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그림 여행』 - 스테파노 추피 지음 | 서현주 옮김 | 예경
세계적으로 이름난 출판사란 것이 있다. 프랑스의 갈리마르, 일본의 이와나미 같이 종합출판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가 있는가 하면 예술관련 서적을 전문적으로 출판하여 명성을 얻는 전문출판사도 존재한다. 프랑스의 라루스, 영국의 파이돈, 독일의 타쉔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명성을 얻은 출판사들이다. 이것을 그대로 한국에 대입해보면 우리의 출판 환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를 대변할 만한 여러 키워드들이 있었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가 뭐래도 "한류(韓流)"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란 말은 그 출처가 어디인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수식하는 말이었다(도대체 이렇게 시끄러운 나라를...그래서 최근엔 '다이나믹 코리아'를 국가이미지로 추구하는 건가) . 영국하면 신사의 나라, 프랑스하면 예술의 나라, 독일하면 철학의 나라, 오스트리아하면 왈츠와 모차르트가 연상되듯 국가에는 국가이미지란 것이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노벨문학상의 향배를 가늠하며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만, 문화부 기자들이라고 그 속사정을 몰라서 한국 작가들의 수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 게다. 무엇이 문제인고 하면 제 집안에 황금송아지가 있어도 이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 문제이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된 것들이 태부족인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70년대부터 정부차원의 국가 이미지 홍보 사업을 벌여왔다. 명칭은 해외공보관, 해외홍보원, 해외문화원 등으로 변경되고, 분화되어 왔지만 그 목적 자체는 같은 것들이다. 대한민국을 세계에 홍보하여 괜찮은 국가의 이미지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도, 애써 격상시킬 필요도 없이 냉정하게(이 말은 또 얼마나 냉정하지 못한가?) 바라보려는 노력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번번이 민족감정에 휩쓸려 세계 속에서 제대로 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시아의 작은 경제 강국, 민주화 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나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이 폴란드,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란 사실을 안다. 칸 영화제가 어느 나라에서 개최되는지도 알고,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의 연합 왕국이란 사실도 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도 국가이미지 홍보를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명사들을 선정해 국가이미지 홍보대사로 삼거나 각종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미지를 개선하고, 홍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Frankfurt Buch Messe)이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TIBE, 볼로냐, 미국과 함께 세계 4대 도서전시회로 손꼽히는 행사로 오는 10월에 개최되는 이 도서전에서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선정되었다. 우리의 국가이미지, 출판수준과 문화를 알리는데 더할 나위없는 호재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이 행사 준비에 여러가지 차질을 빚고 있어 주위의 염려를 사고 있다. 우선 이강숙 조직위원장이 지난 8월 사퇴한 이후 11월까지 수개월여를 공석으로 두었고(다행히 김우창 선생이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그나마 행사 준비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55개 사업을 48개 사업으로 축소, 예산도 265억원에서 237억원으로 축소) 애써 마련된 좋은 기회를 놓칠 위기에 처했다.
예경 출판사가 미술 출판이라는 외길을 28년간 걸어왔다는 것은 성과는 나중에 좀더 고민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축하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예경은 외국의 출판물을 번역 출간하는데만 애쓰고 있는 그런 출판사가 아니란 점에서 역시 격려받을 만하다. 예전에 서평을 올린 바 있는 박용숙 선생의 "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가 있고, 강우방의 "미의 순례", 김영나의 "20세기 한국 미술", KOREAN ART BOOK 시리즈로 "금동불"부터 "탑파"에 이르는 우리 미술의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미술 분야의 책을 내는 것은 출판의 다른 분야에서도 매한가지 고충이긴 하지만 특별히 공은 더 많이 들어가고 상대적으로 실속은 적은 편이다. 도판 하나, 사진 한 컷 이용하려 해도 저작권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야 하고, 이미지를 많이 다루는 책의 특성상 일반 인쇄용지말고, 고급지를 사용해야 하며, 책의 판형도 고려해야 하고, 컬러인쇄다 보니 인쇄 감리에도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미술 분야에 대한 독자층이 넓은 것도 아니다 보니 책의 가격 산출에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의 그림여행"의 정가 36,000원인데, "미술출판 28년의 한 길! 예경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특별가로 드립니다"란 명목을 달아 19,800원의 임시특별가로 판매하고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이야 출판사 관계자가 아니니 알 수 없다. 문제는 36,000원이든, 19,800원이든 이 책이 그 값을 하는 책이라면 좋은 평을 들을 만한 것이고, 아무리 값이 싸도라도 제 값을 못하면 좋은 이야기를 듣기 힘들다. 그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 책은 좋을 평을 들을 만하다는 거다. 문제는 이 책의 용도인데, 만약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읽고 싶다면 그와 관련한 좋은 책들은 이미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 방면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거나, "생각의나무"에서 출간한 "라루스 서양미술사" 시리즈를 읽는 것도 좋다.
문제는 우리의 독서습관에 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만원에 가까운 책값을 지불했으니 이 책을 통해 본전을 빼야겠다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책날개에 적힌 글에 따르면 "천년의 그림여행"에 수록된 그림들을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이론서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어찌보면 더더욱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권의 책으로 서양회화 1,000년의 역사를 이해하겠다는 욕심은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다. 제 아무리 속도가 최상의 덕목으로 칭송받는 시대라 할지라도, "하룻밤에 읽는, 한 권으로 끝장내는" 류의 선정저인 제목 뒤에 따라오는 건 중국사, 미술사, 과학사 어쩌구하는 묵직하기 이를 데 없는 분야들이기 십상이다. 그런 책을 읽고, 그 분야에 대해 '다 알았소' 할 욕심이라면 광고와 상관없이 그것이 도둑놈 심보다. "천년의 그림여행"은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명확한 한계를 이미 노정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한계 속에서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으며, 한계를 보충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우선 이 책은 1,000년이란 시간적 제약을 두고 서양 회화를 살펴본다. 서양미술의 역사가 어찌 1,000년밖에 안되겠는가? 거기에 서양미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조각과 건축, 공예 등을 제외한 회화 분야에만 치중하겠다고 말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서양회화의 역사다. 시간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통사(通史)의 구조를 택하지만, 그 안에 140개의 개별 주제와 화가들을 나눠 담고, 다시 이를 본문페이지 상단에 지역별로 다른 색상을 인쇄해 구분해볼 수 있게 한다. 지역별 구분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저지대국가(벨기에, 네덜란드 등),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영미, 국제적인 흐름(사조)'으로 세분화하고 있다. 거기에 본문을 보조해주는 부록으로 "위도와 경도"라 해서 화가들을 지역과 시대로 구분해 입체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중요한 회화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지를 구성해 좀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본문들은 대개 펼친 페이지 형태로 구성해서 한 명의 화가를 소개함에 있어 그 작가의 시대적 위치(사회적 영향이나 예술사적 위치)와 평가, 간략한 작품세계를 알리고, 대개 메인 컷 한 두 개와 서브 컷 서너 개를 삽입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고야와 같이 대가에 속하는 작가들에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예를 들어 본문 51쪽에서 소개하고 있는 "슈테판 로흐너(독일)"에 해당하는 색은 중부유럽과 스칸디나비아를 뜻하는 노란색 마크가 페이지수를 알리는 숫자 상단에 있고, 그의 작품 3컷과 작자 미상의 그림 1컷이 소개된다. 거기에 로흐너 작품의 사인처럼 사용되는 특징인 선명한 파란색이 두드러진 천사의 색채에 숨겨진 비밀을 알려준다(슈테판 로흐너는 선명한 파란색을 내기 위해 당시로선 순금보다 훨씬 비싼 청금석을 염료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보라색이 고귀한 귀족이 입는 의복 천에 주로 사용된 까닭 역시 보라색 염료의 당시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던 것이 한 이유라는 사실을 알면 천사가 순금보다 비싼 물감을 사용하는 건 당연할지도). 물론 이 정도로 이 작가에 대해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분야에 대해 전문가가 되길 소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로흐너에 대해 이 정도 상식과 교양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간 서양미술사(대개의 미술사 책에는 충분한 도판이 수록되지 않는 편이다)를 통해 이름만 접했거나 처음 이름을 접하게 된 화가들이 대다수이다. 전세계적으로 서양미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기는 인상주의 시대로, 이 시기를 전후한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보의 양 자체가 빈약하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한 서양회화사 입문서 혹은 교양서로서 적당한 난이도와 풍부한 도판을 지닌 책으로 별 다섯을 충분히 줄 만하다. 물론 전체 400쪽에 근접하는 분량의 책이다보니 오탈자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참고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오탈자를 찾아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으니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에 대해선 논할 자격이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부록이나 찾아보기 등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으나 이 책의 목차가 좀더 성의있게 만들어졌다면 하는 것이다. 이 정도 정성을 들여 만든 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목차가 달랑 4개의 구분 '여행에 앞서, 천년의 그림여행, 화가연표, 찾아보기'으로는 천년의 여행을 즐겁게 시작하는 초입치곤 너무 빈약하다.
끝으로 예경출판사의 28년 걸어온 길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좋은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획을 많이 하는 훌륭한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이 책을 잘 읽는 뾰족한 묘수가 있을리 없겠지만 가격대비 효용성이란 측면만 놓고 보자면 일단 한 권 구입해놓고 침대 머리맡에 놓고 잠들기 전 차근차근 그림 중심으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괜찮은 서양미술사랑 같이 펼쳐놓고 "천년의 그림여행"이랑 비교해가며 읽는 것도 좋은 여행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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