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보는 20세기 - 학고재신서 19/ 이주헌 지음/ 학고재/ 1999년
- 도상학자 파노프스키가 그랬다던가? 그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미술 작품을 보라고... 이 책 "미술로 보는 20세기"의 저자 이주헌 선생은 확실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20세기에 만들어진 미술작품들을 통해 이 100년의 실체를 이해해 보려는 나름의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이 책을 만들었음을 밝히고 있다. 역사를 말할 때 간혹 '청사(靑史)'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 때 청사라는 것은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시기에 대나무를 다듬어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때 기록된 역사는 당연히 문자를 통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파노프스키는 어째서 미술 작품을 보라고 말할까? 그것은 문자가 미처 기록하지 못하는 당시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의 기능을 미술작품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미술관련 예술서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이다. 저자는 미술작품을 통한 역사 접근법을 통해 문자 기록에 의한 사실 나열과 파급효과를 따지는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당대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와 느낌, 그리고 그 반응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긴장이 오로지 지난 100년의 역사적 사건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도리어 지난 100년의 다양한 미술사조와 역사의 긴장 관계를 밝히는 탐색 작업을 통해 그간 난해하게만 받아들여졌던 현대 미술의 흐름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더불어 밝혀주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때 특히 주목하게 되고,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술사조나 양식사적인 접근법이 아니라 그 기준을 현실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다양한 현상을 아우르는 역사를 통해 역으로 미술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주헌 선생은 20세기에 제작된 다양한 미술작품들과 함께 지난 100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범주로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관능의 시대, 혁명, 팝문화, 전쟁, 갈등의 시대, 테크노피아, 잃어버린 낙원' 등의 구분 방식을 통해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천사와 현대 사회의 기술력이 미술에 파급시킨 영향과 예술가들이 이에 대해 보인 반응들인 작품을 비교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알기 쉽다고 해서 깊이를 얻지 못한 그런 글이 아니라 문장 하나, 인용된 작품 하나하나가 매우 섬세하게 신경 써서 고른 것들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의 무수한 장점들 중 가장 뛰어난 대개의 요소들은 저자에 의한 것이다. 그는 종종 미술비평가들이 등한히 하기 쉬운 사상의 문제나 이념의 문제,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기술만능, 환경파괴, 제3세계의 문제 등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역사와 미술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처음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주목해서 보았는데 단행본으로 나온 것을 읽는 마음도 여전히 설렌다.) 저자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시도를 비교적 성공리에 수행하고 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20세기의 굵직굵직한 테마들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려는 시도 자체가 매우 방대한 요구인데 이를 축약해서 다루려는 시도가 가끔 총망라하겠다는 욕심에 시달린 흔적들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결국 분량의 문제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고, 충족시키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음에도 저자는 이를 매우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지난 1999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권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선물해도 괜찮은 책이란 것이 찾아보면 그리 흔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난 1999년을 새로운 천년을 맞는다는 호들갑 속에 보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었음에도 20세기의 유산들은 아직 청산되지 않고 이어져 온다. 지난 세기를 조망해보는 중요성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소중하다. 현재를 조망해보고 미래 문명을 예견해 볼 수 있게 만드는 책 역시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한 권 샀다면 한 권 더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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