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 정수웅, 눈빛(2004)
『최승희 -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이란 책은 내가 아는 한 국내에서 출판된 책 중 가장 호화로운 책 가운데 하나다. 우선 겉 표지 그렇고, 겉표지를 벗겨낸 뒤 바라본 양장본 속표지가 그렇다. 자줏빛 장미가 새겨진 비단천(물론 비단천은 아닐테지만)으로 속을 감싸고 거기에 책등엔 금박으로 제목이 아로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평전 성격으로 생각하여 구입한다면 약간 후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이정 박헌영 일대기"처럼 평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료집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사진전문출판사인 "눈빛"에서 출간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인 듯 싶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인 정수웅이 <세기의 무희 최승희>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수집한 최승희에 대한 자료들을 한데 묶은 책이다. 그렇다고해서 무미건조한 책은 절대 아니다. 다만 글보다 많은 화보들로(그것이 또 여간 귀한 것들이 아니다) 책의 상당수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으로 엮이게 된 무용가 최승희는 어떤 사람일까? 과연 그녀는 이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일까? 그건 이 책과 최승희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인용해보는 것이 좋겠다.
장후리, 중국무용가협회 지도자의 말을 들어보자.
최승희는 조선민족무용을 했습니다만 해외의 발레나 현대무용 등도 전부 할 수 있었습니다. 최승희는 이들을 전부 융합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최승희의 위대한 면은 이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민족의 것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것들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도리가와 준, 일본 동유럽문화교류협회 회장은 "최승희는 단 한 사람일 뿐 역시 똑같은 최승희는 없습니다. 시대가 다릅니다. 무용에 대한 정열은 역시 헝그리 정신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너무도 자유스럽고 무엇이든 넘쳐나는 시대라 이런 상황에서는 이시이 바쿠 선생이나 최승희처럼 훌륭한 예술인은 생겨나기 힘들지 않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만큼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는 세계적인 동양의 무용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저자 정수웅은 지난 2002년 11월에 방송된 <세기의 무희 최승희>를 위해 1990년대초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을 돌며 최승희의 사진 자료와 필름을 발굴하고, 각국의 무용계 인사들, 최승희의 제자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들을 채록했다.
최승희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서울에서 사남매 가운데 막내로 출생했다. 그의 큰 오빠 최승일은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인 염군사에 가입한 인물이기도 했는데, 최승희는 어려서부터 무용과 음악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자신의 길을 무용으로 정한 것은 1926년 오빠의 권유로 광부 출신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라간 뒤의 일인 듯 싶다. 그녀는 같은 해 4월 이시이 바쿠 무용소에 입소하여 이때부터 전문적인 무용 공부에 임한다. 1929년엔 경성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듬해 제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를 연다. 1938년엔 미국의 초대로 샌프란시코 카란 극장에서 첫 공연을 펼치고, 같은 해 2월 뉴역 필드 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아시아인으로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디샹카와 더불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최승희의 미국진출을 일본의 선전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라는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으로 공연을 취소하고 유명화가의 모델 활동을 하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 최승희 가족 - 남편 안막, 딸 안승자
1939년엔 파리, 제네바, 밀라노, 로마, 브뤼셀 등에서 공연했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메트로폴리탄과 계약한다. 1940년 귀국해서 일본의 강권으로 만주 일대를 돌며 위문공연에 나서야 했다. 그녀가 동양무용을 시도한 것도 이무렵의 일이다. 해방 후인 1946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여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건립한다. 그러나 50년대 후반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으며 무대에서 사라진다. (주은래가 김일성에게 특별히 최승희의 무대 복귀를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1986년 영화감독 신상옥은 최승희가 딸과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최승희라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을 거치며 우리들 뇌리 속에 잊혀져 있던, 아니 간간이 그녀의 제자들을 통해서만 구전되던 한 인물을 구술사라는 역사기술의 기초를 되밟아감으로써 오늘의 생생한 역사 인물로 재생해간다. 이 책은 그 과정의 일부이지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땅에서 분단의 족쇄가 풀리는 날, 그날이 오면 최승희는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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