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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사회과학

최장집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2002)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후마니타스(2002년)


교수, 지식인 최장집 선생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불행히도 그의 학문적 업적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그는 지난 김대중 국민의 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위원에 위촉된 뒤 일부 보수 언론과 여론에 떠밀려 때 아닌 사상검증 열풍에 시달렸다. 과연 최장집 선생은 그런 사상검증을 받아야 할 만큼 위험한 지식인이었던가? 최소한 내가 알고 접해본 그의 저서들에서 사상 검증의 필요성을 느끼게 할 만한 대목은 없었다. 오히려 좌측에 서 있는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너무나 온건한 지식인이다. 그런데도 그는 사상 검증이라는 말도 안되는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해프닝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한 인간이자 지식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통제하려고 드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우측 편향의 시선을 지녔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최장집 선생은 이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출판했다. 지난 2002년 대선의 열기가 그 어느때보다 뜨거웠던 무렵 출판된 이 책을 나는 장장 두 달간 읽고 또 읽었다. 이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어느 한 대목에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은 매우 정교한 솜씨로 우리 민주주의 수준이 왜,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를 풀어 나간다. 이 책은 크게 네 가지 구분을 갖는다. 첫째는 "오늘날 한국민주주의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비판", 둘째는 "한국민주주의가 보수화된 원인에 대한 사적.구조적 기원 분석", 셋째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문제", 넷째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책의 분석과 질문은 책을 덮는 순간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은 우리 사회와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보수주의와 권위주의의 낡은 전통들을 이대로 둘 것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제명과 달리 이 책의 부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라고 달려 있다. 앞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책 이름이 다소 추상적인 것과 달리 이 책의 부제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우리 정치사의 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 책이다. 대개 이런 류의 책들은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독자가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앞 뒤의 맥락과 우리 사회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조금만 관심있게 살펴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는 미덕이 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불량배스러운 보수주의를 향한 최장집 선생의 두툼한 칼날이다.

최장집 교수는 이 책에서 결코 좌파적 이상을 부르짖지 않는다. 어떤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는 아직 좌파적 이상과 이데올로기가 천착하기엔 너무나 경박하며 우편향의 사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장집 선생의 이 책을 따져 읽어본다면 우리 사회가 입으로는 백날 추구하고, 부르짖는 서구 민주주의의 사상적 원천인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전통조차 진지하게 세워진 적이 없는 사회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이 땅엔 진정한 의미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선 적이 없다. 오랜 시간 권위주의 정권들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왔지만, 실제 우리 사회는 단지 "시장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민주공화정의 자유로운 숨쉬기를 방해해왔을 뿐이다.

지난 2002년 연말에 출판된 이 책은 한해를 마감할 무렵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장집 교수를 사상검증해보고자 덤벼들었던 언론사들에 의해 여기저기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물론 이 책은 올해의 책 아니라 그보다 더한 상을 받아도 좋을 만큼 훌륭한 책이다. 아무런 개념없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이들 역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정치 패러다임이 현재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권위주의(독재) 정부에 의존해 온 수구 보수 세력은 권력이라는 실질적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이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민주화가 아닌  '보수적 민주화' 이다. '보수적 민주와' 이후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 권력을 대체할 최고의 권력 기관이 된 존재들은 수구 보수 세력의 기득권을 위해 복무해온 언론 기관들이었다. 언론기관은 기존 수구 보수 세력의 이익은 물론 우익 세력의 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며 우리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가 정치에 반영되는 것을 막고, 외면해 왔다. 그 결과 시민사회의 개혁 욕구는 좌절되었고, 이런 좌절은 여러 경로를 통해 표출되었다. 우리 사회라는 압력솥은 다양한 갈등과 요구로 끓어오르고 있는데 그 모든 출구는 막혀있고, 비등점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조그만 틈만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기세로 뿜어져 나오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바로 지난 대선에서의 '노무현 바람'이었고, '노사모'였다.

우리 사회는 그간의 모든 갈등과 다양한 이해를 해결해줄 정상적인 수단과 도구를 얻지 못했고, 그 방편으로 영웅적 해결사를 갈구했다. 이 '영웅적 해결사'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를 반영하는 절차를 밟고자 하겠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정책과 해결책은 우리가 이념정당에 기대하는 것과 같은 원칙에 따른 정책과 이념에 따른 합리적인 대안이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영웅적 해결사는 정책적 대안이나 이념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평가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둘러싼 갈등의 표출 양상에서 일정한 모션을 취한 댓가로 얻게 된 이미지, 인물에 대한 믿음과 신뢰, 과거 전력으로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된 뒤에야 비로소 사회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정책 대안을 연구하고, 새로운 통치 이념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영웅적 해결사는 애초에 그를 지지한 기대에 부응하기도 어렵고, 안정적인 개혁을 추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예측 가능한 정책이나, 인선보다는 여러 의외적인 결과, 돌출상황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돌출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절차적 합의는 번복되고, 부인되기 마련이다. 결국 보수적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은 대통령 탄핵이란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 책은 물론 이런 상황을 예언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이런 상황이 닥쳐온 것이 그다지 놀랄만한 일도 아니란 사실을 일깨워준다. 문제는 자본주의는 시민사회없이도 가능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성장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그렇게 묻고 있다. 이후 최장집 선생은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공익창출의 안정적 기반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에따라 한국민주주의 위기는 가속화하고 있다. 이념의 다양화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이념적 다양성, 이념으로 구분되는 정당간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경쟁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