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미셸 슈나이더 | 이창실 옮김 | 동문선(2002)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까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연예인들의 자살을 바라보면서, 이후 나는 점점더 나의 죽음 이후를 상상해본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사체를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산 속에 버려두거나 아니면 깊은 심연 속에서 두번 다시 햇살 아래로 떠오르는 일 없이 그렇게 조용히 부패해가기를... 한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잠시 전 한 회사 동료로부터 그(녀)의 죽음과 관련한 그럴 듯한 X파일 하나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우습다. 사람의 죽음이 소모되는 방식이란 구더기가 눈구멍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것처럼 잔인하다.
브레히트의 시를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들도 모두 죽는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에 타인의 죽음을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가 아니라 살아남았으므로 강한 자임을 깨닫노라면 나는 자신이 미워진다." 오직 인간만이 타인의 손에 자신의 시신을, 최후 처리를 넘긴다. 짐승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푸줏간의 고기처럼도 취급해주지 않는다. 죽은 건, 그냥 죽은 거다. 한밤의 연예 프로그램에서 성남 분당의 아파트에서 하얀 시트에 포장된채 들려나오는 여인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에 질질 끌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오디오에 삽입한다.
"딴따아앙 따라다라 퉁두르"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토론토 순회 공연 중이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날 굴드를 방문했다. 굴드는 자신의 아파트에 번스타인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곧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모피와 털로 안을 댄 외투, 목도리 속에 얼굴이 묻힐만큼 깊이 파묻힌 굴드는 창문을 모두 닫고 난방을 최고로 높였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한 올린 라디오가 악을 쓰는 상황에서 번스타인은 굴드와 함께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소음과 땀에 파묻힌 번스타인이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고 했더니 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하루에 육백마흔네가지 망상에 사로잡히는 나 같은 인간도, 병들어 몸져 누워 있는 동안 욕실 거울을 앞에 두고 면도칼로 스스로의 목울대 대신에 머리카락을 스윽쓱 밀어댄 나 같은 인간도, 회사를 그만두고 삼개월여 동안 두문불출하고 방 안에서만 지내 괴물같이 자란 수염을 보며 텅빈 미소를 지어 보였던 나 같은 인간도 글렌 굴드와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하라면 이렇게 말할 거다. "넌 참 짜증나는 인간이야!"라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저자 '미셸 슈나이더'를 감히 존경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어느 정도로 글렌 굴드를 사랑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거지요? 하고 그에게 묻고 싶다. 굴드는 종종 마약이 필요한 나에게 마약 이상의 값어치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금쯤 백골이 진토되어 나뒹굴고 있을 굴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웅얼대며 남겨논 음반 덕이다. 나는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뿐만 아니라 골트베르크 변주곡 자체를 무진장 좋아해서 이 곡이 수록된 음반만 대여섯장 가지고 있다. 그래도 내 귀엔 굴드가 최고다. 그의 악보엔 온갖 낙서들이 난무한다. 상념 많은 인간은 스타인웨이 CD318 피아노 앞에서도 끊임없이 웅얼대고 싶어했다. 그가 그랬다.
굴드는 만년에 잠시 야마하를 쓰기는 했지만 그가 즐겨쓰고 좋아한 피아노는 역시 <스타인웨이 CD318> 그것도 그만의 174번째 생산된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불의의 사고로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의 건반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스타인웨이사의 전속 조율사 윌리엄 후퍼를 불렀다. 후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애용하는 호로비츠와 굴드를 위해 스타인웨이사측에서 특별히 채용하고 있는 조율사였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는 굴드와 이야기를 나누다 친근감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툭 쳤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절대 악수하지 않는다는 결벽증의 소유자. 소련에서 니콜라예바와 악수할 때조차 장갑을 낀 채 였던 굴드에게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에 통증과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며 스타인웨이사에 3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재판에서 누가 승소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사건이 굴드의 노이로제 증세를 더욱 악화시킨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굴드는 이전부터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등의 핑계댈 만한 것만 있으면, 아니 핑계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휴식하던 중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앞으로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다. 결국 이런 글렌 굴드의 꾀병과 노이로제 증세는 정작 그의 몸에 중한 병이 찾아왔을 때 의사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부메랑이 되어 변변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문득 독일 작가 파트릭 쥐스킨트가 떠올랐다.
이 인간(파트릭 쥐스킨트)은 사진 한 장 보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라면 J.D. 샐린저도 만만치 않은데, 쥐스킨트는 사람 만나는 걸 꺼리고, 빛을 싫어하고, 누가 그에게 문학상을 수여할 테니 시상식장에 나와달라고 요청할까 두려워서 문학상도 거부한다. 어디가서 자신의 얘기를 전하는 친구에겐 주저없이 절교를 선언한다. 그는 개도 무서워하고, 비위생적이란 이유에서 악수도 거절한다.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좀머씨는 그래서 쥐스킨트 자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침묵한 채 걸을 뿐, 누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외치는... 자기 안에 심연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타인과의 대화를 꺼리게 되는 걸까.
▶ 캐나다 토론토시 CBC빌딩 앞에 있는 글렌 굴드의 조각상 벤치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얼마 후 글렌 굴드는 자신이 거주하던 토론토의 아파트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불을 모두 켜둔 채 잠을 자던 그는 토론토의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데뷔 레코딩곡>이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굴드는 두 번째 녹음 이듬해인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피아노 건반에 코를 박듯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연주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속 결말이 어찌 끝나는지 잘 알고 있다. 소설 속의 좀머씨는 호수를 향해 그냥 걸어 들어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나는 그가 과연 자살을 위해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지 그냥 걸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오늘날 클래식 연주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타성을 발휘하길 원하는 청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을 포함해서) 사실 고전 음악의 최전성기 때조차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받은 대접이 그렇게 훌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몸을 누일 만한 그럴 듯한 관짝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고, 오페라 작곡가들은 온갖 연애담과 구설수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로 대접받았던 시기는 고전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연주자들은 더 이상 예술가라기보다는 메이저 음반사에 묶인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대중들은 마음의 심연을 두드리는 음악보다는 듣기 좋게 짜깁기된 콤필레이션 음반들을 더 선호하고, 불황으로 활로를 찾을 수 없는 음반사들은 음악성보다는 뛰어난 외모를 갖춘 연주자들을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려 든다. 글렌 굴드가 이와 같은 이유들로 청중들을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 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더 잔인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서로 사랑하다가 이별한 경험이 있는 연인이라면 더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내가 당신을 아는 만큼 나는 당신에게 더 잔인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당신이 사랑해달라고 애걸했던 그곳, 당신의 가장 취약한 곳에 비수를 박아넣을 수도 있으니까. 글렌 굴드는 미치도록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외로왔고, 무대에서, 콘서트 장에서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내 자신이 강박적인 인간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마다 나의 상처들이 벌어져 오래된 고름들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 글렌 굴드는 나에게 좋은 위로가 된다. 사랑이란 모든 걸 다 아는 존재로서의 대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거기 오랫동안 있어주는, 그것이 무엇일지는 나도 모르는 존재를 상정할 뿐이다.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따금 음악이 일체를 엄습해 깡그리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음향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 음향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때론 아주 미미한 것, 거의 무효화된, 아니면 부서진 무엇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中에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지난 88년 프랑스에서 출간돼 유명한 페미나 바카레스코상까지 수상한 전기문학이지만 매우 특별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미셸 슈나이더는 굴드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담아 그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기인 글렌 굴드를 조금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만약 추억하거나 회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혹시 나라면 이처럼 해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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