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평화통일도시로
한 달쯤 전인 지난 9월 8일 인천발전연구원 주최로 “죽산의 평화통일론과 ‘평화통일도시 인천’의 지향”이라는 제목의 작은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오랫동안 죽산 조봉암 선생을 연구해온 이현주 박사, 동국대 이철기 교수, 인천학연구원의 김창수 박사가 발제자로 나섰고, 인천의 주요시민문화단체 인사 7명이 토론자로 함께 했던 행사였다.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만간 인천에서 개최될 도시축전과 아시안게임을 위해 찾아올 세계인들에게 우리 인천이 보여줄 비전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었다. 속된 말로 ‘명품도시 인천’이란 슬로건으로 세계인들 앞에 서기엔 ‘쪽 팔린다’는 말이었다. 인천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을 설득하고, 더 나아가 감동을 주기 위해선 그만한 명분과 보편성을 가진 비전이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김창수 박사는 “외국인들에게 인천은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왔으며, 외지인들에게는 1950년 9월 15일 단 하루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2000년 인천역사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인천시립박물관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다가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마침 다음날인 9일엔 58주년을 맞이한 인천상륙작전을 재현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사업은 국가가 존속하는 한, 존속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가와 군대의 존재 이유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란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륙작전 당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희생된 민간인 피해자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무관심했다.
외지인들이 즐겨 방문하는 인천의 명소 중 한 곳인 월미공원 입구에는 1,000여 일이 넘게 ‘월미도 미군폭격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유가족들이 농성 중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기 5일 전인 1950년 9월 10일 미군 폭격기 43대가 월미도 지역에 93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해 이 일대를 초토화하면서 최소한 228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당했고, “이들 대부분이 부녀자와 노인이었으며 지금까지 이러한 사실을 거론하는 것이 한미 동맹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기시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어떤 이들에겐 인천이 평화통일의 중심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평화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평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너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전쟁과 함께 했고, 평화보다 전쟁을 먼저 기념하는데 익숙하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대규모 군사작전이 벌어진 곳,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곳이지만 인천엔 전황을 역전시킨 작전과 지휘관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과 웅장한 전쟁기념관만 있지 어디에도 온 가족이 함께 평화를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곳은 찾을 수 없다.
열전과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곳이 인천이었다. 그렇기에 인천 출신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 선생은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목숨을 걸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던 것인지 모른다. 인천이야말로 시대를 앞선 평화통일론의 산실(産室)이었다. 경제발전이란 측면에서도 인천은 그 어느 지역보다 평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곳이다. 냉전의 종식으로 황해가 다시 열리고 대중국 교역의 일번지가 되면서 인천의 물동량이 급속하게 증대되었고, 평화의 공간이 열리면서 인천은 비로소 영종, 강화, 해주, 개성을 잇는 경제적 대사업권인 황해벨트를 꿈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천은 한반도 평화통일도시로,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작은 출발이 인천에 평화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을 ‘평화통일도시’로 탈바꿈시키자는 주장, 이 땅에서 희생당한 주민들의 목소리에 우리 인천시 정부와 시민사회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인천은 전쟁이 아닌 평화로 세계인들에게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인천일보> 2008.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