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없는 거리에 인간의 얼굴을 돌려주는 그래피티 테러리스트 - 뱅크시(Banksy)
뱅크시를 가리키는 말은 제법 많다. 내가 알기로 1974년 생이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서(은둔형이다) 일명 '얼굴 없는 아티스트'라고도 부른다. 그(녀)가 주로 작업하는 공간은 아웃도어다. 다시 말해 '낙서화가(Graffiti Artist)'란 것이다. 그러나 뱅크시의 의미나 명성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사건은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근엄한 예술공간인 '대영박물관, 런던 테이트 미술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뉴욕 현대예술박물관' 등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도둑전시'했던 해프닝들 덕분이었다.
대개의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모사한 것처럼 굵직한 기둥이 도열하여 세워진 권위가 물씬 풍기는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감상자들은 작품을 감상하기 전부터 건물이 주는 위세에 주눅이 든다. 관람객들은 언론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시, 세계적 걸작이란 권위 앞에서 위축된다. 마치 성소를 순례하는 신도들처럼 줄을 서서 작품의 발바닥에 키스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앞사람의 뒤꽁무니를 따라간다. 큐레이터나 미술비평가들이 써놓은 작품 해설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면서 나도 모르게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과 해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예술의 권위에 침을 뱉어라!
뱅크시는 이와 같은 지금까지의 미술관람 관행에 돌을 던진다. 그를 가리켜 예술가인 동시에 문화파괴자(Vandals) 혹은 그래피티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뱅크시가 세계 유명 미술관에 관람객으로 위장해 몰래 숨어들어 자신의 작품을 슬쩍 걸어두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매우 파격적이고,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한 편으로 그 방식 자체는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퍼포먼스나 해프닝(happening)과 개념적으로 보자면 크게 다른 형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해프닝이란 연극적인 퍼포먼스와 매우 유사하고, 환경미술과 마찬가지로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해 왔던 영속성과 장인 정신과 같은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하는 것으로 과거에는 응당 예술작품은 미술관이나 화랑에만 전시되는 것이라 여겨져 왔던 화랑, 미술관처럼 한정된 장소를 벗어나 외부의 공간에서 제한 없이 연극, 음악, 그리고 시각 예술을 결합시킨 미술 형태 중 하나로 퍼포먼스와 별다른 구분없이(해프닝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와는 구별된다) 사용되기도 한다.
뱅크시가 이들과 달랐던 점은 그가 보여준 해프닝이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이 전시되는 공간, 그것도 인류가 남긴 최고의 예술적 문화유산이 전시되는 공간이라고 믿어져왔던 미술관과 박물관이란 공간의 권위, 평론가들에게 독점되어 오던 예술 작품 평가의 권위를 기본부터 해체하는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한 예술 작품 곁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전시해두고 관객이나 미술관 관계자가 알아채기 전까지 도둑 전시를 일삼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몇몇 작품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뱅크시의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래피티'와는 약간 다르다. 대개 그래피티를 생각할 때 벽면에 검정색 스프레이를 뿌린 뒤 그 위에 형광 느낌이 나는 색색깔 스프레이로 화려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연상하기 쉬운데 뱅크시의 경우엔 스텐실 기법을 즐겨 사용하고, 벽면에 남아있는 여러 흔적들을 기발한 발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쥐를 발견하고 의자 위로 몸을 피신한 소녀와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쥐를 보라. 깨진 벽면 속에 드러난 붉은 벽돌의 모양에서 뱅크시는 '쥐'를 연상(못 써요, MB를 연상하다니)했고(솔직히 나는 일부러 깬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쥐의 수염과 귀, 긴 꼬리만을 덧붙여 한 마리의 쥐가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비극적인 희극의 정신을 표현하다
그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고 영국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국인이든 아니든 영국적인 문화 풍토가 잘 느껴지는 대목은 뱅크시의 작품 곳곳에 숨겨져 있는 '블랙유머' 감각이다. 블랙유머가 보통의 '유머'와 구분되는 결정적인 근거는 블랙유머가 삶의 부조리나 부정적인 사회 풍자에서 비롯되는 '비극적인 희극'이라는 점이다. 뱅크시의 작품들에서는 버나드 쇼나 처칠의 짧은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는 풍자를 읽는 것처럼 재기 넘치는 날카로운 풍자정신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근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존중과 그들의 비명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희극이기도 하다. 벽면에 그려진 메이드 복장의 여성은 담벼락을 마치 커튼처럼 들어올린다. "이거봐! 이게 벽이야? 커튼이지!" 현대예술의 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뱅크시의 '연인'이란 작품이다. 어쩌면 거리에 이런 그림이 낙서화로 그려지고 전시되는 것 자체를 폭력이라 부르고, 이런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의 건물 소유주는 당장이라도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혼쭐을 내리라 잔뜩 벼르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뱅크시의 작품으로 인해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뉴스는 들려오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로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을 흉내낸 작품들이 세계 도처에서 그려지고 있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웃기는 권위 의식
얼마 전부터 오세훈 서울 시장은 '디자인 서울'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하는 '디자인'이란 우리 일상의 풍경을 조금 더 아름답게, 편리하게,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시민이 생각하고 꿈꾸는 디자인과 개념의 온도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주장하는 '디자인'이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콘크리트 어항을 건설하고 그 공로로 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된 전임 시장의 업적을 계승하여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좀더 그럴싸하게 포장한 정책의 명칭일 뿐이다. 그가 말하는 디자인서울이란 '좀더 거창하고, 좀더 위대한, 좀더 세련된' 정책을 펼치고 싶다는 그의 공약을, 아니 그의 정치적 욕망을 대리하는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오세훈 서울 시장의 '디자인 서울'이 이처럼 위대하고, 거창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속좁고, 자기 중심적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근거는 그가 얼마 전 '해치맨 프로젝트'라는 몇몇 미술전공 학생들이 남긴 '디자인 서울'에 대한 풍자에 대해 보여준 너그럽지 못한 태도 때문이다.
해치맨이 공공디자인, 디자인 서울에 끼친 해악이 있다면 길 가던 시민들에게 서울의 숨겨진 진면목, 서울 시장이나 그의 수하 공무원들이 잊고 있던 공공미술의 진정성을 일깨워 준 것이며, 웃음을 잊고 살아가던 서울 시민들에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 정도일 것이다. 이 정도가 죄라면 서울시는 '디자인'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유니폼이 가지고 있는 기능은 착용자에게 소속감, 동료 의식 및 단결심을 가지게 하며 대외적으로는 소속되어 있는 단체나 조직의 얼굴 역할을 한다. 유니폼이 착용자에게 이와 같은 기능과 의미를 할 때 유니폼을 입지 않은 일반인들은 우리가 아닌 저들로 소외되며,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상징하는 유니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권위가 된다. 그러나 뱅크시는 유니폼이 주는 권위를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토네이도에 휘말려 현대로 온 도로시는 거리에서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그녀의 런치바구니는 검색의 대상이 된다. 과거 토네이도에 휘말려 오즈의 나라로 날아갔던 도로시를 막아 섰던 것이 마녀들이었다면 현대로 날아온 어린 소녀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들은 억압적인 국가기구인 경찰과 군대인 셈이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 거리 어디에선가는 G20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유니폼들이 길 가는 사람들을 막아서고 있을 것이다.
"WHAT ARE YOU LOOKING AT?"
"꽃"이란 작품은 도로의 규칙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차선(Line)을 응용해 규율과 규범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자신을 형상화하고 있는 어찌보면 자화상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대영박물관에 몰래 숨어 들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며 규율을 깨뜨리며 도전하고 있는 화가 뱅크시, 그가 이런 해프닝을 벌이고 다닌다고 해서 '국격(國格)'에 손상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는 뉴스는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마도 영국을 비롯해 뱅크시의 습격을 받은 선진국들 중 어디도 그의 이런 작품행위가 자국의 국격에 손상을 준다고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넉넉한 인격을 갖춘 어른이 아이들의 재치 넘치는 장난을 눈감아 주듯, 천국과 지옥은 물론 연옥까지 탄생시켜 교회의 엄격한 윤리와 율법으로 중세를 지배했던 가톨릭 교회가 카니발을 통해 민중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것처럼 통치의 정당성에 자신 있는 권력이라면 예술가들의 도전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고 세련된 통치기법일 것이다.
그렇다고 뱅크시의 풍자정신이나 문제의식이 그렇게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불온한 의식은 미키마우스와 맥도날드의 손을 잡고 걷는 어린 베트남 소녀를 그린 "네이팜"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의 거대한 범죄는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규율을 따르는 것에 있다. 명령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고 마을주민을 학살하는 사람이 곧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미키마우스와 맥도날드는 미국을 상징하는 양대 아이콘이자 미국식 삶의 표본을 상징한다. 그러나 '제3세계로 미국식 삶이 이식되는 과정(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우리는 '평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뱅크시는 단순한 낙서화가가 아니라 참여예술가이기도 하다. 그는 팔레스타인 등 억압이 존재하는 세계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그만의 방식으로 이에 항의하는 그래피티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이런 방식은 실정법 상의 체계로 보자면 그 자체로 범죄의 형식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그가 공공시설물 혹은 민간시설에 낙서를 하는 행위가 범죄라면 세계 곳곳에 네이팜탄과 클러스터 폭탄을 떨어뜨리는 자들이야말로 인류에 대한 범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힘 없는 자의 넋두리지만 짓밟힐 수록 그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얼룩말의 무늬를 빨아주는 '세탁'이란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선량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그것이 뱅크시가 의도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닐까 싶다.
뱅크시의 작품들 대부분은 결국 저(알타미라 벽화)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운명으로 소실될 운명에 처한 뱅크시의 작품들을 망실되기 전에 사진으로 기록한 일종의 작품집이다.
* 대한민국 국립경찰이 인정한 '이명박 대통령의 상징 = 쥐'
오늘 아침 일간지를 보니 국내에도 뱅크시 못지 않은 뛰어난 예술성과 풍자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마치 뱅크시가 한국에 온 것이 아닌가 싶은 만큼 말이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알리고자 정부가 설치한 홍보 포스터에 낙서 그림을 그리던 40대 남성이 지나가던 시민에 의해 신고당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경찰이 과태료 정도 물리고 훈방하면 될 사안에 대해 "G20을 방해하려는 음모"라는 거창한 명분을 붙여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된 사건이다. 경찰이 특히 예민하게 굴었던 이유는 체포된 이들이 경찰조사에서 했다는 말을 통해 반증되고 있다.
체포된 이들은 경찰조사에서 “단지 G20의 ‘G’라서 쥐를 그린 것일 뿐”이라면서 “정부가 G20에 매몰된 상황을 유머스럽게 표현하려 한 것인데, 이 정도 유머도 용납이 안되느냐”고 말했다는데, 체포된 이들이 이렇게 변명하듯 말해야 했다는 것도 우습지만, 사실 이 사건 자체가 코미디인 것은 정부가 G20 홍보를 위해 설치한 코엑스 주변의 각종 옥외 홍보물은 옥외광물법상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강남구청이 정부가 설치한 것이라 단속할 수 없다고 하는 뉴스가 나온지 불과 2~3일도 안 되어 터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뱅크시가 한국에 온다고 해도 그가 쉽게 작업하긴 여러모로 어려울 것 같다. 일단 신고정신이 투철한 시민(이런 건 주인의식이 아니라 관변의식이라고 부른다)이 계시고, 이를 절대로 용납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정부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점점 더 뱅크시적인 반항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서 표출하는 저항들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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