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는 내게는 조금, 혹은 아주 특별한 시인이다. 대학생은 아닌데 남들은 대학생인 줄 착각하던 시절에 나는 노가다 뛰는 젊은 막장 인생이었다. 그 무렵엔 왜 영화들도 하나 같이 그런 부류의 영화들이 많았던 건지 몰라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영화들 중에는 방황하는 청춘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참 많았다. 예를 들어 이문열 원작, 곽지균 감독, 정보석, 이혜숙, 배종옥, 옥소리 주인공의 영화 "젊은 날의 초상"이 그랬고, "걸어서 하늘까지", 박광수 감독, 문성근, 박중훈, 심혜진 주연의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 같은 영화들 말이다. 한 시대를 떠받들던 이념이 무너진 시대에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던 셈이다. 어쨌든 내가 실비아 플라스를 알게 되었던 시대가 대략 이무렵이었다.
89년에서 90년 무렵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접했는데,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소설은 중고등학생 때 이미 김성동과 황석영을 뗐는데 시는 여전히 중학생 시절에서 별반 진도를 나가지 못한 상황이었던 터라 여류 시인과 여성 시인의 차이점조차 제대로 깨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시 읽기가 중학생 수준이었다는 말은 김남조와 이해인 정도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말이다(물론 이 분들의 시를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고...다만 여류라는 표현이 주는 딱 그 수준의 감상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듯). 물론 그런 감수성이란 것이 그 무렵 제대로 시를 읽지 않았다면 여류 시인이란 그저 "오, 아름다워라! 세상은"이란 말투라는 식의 오해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만난 여성 시인이 '실비아 플라스'였다. 그러니까 나에겐 최승자나 김혜순 보다 실비아 플라스가 먼저였다. 처음 시집을 읽는 순간 내 반응은 요즘 아이들 식 표현을 빌자면 딱 이랬다. "헉, 이뇬 모야!"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놀라움에 시집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외국 시인의 시를 통해 모던한 여성주의의 시세계를 처음 접했던 거다. 그녀가 처음이었다. 나의 감성과 맞는 여성 시인을 찾아낸 것은... 그 후 나는 고정희, 김혜순, 최승자 등등의 한국 여성 시인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마녀들의 세계에 한 발 들어선 셈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를 다시 만난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남진우 선생이 진행하는 강의였는데, 수업 내용은 꽤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남진우 선생 특유의 시니컬한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물론 걔중에는 그를 핸섬한 시인으로, 샤프하고 시크한 문학평론가로 좋아하던 여학생들도 꽤 있었다만). 어쨌든 그의 수업 시간 중에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란 시를 낭송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꼭 여학생에게 이 시의 낭송을 시켰다. 다소 악취미란 생각도 들긴 했지만 아마 내가 선생이라도 이 시는 반드시 여학생에게 낭송을 시켰을 게다. 사전에 이 시를 접해본 학생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간혹 이 시를 처음 접하는 순진한(?) 여학생들은 이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곤 했다. 이 시의 마지막 행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넌 끝장이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약간의 과장은 어쩔 수 없고) 낭송하는 여학생이 이 대목을 얼마나 리얼하게 낭송해주느냐에 따라 이 시가 죽고 산다. 당신도 한 번 소리내서 읽어보라. 얼마나 리얼할 수 있는지...
실비아 플라스의 마지막 행에 필적할 수 있는 구절은 문학보다는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This is The End>에서 "아버지, 난 당신을 죽이고 싶어. 어머니 난 당신을 밤새도록 사랑하고 싶어. 그건 가슴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정도나 되어야 하지 않을까?(나는 실비아 플라스의 이 시에서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를 엿보기도 했다만...)
솔직히 대학에서 이 시를 낭송해준 여학생과는 그리 친한 편이 아니었지만 이 시를 너무나 맛깔나게 읽어주었기 때문에 한동안 난 그 친구만 보면 이 시 이야기를 하며 '죽여줬다'고 칭찬을 했건 것 같다. 물론 졸업하고 이제는 그 친구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만...
아빠
- 실비아 플라스
이젠 안돼요, 더 이상은
안될 거예요. 검은 구두
전 그걸 삼십 년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어요.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 한 번 쉬지도 재채기조차 못하며.
아빠, 전 아빠를 죽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래볼 새도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요ㅡ
대리석처럼 무겁고, 神으로 가득찬 푸대자루.
샌프란시스코의 물개와
아름다운 노오쎄트 앞바다로
강남콩 같은 초록빛을 쏟아내는
변덕스러운 대서양의 岬처럼 커다란
잿빛 발가락을 하나 가진 무시무시한 彫像
전 아빠를 되찾으려고 기도드리곤 했답니다.
아, 아빠.
전쟁, 전쟁, 전쟁의
롤러로 납작하게 밀린
폴란드의 도시에서, 독일어로
하지만 그런 이름의 도시는 흔하더군요.
제 폴란드 친구는
그런 도시가 일이십 개는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전 아빠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뿌리를 내렸는지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결코 아빠에게 말할 수가 없었어요.
혀가 턱에 붙어버렸거든요.
혀는 가시철조망의 덫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전, 전, 전, 전,
전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전 독일 사람은 죄다 아빤 줄 알았어요.
그리고 독일어를 음탕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유태인처럼 칙칙폭폭 실어가는
기관차, 기관차.
유태인처럼 다카우, 아우슈비츠, 벨젠으로.
전 유태인처럼 말하기 시작했어요.
전 유태인인지도 모르겠어요.
티롤의 눈, 비엔나의 맑은 맥주는
아주 순수한 것도, 진짜도 아니에요.
제 집시系의 선조 할머니와 저의 섬뜩한 운명
그리고 저의 타로 가드 한 벌, 타로 가드 한 벌로 봐서
전 조금은 유태인일 거예요.
전 언제나 아빠를 두려워했어요.
아빠의 독일 空軍, 아빠의 딱딱한 말투.
그리고 아빠의 말쑥한 콧수염
또 아리안족의 밝은 하늘색 눈.
기갑부대원, 기갑부대원, 아, 아빠ㅡ
神이 아니라, 너무 검은색이어서
어떤 하늘도 삐걱거리며 뚫고 들어올 수 없는 十字章(卍)
어떤 여자든 파시스트를 숭배한답니다.
얼굴을 짓밟은 장화, 이 짐승
아빠 같은 짐승의 야수 같은 마음을.
아빠, 제가 가진 사진 속에선
黑板 앞에 서 계시는군요.
발 대신 턱이 갈라져 있지만
그렇다고 악마가 아닌 건 아니에요. 아니,
내 예쁜 빠알간 심장을 둘로 쪼개버린
새까만 남자가 아닌 건 아니에요.
그들이 아빠를 묻었을 때 전 열 살이었어요.
스무 살 땐 죽어서
아빠께 돌아가려고, 돌아가려고, 돌아가 보려고 했어요.
전 뼈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저를 침낭에서 끌어내
떨어지지 않게 아교로 붙여버렸어요.
그리고 나니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어요.
전 아빠를 본받기 시작했어요.
고문대와 나사못을 사랑하고
'나의 투쟁'의 표정을 지닌 검은 옷의 남자를.
그리고 저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그래서, 아빠, 이제 겨우 끝났어요.
검은 전화기가 뿌리째 뽑혀져
목소리가 기어나오질 못하는군요.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전 둘을 죽인 셈이에요.
자기가 아빠라고 하며, 내 피를
일년 동안 빨아마신 흡혈귀,
아니, 사실은 칠년이지만요.
아빠, 이젠 누우셔도 돼요.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POESY > 외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나 아흐마또바 - 이별 (0) | 2011.10.07 |
---|---|
프랜시스 W. 부르디옹 - 빛(Light) (0) | 2011.09.16 |
옥타비오 빠스 - 서로 찾기 (1) | 2011.08.22 |
글로리아 밴더빌트 - 동화(童話) (4) | 2011.06.16 |
미겔 에르난데스 - 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 (0) | 2011.06.02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탄금시인1 (0) | 2011.05.27 |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 잊혀진 여자 (0) | 2011.05.12 |
켄트 M. 키스 - 그럼에도 불구하고(The Paradoxical Commandments) (0) | 2011.04.13 |
푸쉬킨 -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0) | 2011.03.19 |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 바람에 지지 않고 (0) | 2011.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