는 일에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한다. 현장을 밟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말할 자격이 없는 한낱 패배자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의 사회는 열려있지 않은가. 온돌방에 언제까지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자! 밖으로 나가자." 라고 말한다.
사진평론가 이영준은 구와바라 시세이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과거에 담긴 현재적 의미'라고 말한다.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은 지 40년 만에 공개된 정부의 협정문서 일부가 그때의 진실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TV드라마를 통해 그때의 독재자는 갑자기 근대화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당시 대일협정의 밀사는 제2의 이완용을 각오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애국열사가 되는 현실, 대학생들이 가장 복제하고 싶어 하는 정치지도자 1위, 그 자식이 가장 큰 야당의 당대표로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준의 말대로 "그의 사진에 나타난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고 건물들이 우중충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어두웠던 60년대를 찍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대사의 모순이 여전히 진행되는 상태, 그 무거운 현실이 여전히 촬영금지의 그늘 속에서 우리들을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의 사진은 과거에 종료된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런 더럽고, 치사한 현재의 우리들에게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증을 막아주는 의미로 현존한다.
* 노대가(老大家) 구와바라 시세이. 이제는 그 자신도 세월의 흐름을 빗겨갈 수 없어 앞으로는 긴박한 사건의 현장보다는 문화적인 내용의 사진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다. 이 책 『촬영금지』는 한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구하기 매우 힘든 책이었다. 혹시 그 시대와 사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이 책을 꼭 구해서 읽기 바란다. 그리고 만약 재고가 모두 떨어진다면 제발 이 소중한 사진집을 절판시키지 말고, 좀더 양질의 인쇄와 도판으로 개정판을 출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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