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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인물/평전

역정(나의 청년 시대) - 리영희 저작집 6 | 리영희 (지은이) | 한길사 | 2006

역정(나의 청년 시대) - 리영희 저작집 6  | 리영희 (지은이) | 한길사 | 2006

여기 한 사람의 인생 역정이 있다. 언론인이자 학자, 우리 시대의 양심이자, 웃어른이 남긴, 부제를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라고 하는 책이 그것이다. 그는 이 글을 집필할 때 이미 수많은 젊은이들의 삶의 향배를 결정지은 책(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비롯한 - 나 역시 그의 책들 중 가장 먼저 접한 것이기도 하다)들을 저술한 유명한 학자이자 언론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 사건의 '배후조종자' 혐의로 중정 지하 삼층에서 혹독한 시달림을 당했고, 그 자신이 도저히 더는 글을 쓸 수 없게 되리란 판단 아래 자신의 인생을 묵묵히 정리하겠다는 마음으로 - 이는 마치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뒤, 사기에 전념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통해 한 시대를 증언하겠다는 마음이었으리라 - 써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쏟아지는 역사로부터의 소환장은 그를 끊임없이 칩거로부터, 농성으로부터, 유배로부터, 망명으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결국 그는 이 원고를 집필하던 중인 지난 1983년 다시 통일문제와 관련된 사건으로 연행되어 간다. 집필은 1963년으로 멈추게 된다.

한 개인이 꿈꾸는 소박한 인생의 완성은 역사적 사건의 개입이 없다면 자기 과시(誇示)가 아닌 겸손한 자세로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의 운영이야 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일 뿐 아니라 인생의 완성을 이루는 역정(歷程)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개인의 삶에 역사는 늘 개입하고 소환해낸다. 우리가 인간이므로 전쟁에 반대한다던 어느 반전 운동가의 말처럼 우리는 인간이므로 늘 역사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한 시대로부터의 소명(召命)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부 '식민지하의 조선 소년'으로서의 삶과 제2부 '굴절 많은 궤적'에서는 대학시절에서 영어 선생이 되기까지, 제3부 '민족상잔 속에서 열리는 의식의 눈'에서는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들어 새로운 인식의 눈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제4부 '역사의 격류 속에 뛰어들어'는 그 자신이 군인에서 언론인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5.16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그리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에게는 이 책이 대단히 고리타분한 것으로 보이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잠시도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흥미진진興味津津' - '흥미가 넘칠 만큼 많다'는 말이 이 책만큼 잘 어울리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리영희'라는 한 위대한 영혼의 진면목을 모두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 책이 드러내고 있는 부분 이후에 좀더 많은 역정을 보인 이이기 때문이다.

요 근자에 선생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마음이 몹시 아팠는데 그는 다시 이라크 전이라는 불의의 전쟁에 우리 정부가 앞장서 지지하고, 파병까지 결정한 것에 다시 아픈 노구를 이끌고 앞장서고 계시는 모습을 뵙노라니 그의 청년 시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시대와 역사가 여전히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 현실이 후학의 한 사람으로 못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자신의 청년 시절 아직 무엇이 될지,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에게 인생의 지침이 될만한 책 한 권을 추천하라면 나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역정(歷程)이란 말은 명사지만 어쩌면 그것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말일 것이다. 우리는 이 불신과 혼돈의 세상에서 과연 누구를 신뢰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믿고 싶다면. 나는 그 사람의 마음도, 말도 아닌 그 사람의 삶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기 한 사람의 삶이 있다. 믿고 따르고 싶은 삶. 그것이 역정(歷程)이다. 



역정/ 리영희/ 창비(창작과비평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