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 너희가 시대를 아느냐』 - 민윤식| 중앙M&B(2003)
내가 소파 방정환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산5번지, 지붕엔 루핑천을 두른 만화방에서의 일이었다. 이 동네는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도 나오는 것처럼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는 광주,성남 등지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 새롭게 이주하여 터를 잡고 살아가는 변두리 동네였다. 비오는 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고무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그럴 듯하게 받아들여지는 동네였다. 비만 오면 진구렁으로 변하는 마을 길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이라도 서울이라 할 수 없는 시골 촌구석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가까운 공장에 나가거나 아니면 집으로 일거리를 떼와 인형에 눈을 달거나(우리 동네에선 이 일을 일명 개눈 박기라고 했다), 목걸이 마감 처리를 해주는 일을 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집은 구파발 인근에선 꽤 알찬 부잣집이었다고 하는데, 사업이 일시에 망하는 바람에 집안은 거덜나버리고, 우리는 한강 이남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세간살이와 함께 용달트럭 짐칸에 실려 청계천 고가도로를 넘어갈 무렵의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이랑 숨어들기 가장 좋은 곳은 역시 만화방이었다. 그 만화방엔 우리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자매가 있었고, 한 접시에 50원하는 떡볶이도 낱개로 팔아주었다.
아무리 어렸다고 해도 방정환을 몰랐을리는 없다. 다만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깨우치게 된 것이 만화방이었다는 것뿐이다. 그 만화방에는 "어린이헌장"이 액자에 넣어져 있었는데, 나는 어렸을 때 그 글을 읽고 우리들 어린이에게 이렇게 멋진 헌장이 있다니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린이헌장 대강의 내용은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라야 하고, 고른 영양을 취하며, 좋은 교육시설에서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 어린이는 학대받거나 버림 받아서는 안되고,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코를 흘리는 일은 없었지만, 산5번지 아이들 가운데는 흔하지는 않았지만 누런 코를 늘 흘리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어렸을 때 코를 흘리는 건 영양부족인 탓이 크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 역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코흘리는 아이들을 싫어했었다. 밤이 되어 산5번지에도 어둠이 짙어지면 산 아랫마을에 살던 우리들 눈에 산5번지는 온통 별천지였다. 엄마, 아빠가 돌아온 집집마다 환하게 불이 켜지고, 그곳 어딘가에는 내 친구, 누렇게 코를 흘리던 그 녀석도 부모 앞에서 재롱도 부렸을 것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 평전을 다 읽고 나는 울었다. 방정환 선생이 워낙 눈물이 많았다고 하지만, 남의 평전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험도 나로서는 참 드물다. 방정환 선생이 조선소년운동협회 주최로 제1회 어린이날을 개최하며 만든 선전문의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어린 동무들에게"의 어느 구절들은 비록 선언적인 말이지만 어쩐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일부 구절들만 옮겨본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이 구절들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가운데 일부를 임의대로 옮긴 것이다. 이 구절들을 소리내어 따라 읽어보니 마치 내가 벌써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마음이 든다. 내 자식을 남에게 맡겨논 심정이 된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꽃이나 풀을 꺽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이 구절들은 "어린 동무들에게" 가운데 일부이다. 이 구절들을 읽을 때 나는 눈 앞에 두루마기에 넉넉한 웃음을 만면에 담은 어른이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바로 잡아주고, 뛰어놀다 넘어져 다친 무르팍을 호호 불어주는 정경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런 모양새가 우리가 머리속에 떠올리는 정형화된 소파 방정환 선생의 면모일지 모르겠다.
오는 3월 1일(2005년) 서울대의 '떠도는 유령'이었던 김민수 교수가 복직하게 되었다. 서울대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한지 7년여만의 일이고, 그간 바뀐 서울대 총장만 3명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가 서울대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 이유는 그가 선배 교수이자, 서울대 미대의 초대 학장, 교수진들의 친일 행각을 비판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대만의 일이 아니라 음대 초대학장 현제명 등도 친일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 장발은 4.19혁명의 결과로 창출된 제2공화국의 수반 장면 총리의 동생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원로들이자 중요한 스승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 인사들의 친일 행적은 이미 명명백백한 사실로 드러났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이런 사실을 들춰내는 일만으로도 옛 스승에 대한 불경으로 치부한다.
우리 문학사를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을 빼놓고 기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음악사, 미술사에서 이들을 제외하고 기술할 방법 또한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과거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욕된 과거이긴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과거이며 결코 잊어선 안되는 과거이기도 하다. 과거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더이상 과거를 욕되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을 놓고 보았을 때 우리 아동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소파 방정환 선생의 존재는 우리 어린이들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호인 "소파(小波)"란 별호 때문에 일본의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 1870-1933)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의 비평(이재복, 한국 어린이 문학 연구회, 1999년 9월 발표자료 "새로 만나는 방정환 문학 - 암곡소파 문학과 견주어 보기")이 있는데, 이에 대해 평전의 저자 민윤식은 방정환 성생이 도일하기 전부터 이 별호를 사용해왔다는 실증을 들어 이를 반박하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방정환 선생이 일본의 아동문학의 영향에서 자유로왔다는 뜻은 아니며,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하다고 할 것이다. 좀더 중요한 것은 그가 일본의 아동문학과는 분명히 다른 조선의 아동문학을 했다는 사실이다).
실제 방정환만큼 수많은 필명을 가지고 활동한 작가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확실히 그의 필명이라고 알려진 것만으로도 ㅈㅎ생, 목동, CWP, CW생, 북극성, 몽중인, 몽견초, 쌍S생, 삼산인 등이 있다. 그가 이렇게 여러 필명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방정환이 수많은 잡지의 발행인이었기 때문이다. 잡지는 단행본과 달라서 많은 필자들의 조력이 필요한 것이다. 단행본은 대개 한 명의 필자 혹은 여러 사람의 기획서라고 할지라도 동일한 주제에 대해 한 두 권만 내면 되지만, 잡지는 연속해서 출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자 풀이 구성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에 잡지는 그 사회의 문화수준을 가늠하게 해주는 바로미터 구실을 한다. 잡지는 수요를 창출하는 기능도 함께 가진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미국의 "LIFE"와 같은 사진잡지가 있다면, 이 잡지를 통해 수 많은 포토그래퍼들이 그들이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물적 토대와 소통의 통로를 얻음으로써 사진을 통해 생활을 영위해가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방정환이 잡지를 만들고 활동하던 1920년대 우리나라 아동문학 분야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를 지탱해줄 만한 물적 토대는 물론 집필자 풀 자체가 현격하게 모자랐던 시대이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의 우리 아동문학계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동문학시장 규모는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질적인 성장은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방정환 시대엔 어린이에 대한 투자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규모를 따르지 못했으므로 그에 따른 물적 토대(시장 규모, 재정 지원 등)가 뒤따르지 못했다. 방정환은 궁여지책으로 자기 자신이 여러 필명을 이용해 여러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필자의 부족과 더불어 원고료 문제를 해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과중한 격무는 그의 몸을 점점더 손상시켜갔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방정환의 몸은 몹시 비대했다. 그의 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저자 민규식의 추측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 성인들의 평균 키가 164센티미터 정도였다고 하는데, 방정환의 몸무게는 80킬로그램 이상이었다고 한다. 방정환 자신은 스스로의 건강에 자신하고 있었고, 당시의 궁핍한 분위기로 보았을 때 방정환의 비대한 몸은 건강의 상징이면 상징이었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만이 당뇨, 고혈압과 같은 만병의 근원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에게 과중한 업무와 그에 따른 피로는 보람이자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수많은 원고를 집필하고, 잡지를 발행하고, 색동회를 창립하고, 행사를 기획했다. 일설에는 그의 강연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때문에 발디딜 틈 없는 강연장소에서 사람들을 비집고 화장실에 가지 못해 그 자리에서 볼 일을 보고만 이들도 있었다 할 만큼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나 많았다. 일제강점기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을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민족해방의 미래를 어린이들을 통해 일궈내고자 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던 1928년 10월 2일 방정환은 만 4년 동안 준비해온 "세계아동전람회"를 개최한다. 오늘날과 같은 무선인터넷 통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팩스나 전화도 없던 시절 방정환은 어디서 재원을 마련하고, 전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모아 전람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걸까? 그가 준비해온 이 행사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그의 건강은 이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극심한 과로로 인해 얼굴이 붓고, 코피를 흘리는 등 지병이 악화되고 만다. 1931년 소파 방정환이 운영하던 개벽사의 경영이 감당하기 어려워질 만큼 극심한 부채에 시달리면서 그의 건강 상태는 최악이 되었고, 결국 7월 23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한 듯 운명하기 전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는 가야겠어. 문간에 마차가 와 있어." "마차라니요?" "말도 새까맣고 마차도 새까만 마차야. 난 저 마차를 타고 가야 해." 아저씨, 그건 헛것을 보신 겁니다." "어서 내 가방을 갖다 주게." 다음날 방정환은 친구들에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장남 방운용에게 "공부 잘 하라", 동료 후배들에게는 "일 많이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33세였다.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바로 그 나이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32년 방정환 선생이 심혈을 기울였던 잡지 <어린이>가 통권 12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34년 일제의 탄압으로 어린이날 기념식이 전면금지되고, 소년운동단체도 모두 강제 해산당하고 만다. 에릭 홉스 봄은 "만들어진 전통"에서 "새로운 전통이 스며드는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과거가 시간의 안개를 더듬어 올라갈 만큼 응당 장구한 것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만들어진' 전통의 특수성은 대체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내려 하는데 있다. 물론 우리 어린이문학에도 일제 강점기의 고통과 굴절의 경험, 분단과 냉전의 시련 속에 비틀어진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어린이문학의 전통은 굳건하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그 시원이 맑고 깨끗한 사람, 소파 방정환 선생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 이 책은 다 좋은 데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평전이라는 미덕보다는 전기적 사료들에 좀더 충실하단 아쉬움은 있지만, 앞으로 좀더 훌륭한 소파 방정환 평전의 출간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기대해보면서... 우리 작가, 시인들의 평전이 좀더 많이 출간되길.... 이오덕 선생 평전은 언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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