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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이승연 누드 파문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의 음화(陰畵)


 


1. 역사의 농담 - 그간 "문망"에서 진행된 이승연 논쟁을 정리하며

  지난해부터 올해로 넘어오는 시기에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군 핫이슈는 연예인들의 누드 촬영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승연 씨의 군위안부 누드 파문이 아니었다면 단순히 연예가 핫이슈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문망에서도 지난 2월 13일 <승연 씨는 농담도 잘 하셔...>란 글과 더불어 모두 28개의 게시물이 이와 관련해 올려졌었다. 처음 올렸던 글에서 나는 이승연의 군위안부 누드 파문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했었다. 그것은 이승연의 군위안부 누드가 우리 사회에서 허용될 수 있을 만큼 “일제 하 군위안부 사건”이 “역사청산 - 역사적 종결의 형태로 일단락” 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 청산”이란 말은 엄밀히 따지자면 잘못된 표현이다. 역사는 청산(淸算)되는 것이 아니라 정산(定算)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깨끗이 정리되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뒤, 정의되고, 그에 따라 역사적으로 단죄 받을 것은 단죄되고, 칭송 받을 일은 칭송되는 절차를 거치면서 제 자리를 찾아 우리들의 기억 속에 놓여지는 것을 말한다. “농담(弄談, joke)"은 말의 농담(濃淡)에 의해 좌우된다. 그것이 웃음의 유무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이렇듯 여러 형태의 예술 속에서 자유로운 소재로 등장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둘째. 농의 대상이 사회적, 현실적 강자여야 한다. 셋째. 정산절차를 거쳐 사회적 의미가 확실해 져야 한다. 넷째. 그 사건이 현실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농담의 여러 갈래를 힘의 관계로 다시 정의해보았는데, “풍자(諷刺), 해학(諧謔), 자조(自嘲), 희롱(戱弄), 농락(籠絡), 폭력(暴力)”이 그것이다.

  다시 옮겨 보면...
힘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우리는 풍자(諷刺)라 말하고,
힘없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농담을 해학(諧謔)이라 말하며,
힘없는 사람이 자신을 소재로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것을 자조(自嘲)라 말한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상대로 던지는 농담을 우리는 희롱(戱弄)이라 말하며,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이익을 탐하여 속이고 놀리는 것을 농락(籠絡)이라 말하고,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비웃으며 괴롭히는 것을 폭력(暴力)이라 말한다.


  이에 따라 이승연의 군위안부 누드 파문을 둘러싸고 드러난 여러 정황들이 무엇보다 아직 역사적 청산과정에 들어서지 못한 현재진행형의 사건에 대해 무리하게 예술의 외피를 덮어씌워 상업적 이득을 얻으려 한 행위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나의 전제 중 하나는 언젠가는 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누드 사진집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군위안부 문제가 역사적으로 종결된 시점에서 우리 사회는 이 사건을 곱씹을 수 있을 만한 예술적 창조물들을 생산해낼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안 되는가? 나는 그 문제를 바로 위와 같은 사유로 인해 현재로서는 불가하다는 것이고, 이승연 씨가 접근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 뒤, 이 사건은 이승연과 네띠앙 측의 원칙 없는 대응과 이와 비슷한 정도로 이 사안에 대해 무책임하게 접근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으면서 부각되었다. 다시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한 것이 지난 2월 16일의 <이승연 누드집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것...>란 제목의 글이었다. 나는 이 글에서 최근 유행했던 개그맨 정준하의 유행어 “두 번 죽인다”는 말이 약자에게 무자비한 우리 사회의 잔인함에 기댄 유행어라고 분석하면서 우리 사회와 상업주의 언론이 여성의 누드를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우리 사회는 누드,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해 한편으론 상업적으로 관대한 포르노적인 태도와 동시에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는 잔인하리만치 금욕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2. 이승연 논쟁이 표현의 자유를 말하다 - 새로운 문제 제기

  우리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염려하는 이라면 당연히 이승연에게 주어진 표현의 자유 역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며, 상업주의 언론 자신이 여성의 신체에 대한 상품화를 부추겨왔음을 동시에 비판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했다. 그럼에도 이승연의 군위안부 누드 파문에 대해서 옹호해줄 수 없는 이유를 다시 말했다. 즉, 언론의 천박한 보도 태도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연의 군위안부 누드 파문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들어 인정하자는 주장은 근거 없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미국의 성인 잡지 <허슬러>의 발행인인 래리 플린트의 사례를 들었다. 래리 플린트가 욕보인 대상은 국가라는 우리 사회 최고의 강자인데 비해서 이승연이 욕보인 대상은 우리 사회 최고의 약자라는 것이다(이것이 래리 플린트가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했다는 비판으로부터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란 전제 아래에서).

  이에 대해 지난 2월 20일 <논쟁/ 이승연 누드 파문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가 있었다. 내용을 다시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대전제 : 이승연 화보집은 포르노가 아니다. 사회 고발을 담고 있는 사진들과 비교하여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사전에 아무런 대화 없이 촬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문제이나 그렇다고 일부러 못생긴 여자를 모델로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 제기 1.
위안부 여성들의 치욕적 삶을 세상에 고발하는 순수한 의도로 사진에 담아보는 생각은 사진을 찍는 작가나, 기록에 남는 모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상상으로나마 품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 제기 2.
바람구두님은, 표현의 자유도 분명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기본 권리를 앞설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도 물론 그런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가 여태껏 보아왔던 사회 고발을 담은 모든 사진들의 주인공들(더욱이 퓰리처상이라든가, 세계 저명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사진들의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 그들의 인권을 보장받아왔을까?

   문제 제기 3.
표현의 자유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농락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표현의 자유를 억누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앞세운 채, 사회의 최대 약자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내어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어들였던, 혹은 지금도 벌어들이고 있는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예술 행위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였단 말인가?

   문제 제기 4.
여자의 몸은 표현의 자유 선상에서마저도, 이토록 철저하게 억압되어 있다는 생각에, 같은 여자로서 한없이 우울해진다. 여자의 몸은 애초에 인간의 몸이 아닌가보다. 벗었든 안벗었든 접대부이든 지적인 여교수이든 어린 소녀이든 망가진 할머니이든, 일단 여자의 몸이 고정된 프레임에 담겨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면, 무조건적으로 포르노가 된다. 이건 결코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집단적 시선의 문제인 것이다.”
와 같이 전부 합치면 모두 다섯 개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 물론 이 다섯 개의 문제 제기에 대해 내가 모두 답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 이승연 누드 파문과 포르노그래피

   위의 문제 제기 중 대전제는 이승연 군위안부 누드는 포르노그래피인가? 아닌가?를 묻는데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라고 전제하며 출발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 제기의 가장 큰 오류는 이승연의 누드 화보집을 포르노가 아니라고 규정하는데서 출발한다. 그 문제 제기에 답하기에 앞서 한 장의 사진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1973년 베트남의 종군기자 현콩닉웃(Hyun Cong Nich Ut)이 촬영한 사진 <전쟁의 공포(The Terror of War)>다. 이 사진과 이승연의 누드 사진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문제제기의 핵심이다. 우리들 중 이승연 군위안부 누드의 전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이 사건 혹은 파문의 핵심은 이승연 군위안부 누드의 작품성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촬영되고 유통되는 맥락에서 파악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현콩닉웃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베트남 소녀 킴쿡은 완전 전라의 상태(naked)이고, 홍보용 사진으로 유포된 이승연의 사진에는 도리어 전라 상태가 없었다.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성적(性的) 행위의 묘사를 주로 한 도색적인 영화·회화·사진·소설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이다. 그러나 흔히 에로 영화와 구분되는 포르노 영화는 그것이 실제 삽입성교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분되기도 한다. 즉, 성행위를 연기하는가, 실제로 성행위를 하는가의 차이이다. 그런 리얼리티(사실성, reality)의 맥락에서 킴쿡의 "누드(?)"와 이승연의 "누드"를 보자면 킴쿡의 "누드"가 포르노의 사실성에 더욱 근접해 있다고도 강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콩닉웃의 사진 <전쟁의 공포>를 포르노로 규정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현콩닉웃의 사진을 포르노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포르노의 맥락 속에 단지 옷을 벗었나, 아닌가의 차이, 현실이냐 재현이냐를 뛰어넘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위의 다섯 가지 문제 제기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중요한 차이이다.

   흔히 포르노(porno)라고 약칭되기도 하는 포르노그래피는 그리스어로 창녀를 의미하는 ‘포르네(porne)'와 ’쓰여진 것(graphos)’의 합성어이다. 예술을 예술이게끔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작품(作品)과 공산품(工産品)의 차이를 대량생산이냐 단 하나밖에 없는가로 규정하곤 하지만, 마르셀 뒤샹은 대량생산되는 변기에 자신의 사인을 더해 ‘샘’이라는 작품 - 레디메이드(ready-made), 개념미술(Conceptual Art) - 을 출현시키면서 일반의 그런 생각을 깨뜨렸다. 즉, 예술품은 어떤 예술가의 생산품이 그 자체로 예술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 영역 속에 위치시키는 힘이 서로 우호적으로 작용한 결과 “예술”로 규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힘을 일컬어 ‘제도’라 하고, 그렇게 상호우호적으로 작용하는 행위의 역사를 예술사로 규정한다. 이것은 작가, 비평가, 감상자의 세 주체가 함께 참여한 결과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포르노그래피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포르노의 위치에 규정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포르노그래피를 규정하는 절대적 기준이 없었음을 잘 안다. 포르노를 규정하는 것은 단지 힘을 가진 자들의 검열에 의해 구분되며 이런 근거 역시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해왔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 포르노그래피의 전성기라 생각하기 쉽지만 “포르노그래피의 황금시대”라 불리운 시기는 18세기였다. 이 시기에 사드와 카사노바가 출현했고, 이 시기엔 포르노의 작가도, 비평가도, 감상자도 사회적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엔 종종 정부가 나서서 포르노그래피를 권장했다. 그것은 오늘날 정부가 침략전쟁의 본질을 세계평화와 민주주의, 인권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다른 한 편으로는 민족주의, 경제적 이해타산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복전쟁에 나서는 젊은이들의 무모한 용기에 대한 보답으로 점령한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허용하고 권장하는 표상으로 종종 이용되었다. 이렇듯 때로 정부 차원에서 혹은 사회적 상류층에서 허용되었던 포르노가 사회적 금기의 대상이 된 것은 언제부터이며 왜 그러한가? 그것은 사회적 특권계층의 전유물이던 포르노그래피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산계급의 교육과 경제력 상승으로 인해 그들에게도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주로 활자에 의존하던(즉, 문맹은 감히 접할 수 없는) 포르노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진이 발명되면서 19세기 중엽에는 포르노사진이 제작돼 유포되기 시작한다.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면 겉으로는 포르노를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자신들은 그것을 충분히 즐기는 표리부동한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의 유습이 오늘날까지 남아 포르노와 에로를 구분하는 근거로 된 것 중 하나가 음모(陰毛)의 표현 유무이다.

   1928년 발표된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이탈리아에서는 예술 작품이었으나 영국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오랫동안 포르노였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감독한 밀로스 포먼은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규제하는 포르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포르노가 위협이 못된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다. 중요한건 포르노와 싸우면 그들 스스로는 도덕적인 명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포르노와 매춘과 싸우는 걸 반대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고 마침내는 정부의 공식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변태로 몰아간다. 그 모든 것이 포르노그래피와의 싸움에서 출발하는 거다. 포르노와 싸우면 모두들 박수를 치지. 그러면 그 정부는 의기양양해져서 더 많은 사회 세탁과정을 밟게 되고 그 강도도 점점 강해지는 거다.” 과연 포르노는 실제 사회의 모든 악의 근원인가? 1968년 미국에서는 ‘외설과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위원회’를 조직해 19명의 과학자와 20명의 스탭들로 구성해 이에 대해 조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성에 대한 흥미는 극히 당연한 것으로 건강에도 이롭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성에 대하여 보다 솔직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하였고, 성인에 대한 포르노그래피의 판매 ·진열 ·배부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모두 폐기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고 하는 덴마크, 스웨덴, 영국 등은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규제를 풀었고, 덴마크 등의 나라에서는 포르노그래피 규제가 해제된 뒤 성범죄가 이전의 3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미국의 성범죄자들 중 많은 수가 10대 때 포르노그래피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 18%의 사람은 에로틱한 물건을 소지하여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4. 문제 제기에 대한 답변과 동의

   앞서 나는 위의 다섯 가지 문제 제기가 범한 가장 큰 오류를 이승연의 누드 화보집에 대해 “포르노가 아니다”로 규정하고 출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만약, 문제 제기의 대상이 나 한 사람으로 국한된 것이라면 나는 이승연 누드 화보집에 대해서 포르노라고 규정한 적이 없으므로 잘못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우리 사회적인 맥락에서 본 것이라면 앞서 이미 말한 바 있는 것처럼 그것을 포르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 속에서 산출된 것이므로 포르노그래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아마 애초의 문제 제기자가 원하지 않은 결론일 것이다. 즉, 이것은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전제로 출발하면 안 되는 상황이며 그것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기엔 적당하지 않은 사례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 자체로 이승연 누드 파문을 바라보는 포르노적 시선을 용납하며 출발하는 문제제기가 될 것이니 말이다.

   문제제기1)의 “군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하여 사진을 찍고 싶은 순수한 의도를 품으면 안 되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전제 중 하나로 모델의 미추를 말하는 것은 사회의 폭력적 시선에 대항하면서 이미 그 시선을 의식하고, 함몰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고발을 목적으로 한 의도라면 모델 자체의 미모는 굳이 언급될 필요가 있을 만큼 중요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문제 제기 2)에서 표현의 자유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앞설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회고발을 담은 모든 사진의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 그들의 인권을 보장받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런 식의 접근이 앞서 현콩닉웃의 사진 <전쟁의 공포>와 이승연의 누드를 동일선상에 놓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 생각한다. 얼핏 보면 사진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고발한다는 맥락에서 같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는 현장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담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을 회상하여 재현하는 것이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사진 예술이 재현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해보이지만, 동시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만약 문제 제기자에게 어린이 성폭행에 대한 증언과 사건의 검증을 위해 이 어린이에게 다시 범죄의 현장을 찾아 성폭행자와 대면시켜 그 행위를 재현해보도록 할 정도의 용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혹여 몰라도 이 두 가지 행위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회고발을 담은 사진 속 주인공은 이미 불합리한 행위에 노출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며, 작가는 이를 담아 보도함으로써 더 이상의 행위가 진행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많은 종군기자들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전장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취재에 임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월급을 받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들이 보람을 느끼며 하는 일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강도나 도둑들도 그럴 수 있는 일이아닌가? 우리는 이 두 가지 일이 결코 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문제 제기 3과도 관련이 있다.

   문제 제기 3)이 담고 있는 논리적 요소는 말 자체로는 매우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제기가 규정하고 있는 구체적인 작품이 없으므로, 논리만으로는 틀렸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져보면 이 논리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 쉽게 드러난다. “실제 어떤 작품이 그러한지 실례를 들어 언급해주기 바란다.” 이것은 작품과 작가에 대해 각각 개별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속에는 표현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의 권리가 서로 대치되면서도 사회적 합의 속에서 적절한 위치를 잡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문제 제기 4) “여자의 신체는 벗었든 안 벗었든 어느 경우에나 무조건적인 포르노의 대상이 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우나 - 그렇다면 앞서 말한 베트남 소녀 킴쿡의 벌거벗은 몸조차도 포르노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며, 만약 모든 여성의 신체가 무조건 포르노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질 아무런 구분 근거도 가질 수 없게 된다 - “이건 결코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집단적 시선의 문제”라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답변을 이어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문제 제기에 대하여 답변을 쓰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5. 부도덕을 규탄하는 사회가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처음의 결론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전면적인 부정을 하지 않는다. 포르노그래피에는 사드 후작이 꿈꾸었던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이중적 성 가치관과 부도덕함에 대한 전복적인 가치관과 통렬한 비판, 자유가 숨어 있기도 하다. 이승연의 누드엔 앞서 “예술가의 생산품이 그 자체로 예술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회적 영역 속에서 예술로 위치시키는 힘”을 지니지 못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것이 외설이냐, 예술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이 전혀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내가 이것을 농락을 넘어선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때로 동정이나 따뜻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더욱 세심한 이해와 동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이 전혀 무지했거나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돕고자 한다는 이들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그들은 왜 그토록 좋은 의도를 가졌으면서도 상대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걸까? 그것은 바꿔 말해서 그들 자신에게 설득할 의사가 없었거나 자신들조차 상대를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 사회 기층에 깔린 약자에 대한 잔인하고도, 자극적인 강간판타지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대상과 시간을 통해 분출된 사건이었다.

   이승연 사건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준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말대로 포르노그래피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공격하는 대상이 제 아무리 부도덕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공격하는 측의 도덕성이나 올바름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언론사를 포함해서 우리 사회의 이중적 성도덕주의자들이 귀담아 들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