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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인물/평전

요절 - 조용훈 | 효형출판(2002)

『요절』 - 조용훈 | 효형출판(2002)



◀ 이중섭

"요절(夭折)"
짧게 끊어서 발음해본다. 단지 두 음절에 불과하다. 그러나 입 속 어딘가를 베어문 것처럼 찌릿한 피맛이 살며시 배어나온다. 이 단어에서는... 어릴요(夭)자는 아이가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뒤로 살며시 젖혀진 모습을 형상화한 한자다. 아직 하늘 아래 제 머리를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 만큼 어린 사람의 꺽어짐. 그것이 요절의 순수한 의미다. 아직 어릴 때 꺽이는 것, 그것이 요절이다. 얼마전 나는 한 어린 친구에게서 "나, 다음에 만나면 구두에게 지금 구두가 가진 꿈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어졌습니다."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아주 먼 이방의 낯선 땅을 영원히 떠도는 순례자를 흠모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란걸 내 오늘날에도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이들 핸드폰에서 장난스럽게 쏟아지는 "인생 뭐 있겠어. 해피하게 사는 거지"란 벨소리처럼 종종 망가지는 쾌락을 흠모한다. 내가 유독 사랑하는 서사가 있다. 나는 한 인간이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혹은 그것을 이루어도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걸 시도하고, 그럼으로써 일생을 허비하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것은 퇴락한 회색빛 머리카락 속으로 숨겨둔, 재로 화한 꿈의 잔재를 남기기 보다는 활활 불태우는 의미의 강렬함 때문이다.

죽어도 썩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마르께스의 어떤 단편. 토막난 이야기는 남미의 이름 없는 골짜기 출신인 한 소녀가 어느 날 죽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의 시체는 썩지 않는다. 몸 안의 수분도 빠져나가지 않은 채 그녀는 언제까지나 죽던 날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소녀는 소멸한 것일까? 아직 살아남은 것일까? 예술가들이 꿈꾸는 불멸이란 이 소녀의 죽음과 같다. 죽었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의 소멸과정과 일치함에도 그녀의 남겨진 육신은 존재하여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런고로 모든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것은 효시(梟示)된 자아(自我)다.



▶ 손상기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자손을 통해, 어떤 이들은 기억으로 전승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서의 불멸을 꿈꾼다. 그러나 그 허망한, 도저히 성취될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위해 인생을 바치라고 권유할 수는 없다. 내가 만일 남미의 고원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인디오로 태어났다면 나는 많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꿈들은 옥수수와 함께 피고지는 세월 속에서 한 구절  노래가락으로 남거나 그나마도 남기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허기의 망령이 엄습한다.

 

인생이 지속될 것이라는 허망한 경고는 모두에게서 울린다. 존재가 끝나는 순간, 당신의 우주도 함께 문닫을 것이다. 어떤 요절한 시인의 시는 오늘도 종잇장 같이 얇게 썰린 복어살처럼 투명하게 빛나지만, 당신과 나의 부박(浮薄)한 영혼은 그대로 썩어갈 것이란 경고. 그래서 한동안 나의 소망은 세속 도시에서 성자처럼 사는 것이었다. 나는 바람처럼 빨리 살고, 아직 젊을 때 죽어서, 아름다운 시체를 남기고 싶었다.


▶ 최욱경
 

이 책 "요절"엔 그런 소망을 성취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그들이 그런 소망을 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 이중섭, 손상기, 나혜석, 최욱경, 윤두서, 오윤, 류인, 이인상, 전기, 구본웅, 이인성, 김종태, 12인의 요절 미술가들을 다루는 시선은 기본적으로 따뜻하다. 만약 이 책을 읽는 누군가가 그런 소망, 강렬하게 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생의 물리적 시간쯤 얼마든지 단축된다 하더라도 거칠 것 없다는 그런 소망을 품은 이라면 감동할 수도 있다. 전쟁의 상처 속에서 미처 개화해보지 못한 이중섭, 세속의 출세길을 잡았으나 치안대원의 분노를 사 억울하게 죽은 이인성, 장애에 대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손상기, 구본웅 그리고 여성으로 산다는 멍에에 질식한 나혜석, 최욱경 등... 우리는 저자 조용훈의 시선으로 효시되고 있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 서화가로 살아간 이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들은 단지 이제 막 알려진 인물들은 아니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요절"이란 공통점으로 묶인 이들에게 감동할 수도 있겠으나 금새 아쉬움을 품게 되리라. 그것은 이들의 삶이 미완성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해석이 아직 미완성인 탓도 있다.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썩지 않을 시신이므로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도 방법이리라. 미완성의 여백이 당신을 끌어당긴다면, 당신의 삶이 아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