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여인들 - 성상, 우상, 신화/ 카트린 칼바이트 지음, 장혜경 옮김/ 여성신문사/ 2001년



아마도 이 책 "20세기 여인들"은 책이 나오자마자 구해서 읽었던 것 같다. 독일의 여성 저널리스트 카트린 칼바이트를 비롯해 11명의 작가가 선정하고 집필한 20세기를 살아간 55인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55명의 여성을 다루다 보니 그 분야가 정치, 정치, 페미니즘, 문학, 영화, 예술, 스포츠를 비롯한 폭넓은 것이 되었다. 총 11개로 분류된 분야별 여성 중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이 아닌 존재들도 끼어 있는 것이 이채로왔다. 나는 그 분류가 이 책이 의도하고는 특별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별도로 소개해보자면, 그것은  남근 중심 사회의 창조된 여성성을 대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을 한데 묶어 "가상세계"라고 한 것이다.

그 주인공들은 "에밀리 - 엑스터시의 정령, 제인 - 남성 허위 의식의 빌미, 삐삐 - 소녀, 소년을 만나다, 바비 - 인형의 꿈, 다테 쿄코 - 환상 속의 사이버 스타"이다. 이 책의 부제가 "성상, 우상, 신화"로서의 여성성 혹은 여성인 것을 감안해 볼 때 자본주의적 삶의 양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20세기 최고의 여성성을 지닌 여성들은 어찌보면 실제 휴머니티를 지닌 여성 못지 않게 이런 물신화되어 있는 가상의 여성이 등장하는 것 역시 매우 그럴듯한 설정이다 싶었다.

이 책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20세기의 대표적 여성들 - 코코 샤넬, 마리 퀴리, 버지니아 울프, 마리아 칼라스  - 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간 역사의 이면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도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최대 특징은 앞서 말한 물신화된 상징으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인물들, 삐삐와 바비인형, 다테 쿄코 등과 페미니즘으로 분류된 실비아 팽크허스트, 베티 프리단, 나왈 엘사다위 같은 인물들에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바비 인형과 다테 쿄코와 같이 물신화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성과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당신은 에밀리를 아는가? "에밀리"란 이름은 참 흔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것이 달리는 은빛 유령이라는 애칭이 붙은 세계 최고급 자동차인 롤스로이스의 본네트에 달린 마스코트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금방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에게만 허용된 부의 상징, 그 부의 상징의 정점에 위치한 마스코트는 바로 아름다운 여인상이었다. 롤스로이스를 소유한 사람에게는 부유함만이 아닌 세계 최고의 아름다움도 함께 소유할 수 있다는 환상을 준다. 우리는 정글을 누비는 포효를 기억한다. 그리고 한 마리의 침팬지와 더불어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 제인을 기억할 수 있다. 타잔은 여러 버전이 있지만 변함없이 이 세 가지 아이콘은 함께 해 왔다. 귀여운 장난꾸러기 '치타'와 '제인'을 말이다. 제인의 역할은 타잔을 문명화(언어를 가르치는)시키는데 있었지만 그녀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제인은 타잔의 완력이 없었다면 정글에서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로서의 소임을 다한다. 그녀는 타잔의 포효와 더불어 정글의 밤을 상상하도록 부추기는 섹스 심볼이자, 타잔의 도움 속에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이다. 타잔은 제인을 통해 비로소 중세 기사도를 구현해낼 수 있었다. 제인은 결국 문명화된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타잔에게 돌아간다. 좋게 말하자면 자연에서의 삶을 택한 것이지만 이 드라마는 은연 중에 제인으로 하여금 야성화된 타잔의 힘에 대한 동경을 드러낸다. 그것은 결국 섹스에의 굴복을 말한다. 여인은 늘 정복당하기를 기다린다는 남성적 섹스 판타지의 극치에 제인은 서 있다.

이 책은 매우 재미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책들에서 늘 일상적으로 발견되는 아쉬움도 대동소이하다. 그 첫번째는 한 인간의 삶을 살펴보기에 이 책 한 권이 내어줄 수 있는 지면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베티 프리단의 삶이 결코 원고지 100매 내외의 짤막한 글로 정리될 수 없음을 안다. (물론, 정리 자체야 흠잡을 수 없지만) 두번째는 하나의 관점 - 페미니즘적인 관점으로 여성이 혹은 여성성이 왜곡당하는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상이라는 소소한 삶의 정치적인 공간에서 여성들이 매일같이 반복학습 당하는 남근중심사회의 세뇌를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점에서 20세기의 여성을 발견하는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 하나하나의 삶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작업을 통해 비로소 20세기와 21세기로 이어지는 여성의 진정한 발견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어울리는 책이라는 것이다.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