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 : 치명적 여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 이명옥 | 시공아트(시공사) | 2008
인사동 미술갤러리 사비나의 관장 이명옥의 책 "팜므 파탈"은 이중적 재미를 제공한다. 하나는 요녀(妖女)의 이미지로서 팜므 파탈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주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사진술의 출현 이후 일정 부분 그 위치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서구 신사들의 점잖은 포르노물(?)들을 대거 눈요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간의 누드가 예술이 된다는 점에, 여기에 도덕적 금기를 들이미는 것은 창작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약간의 의문을 들이대고 싶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느꼈나?"하고 말이다. 빛바른 양지 쪽으로 인간의 누드를 끌어낸 것은 과연 얼마만의 일이며, 우리들 자신은 벌거벗은 여인의 몸이 예술이란 사실을 언제부터 스스로 인지하고 이해하게 된 것일까 하는 의뭉스러운 의문을 갖는다. 스스로 그런 생각에 도달한 것일까? 아니면 주변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걸까?
누드를 예술로 인지한 것이 스스로의 힘이냐? 아니면 깨우침(교육받은)의 힘이냐?를 되묻는 것은 당신에게 정직하냐고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누드는 늘 정직의 문제를 묻기 때문이다. 마네의 1863년작인 '올랭피아'에 얽힌 이야기는 미술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제법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의 그림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림 속 모델의 나부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림 속의 모델이 신화 속의 여신이 아니라 현실의 매춘부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즉, 당대의 문화비평가들에겐 누드 자체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 속 모델에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성녀 내지는 여신의 이미지를 덧씌워야만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즉, 아름다움은 발가벗은 여인의 몸 자체가 아니라 환상이었던 것이다. "기시다 슈"의 책 <성은 환상이다>를 보면 "처녀성"은 문명,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동양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 "처녀성"은 그다지 대접받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불길한 것으로 폄하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성을 재산으로 분류하는 문화가 강할 수록 여성의 처녀성은 강조되고, 처녀성의 파기는 재산상 손실을 입힌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본주의가 강화되면서 여성의 성에 부과된 환금성(換金性)은 결혼을 통해 보다 비싼 값으로 팔리게 되었고, 자유로운 연애와 섹스는 통제 받아야 하는 것이 되었고, 그에 따라 결혼은 더욱 신성한 것이 되었다.
서양미술에서 '요부 그리기'가 하나의 유행이 된 것은 많은 미술사가들이 인정하고 지적한 것처럼 19세기적 현상이었다. 지은이 이명옥은 이런 "요부 그리기 - 팜므 파탈"을 "잔혹, 신비, 음탕, 매혹"의 네 가지 구분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 네 가지 구분을 통해 19세기 세기말을 살아갔던 예술가들이 느꼈던 팜므 파탈의 치명적인 유혹을 나열하고 있다. 모두 29명의 여성 이미지들을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 책은 여러가지 면에서 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하다. 내가 이 책에서 넘친다고 느끼는 점은 그간 우리가 말로만 들었거나 혹은 익숙하지 못했던 지난 세기 서양에서의 팜므 파탈들의 이름과 그림, 그들이 느꼈을 법한 감흥들이다. 반면에 이 책에서 부족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팜므 파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통사적인 언급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등장 이래 재발견되거나 복권된 여성성의 다양한 갈래들 중 마녀와 팜므 파탈에 대한 해석은 시종일관 흡사한 면모들을 가지고 있는데 작가는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보다는 여러 팜므 파탈들을 소개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서구 회화에서 다루고 있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들이 아직 우리에겐 익숙치 않기 때문이란 사실을 먼저 인정해주어야 한다.
팜므 파탈을 보는 각도는 여러가지이다. 현실사회사적으로 보았을 때 팜므 파탈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 이래 사회의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된 부르주아지들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로 확보한 자본 축적의 과정을 통해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맞이했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햇살이 밝으면 그늘은 보다 짙어지는 법이다. 빅토리아 시대 겉으로는 귀족을 능가하는 예의범절과 세련미를 강조하였으나 그 이면에서는 무수한 불륜이 일어나고, 간통 사건 역시 급증했다. 참호전 양상을 띤 전선에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폭발할 것 같은 절망을 잠재울 목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거의 모든 전선에는 군위안부 시설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은 일순 절망으로 바뀌었고, 그네들이 확고하게 믿었던 유럽 문명의 진보는 더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팜므 파탈 그리기는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즉, 유럽 자본주의 문명이 화농이 짙게 곪아 피부를 뚫고 올라온 고름자국이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관점은 여성들이 더이상 가정에 갇힌 한 떨기 꽃의 구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엔 산업화가 초래한 측면이 있고, 유럽의 한 세대가 전멸하는 전쟁은 이런 여성의 사회진출을 더욱 촉진시켰다.
오랫동안 서양미술사 속의 여성상 혹은 여성을 모델로 한 예술작품들은 마치 일본 대중문화의 아슬아슬한 금기인 '헤어누드' 금지 조항을 회피하도록 강제되어 왔다. 예술가들은 그런 사회적 금기 속에서 에로티시즘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화적 이미지, 성녀 등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편법을 써 왔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 .미국)의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란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성의 몸은 오랫동안 여성과 남성의, 여성과 사회적 편견의,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유와 사회적 금기의, 우리 사회의 진보성과 보수성의 전장이 되어 왔다. 성서에 기록된 유디트는 유대 민족의 영웅이었고, 오랫동안 그렇게 묘사되어 왔다. 우리들에게 논개가 있다면 그네들에겐 유디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유디트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손에 이끌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는 여성 이미지로 변화되었던 것이 19세기의 일이었다. 어째서 19세기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이명옥은 목청 높여 팜므 파탈의 이미지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대신 오랫동안 남성 예술가들 혹은 그들과 튼튼하게 공조했던 남성중심사회의 관객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이들 팜므 파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사회적 맥락에서 왜 이런 작품들이 그려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팜므 파탈의 목소리들을 귀기울여 듣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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