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임!
정은임!
정은임!
정은임!
정은임!
내가 광주의 진실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나는 현재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아마 최루탄 냄새가 서울 변두리 외곽에서도 골진 남한산성 밑의 가난한 이웃들이 산을 등지고 모여 살던 우리 동네까지 퍼져오던 시절이었다는 것이 그 무렵의 지난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일 겁니다. 이듬해엔 "86, 88"이라고 우리가 늘 구호처럼 힘주어 이야기하던 "86 아시안게임"이 있는 해였습니다. 별로 헤아려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그 무렵 나는 중학생이었고, 매일매일 집단체벌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공부였기 때문에 나는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 하는 학생이었지만, 집단체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해진다는 점에서 평등주의였겠지요.
내가 폭력에 혹은 남성다움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을 겁니다. '고통과 슬픔에 익숙해질 수도 있다, 사람이란....' 세상 그 무엇에든 익숙해진다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매일 얻어터지면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울 한복판에 있다가 변두리로 이전해온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들 역시 변두리 학생들에 적응하기 어렵던 시절이고, 우리들 역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던 학생들만 가르치던 선생님들에게 적응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는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아이들이었고, 변두리의 아이들은 중심에 서 있는 아이들보다 더 먼 거리를 달려야 중심의 속도에 맞출 수 있는 법이죠.
내 개인적인 삶의 역사에서 그 시기들은 고통에 고통을 더한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고향 없는 세대의 부모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내가 그보다 몇 년 뒤 "이별 없는 세대"의 보르헤르트를 만나지 못했더라도 나의 삶이 그다지 달라지진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 어떤 영혼과도 정직하게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암흑 속에 갇혀 있는 편이 나 자신을 위해 훨씬 나은 일일 것이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정말 사춘기 소년의 순수한 궁금증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사태'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학살'이라 불리웠던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품었습니다. 한동안 암흑 속의 자아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춘기 소년이 최초로 세상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겁니다.
나는 광주에서 전학 온 친구에게 그날의 진실을 물었고, 그는 무엇이 두려운지 학교 운동장 저 끝까지 나를 끌고가 자기가 아는 형도 죽었다며, 그 자신으로서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을 기억나는 대로 일러주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시작해서 1980년 5월 27일 상황종료된 그 사건에 대해 나는 얼마 뒤 내가 다니던 성당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나돌던 "광주비디오"를 통해 다시금 그 날의 일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독일 ZDF방송의 비디오로 기억되는 그 날의 경험에서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학교에서 배운 것 말고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세상이 진실이 아니란 것이었지요.
그것은 내가 3살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 이후 최초의 각인(覺印)이었습니다. "Le monde ce n’est pas ce que non voynez. 세상은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내용을 갖고 있다." 1980년 5월 26일 광주에는 아침 한 때 비가 내린 뒤 개었습니다. 그날 19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며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광주 도청에서 귀가시켰습니다. 24시 00분을 기해 광주시 전역의 전화가 끊겼습니다. 광주의 마지막날인 1980년 5월 27일 화요일 새벽3시 세상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한 여성이 애절하게 끊길 듯 끊길 듯 위태로운 목소리로 가두 방송에 나섰습니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비디오에는 간간이 총성 같은 소리들이 섞여 들렸습니다. 이날 새벽 4시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 포위했고, 정확하게 10분 뒤 계엄군 특공대는 도청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모두 종료된 것은 한 시간 뒤인 5시 10분이었습니다. 시민 여러분을 외치던 애절한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계엄군은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6시부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시 50분 다시 광주 시내 전역의 통화가 재개되었지요.
나는 1986년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때 내 기억 속에 선연하게 남아있는 여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교사 자격을 얻었으나 정식 교사로 부임한 것이 아니라 학교측에서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임시 교사(마치 대학의 시간 강사처럼)로 온 분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분이었죠. 자기는 운동권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대개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그러했듯 누나뻘이라면 누나뻘인 그 선생님은 인기가 좋았습니다. 내가 역사과목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마 그 분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시험 문제가 사지선다 단답형으로 출제될 때 그 분은 끝 문제 하나는 주관식으로 출제했습니다. 학생들이 항의하자 그건 점수에 포함시킬 시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내가 객관식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을 쓰기 보다는 내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그 분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으리란 사실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겁니다.
그 덕에 나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초대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당시 광장동의 어느 아파트에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사는 집에 초대된 일도 처음이지만, 여자가 혼자 쓰는 방에 들어간 것도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아파트란 살림 구조의 집에 가본 것도 나로서는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엔 아파트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으리으리하게 보였고, 나는 그 선생님에게 은연 중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대로 살지 못할 것이란 예감 혹은 그저 나보다 무척이나 잘 사는 사람으로 여겼던 사람들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일종의 분노 탓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 집에서 광주 사진집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집에 두 권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내 서재 가장 높은 곳, 그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그 책을 밀봉해 두고 있습니다. 그냥 가지고만 있는 겁니다.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1987년을 경험했습니다. 1980년을 살았던 어느 세대에게 1980년이란 해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거쳐가는 몇해몇해의 그런 감각이 아니라 너무나도 특별한 한 해였다면, 나에게 1987년은 내 인생의 가장 특별한 한 해로 기억됩니다. 나는 그해 6월과 12월을 살아냈습니다. 12월 대선이 끝나고 느꼈던 패배감이 비로소 날 세상의 비의(秘意)에 한 걸음 다가서게 했습니다. 그 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의 명동성당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며 나는 잠시 울었더랬죠.
그 선생님은 얼마 뒤 학교를 떠났습니다. 아마도 88 올림픽을 앞둔 어느 무렵이었을 겁니다. 학생 주임이나 교감에게 욕을 먹고 울면서 교무실을 박차고 나갔다는 소문도 들렸고, 잠시 후 결혼한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평소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당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아마 분명히 나도 그 결혼식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겁니다. 이유야 무엇이었든 나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척이나 옹졸한 인간이자, 그때에도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나는 그 선생님이 결혼 뒤 남편과 유학 갈 거란 소문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 선생님 - 분명 한 때는 무척이나 짝사랑했을 - 에게도 버림 받은 기분이 들어서 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 뒷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죠. 나는 선생님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고, 그 뒤로 선생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분이 그립지만 만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입니다. 대통령 선거는 5년 마다 되풀이 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딱지 떨어져 나간 상처에 소금을 뿌린 지렁이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1992년 나는 몇 년간의 방황을 마치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고, 그간 날 길러주던 사람들과 이별했습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났으나 나에겐 이미 어머니가 필요 없었습니다. 나는 늦게 잠들었고, 밤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밤은 괴로운 시간이거나 혹은 치유의 시간일 겁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나 도리어 세상에게 변화를 강요받는 사람들은 과연 고통스러운 사람들일까? 아니면 불행한 사람들이었을까요?
1980년대를 살았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 내가 고통스러워하던 그 시절에도 너무나 행복했을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정은임이 처음 영화 음악을 진행하던 1992년 11월 2일부터 그가 방송을 시작하기 전부터 눈물을 흘렸는지 이미 목이 메이기 시작한 마지막 방송을 시작한 1995년 4월 1일... 우습게도 그녀가 마지막 방송을 내보낸 그날은 만우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들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어떤 이들에겐 그날들, 그 시절들이 봄날 한 때 비처럼 흩날리던 벚꽃잎처럼 선연하게 기억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겐 그저 스쳐가는 봄날 한 때의 지루한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 시절 우리들은 모두가 아팠고 외로왔습니다. 나에겐 나의 이유로 아팠고, 너는 너의 이유로 아팠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방송을 들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그의 멘트를 귀담아 듣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혹은 우리는 고독했고, 외로왔고, 쓸쓸했습니다. 그리고 고립되어 있었죠. 마치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점령지에서 봉기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저항운동가처럼 혹은 저항은 꿈도 꿀 수 없어 지하 골방에 숨어든 배고픈 유태인이 잘 잡히지 않는 BBC라디오의 전파를 수신하듯 그렇게 정은임을 들었습니다.
14대 대선 무렵 나는 내가 행할 수 있었던 최초의 투표권을 포기했습니다. 선거로 변화할 수 없다고 믿었고, 정말 나를 대변해줄 수 있는 정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혁명은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지만 혁명은 가능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참가했건 그렇지 않았건 선거에서는 패배했고, 세상은 시끄러웠으나 나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1차 북핵위기, 걸프전, 그리고 조문파동..... 마치 내일 당장이라도 북진통일을, 흡수통일이라도 할 것 같던 시절을 살면서도 나는 시큰둥함 속에서, 냉소 속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아쉬울 게 별로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 울부짖는 대학생도 내 눈엔 보이지 않았고, 거리를 달리는 데모 행렬도 내 눈엔 그저 먼산의 불이었습니다. 나는 아팠고, 아팠고, 아픕니다. 세상 모든 존재들을 저주합니다. 결국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남을 딛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시스템 속에 안주한 벌레 같은 이들이라고 당신들을 저주했습니다. 이 습관은 나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는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으며 내 마음을 달랜 걸까요? 글쎄... 나는 이미 예전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아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정은임의 그런 진지함이 싫었을 겁니다. 마치 고등학생 시절 만났던 그 역사 선생님이 라디오 방송실에 앉아서 그렇게 "울지마라", "힘내라."며 방송 멘트를 날리는 것처럼 들렸을 겁니다. 라디오를 향해 침을 뱉어 주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의식있는 척 하지 말라"고 나는 그렇게 감자를 먹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 그의 방송을 듣노라면 고등학교 시절 강원도 홍천으로 동아리 MT를 갔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밤 사이 선생님과 함께 "아침이슬, 상록수, 그 날이 오면"을 부르며 술잔을 기울였는데, 밤사이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급하게 텐트를 걷고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나는 낯선 여자의 품 안에서 잠들었었습니다. 비에 젖은 개처럼 오들거리며 잠든 저를 포근하고, 따뜻하게 덮어주던 사람이 있었죠. 정은임의 방송에는 그렇게 내 마음의 상처들을 기우고, 따뜻하게 덮어주는 온기가 있었습니다.
정은임의 방송이 지닌 힘은 진실함에 있었을 겁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건 진심이구나'란 걸 알았죠. 그럼에도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그건 과거 고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느꼈을 법한 배신이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나는 버림받는 일이 두려웠습니다. 나의 기대와 희망이 버림받는 일이 두려웠고, 두 번 다시 그런 버림을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방송에서 "Debout ! les damnes de la terre, Debout ! Les forcats de la faim."이 들려와도,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노래가 들려와도 한 번 움츠러든 몸은 움직일 줄 몰랐고, 한 번 닫힌 마음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주 4.3항쟁을 추모하고, 나와 동갑내기였던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그녀가 목이 매이도록 울먹이는 데도 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광주의 마지막 밤에 누가 광주 도청으로 달려갔는가? 그날 87년의 거짓말 같은 상황 속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었던 그날 누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던가?
전에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독일 튀링겐주 바이마르시에서 북서쪽으로 7km정도 떨어진 숲 언덕에 세워진 "부헨발트(Buchenwald)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세운 최초(1937년), 최대의 수용소 중 하나였습니다. 이 수용소는 북으로 작센하우젠, 남으로는 다하우에 있던 집단수용소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엔 악명 높은 가스실은 없었지만 나치친위대 위생학 연구소가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고, 하루 12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가해 매달 수백명 이상이 숨져간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수용된 유태인들 중에서 2만 6천여 명이 가혹한 노동과 생체실험,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연합군이 이곳을 점령한 뒤 이곳의 끔찍한 실상을 목격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는 친위대는 아무리 말단 병사라도 포로로 잡지 말자는 묵계가 수립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인근의 독일 시민들에게 강제로 이곳 수용소를 견학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수많은 독일 시민들이 부헨발트 수용소를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몰랐다."고 "나는 정말 이곳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지 몰랐다"고...
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바로 자기들이 사는 도시 인근에서 벌어진 일인데 어떻게 몰랐을 수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렇다." 나도 그랬을 거라고 답했습니다. 그들도 알았을 거라고...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도 우리가 몰랐을리 없다고. 오늘날 이라크 팔루자와 아부 그라이브에서, 아니 이라크 전역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우리가 모르지 않지만, 우리가 침묵하는 것처럼 우리가 몰랐을리 없다고 말입니다. 지난 2004년 5월 1일 미국 대통령 부시가 이라크전쟁의 승리를 선언한지 만1주년 되는 날 전세계 주요 언론은 미군이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 수감된 이라크군 포로들에게 끔찍한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는 사실을 주요소식으로 다뤘습니다.
방송을 통해 공개된 사실들을 보면 두들겨 맞은 포로, 검은 두건에 씌인 체 전기 고문의 협박을 받는 포로, 벌거벗겨진 채 군견 세퍼드의 위협을 받으며 층층이 쌓인 포로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성고문을 암시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2004년 5월 28일의 조사결과 보도에 따르면 미군이 이라크 여성 포로를 조직적으로 강간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떤 여성은 하루에 17차례나 강간을 당했으며, 또 다른 여성은 남편 앞에서 미군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자살했으며, 강간 끝에 임신한 여성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라크 주둔 연합군 대변인인 마크 키미트 소장은 이런 사실을 부인했으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포로학대 사태를 조사한 안토니오 타구바 미군 소장의 보고서에는 따르면 이라크 여성 포로를 미군이 강간한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시 정부는 이런 사태를 일부 몰지각한 병사들의 일탈행위로 치부하려 했지만, 2004년 5월 24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최신호에 따르면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대는 ‘코퍼 그린’이라고 불리는 비밀작전계획에 따른 것이었다고 비밀작전계획의 존재를 폭로했습니다. 이 작전계획은 럼스펠트 국방부장관이 사실상 만든 것이며,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승인을 받았고, 부시 대통령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공영 ARD 방송에 따르면 미군은 어린이들도 가두고 고문했으며, 아예 어린이구금시설도 따로 운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에게 세상은 여전히 고통입니다.
정은임의 방송에 내가 공명(共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설익은 존재였기 때문 일 겁니다. 내가 공명했던 건, 나와 동시대를 살면서 방송사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하고, 그저 앵무새처럼 쓰여 있는 멘트를 읽어야 했던 설익은 87학번 여대생의 마음, 세상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자기 앞에 주어진 길에서 조금씩 이탈해가는 모습을 보이던 바로 그 정은임이란 존재였기 때문일 겁니다. 정은임을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그도 언젠가는 타협해갈 것이라 섣부르게 짐작하던 나의 짐작이 맞지는 않았습니다. 맞지 않았으나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영화음악 종영과 함께 몇몇 프로그램을 오가며 영화 코너에 단골로 얼굴을 비추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1998년, 결혼하면서 유학길에 올랐었죠. 아들 하나를 낳고, 정은임이 돌아왔습니다. 시니컬한 독설만 내뱉던 나에게 어떤 선배는 말했습니다. "아이를 낳아라! 그것도 가능한한 많이 그러고도 네가 변하지 않으면 널 인정하마."하고... 그 선배는 내게 독설 아닌 독설을 내 뱉었지만, 정은임은 말합니다.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입으로는 사회주의를 말하면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과외를 시키고, 고급 사립학교에 집어넣지 못해 안달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잃어버린 사상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아프고 슬펐던 건 잃어버린 사상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면서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여자를 잃어버린 뒤부터 사랑하게 된다"던가? 나는 얼마전 어떤 이에게 이런 내용의 대책없는 메일을 띄운 적이 있습니다.
저는 평생에 걸쳐 한 가지 의문에 사로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면 이 아픈 세월들 혹은 상처을 견뎌낼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저에겐 커다란 결핍이 있습니다. 그걸 채웠어야만 할 시기에 채우지 못했기에 제 마음은 불구의 사내가 되어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그래요. 제가 못난 사내라는 거 제가 잘 압니다. 그런 제가 저도 싫습니다. 그런 거 아무리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다들 고마운 덕담 한 마디 해주고 사라질 거란 거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정말 묻고 싶어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누군가를 정말 열렬히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아프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나요?
사랑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데에는 어떤 믿음 - 그것이 인간에 대한 믿음 - 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거짓말장이 사내입니다. 나는 인간을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더이상 배신당할 염려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떠나 보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짓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떠난 뒤에야 그녀의 목소리가 내가 그토록 가슴 아프게 들었던 그 목소리와 겹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린 시절 제가 들었던 1980년 5월 27일 화요일 새벽3시. 세상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 광주의 마지막 밤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걸 말입니다. 정은임! 그 사람 역시 네모지게 작은 박스 안에 고립된 체 그토록 애절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음을 나는 이제사 깨달았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때 늦습니다. <2004-08-05>
정은임!
정은임!
정은임!
정은임!
내가 광주의 진실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의 일이었습니다. 그해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나는 현재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아마 최루탄 냄새가 서울 변두리 외곽에서도 골진 남한산성 밑의 가난한 이웃들이 산을 등지고 모여 살던 우리 동네까지 퍼져오던 시절이었다는 것이 그 무렵의 지난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일 겁니다. 이듬해엔 "86, 88"이라고 우리가 늘 구호처럼 힘주어 이야기하던 "86 아시안게임"이 있는 해였습니다. 별로 헤아려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그 무렵 나는 중학생이었고, 매일매일 집단체벌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공부였기 때문에 나는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 하는 학생이었지만, 집단체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해진다는 점에서 평등주의였겠지요.
내가 폭력에 혹은 남성다움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을 겁니다. '고통과 슬픔에 익숙해질 수도 있다, 사람이란....' 세상 그 무엇에든 익숙해진다는 걸 나는 알았습니다. 매일 얻어터지면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울 한복판에 있다가 변두리로 이전해온지 얼마 안 되어 선생님들 역시 변두리 학생들에 적응하기 어렵던 시절이고, 우리들 역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던 학생들만 가르치던 선생님들에게 적응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는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아이들이었고, 변두리의 아이들은 중심에 서 있는 아이들보다 더 먼 거리를 달려야 중심의 속도에 맞출 수 있는 법이죠.
내 개인적인 삶의 역사에서 그 시기들은 고통에 고통을 더한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고향 없는 세대의 부모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내가 그보다 몇 년 뒤 "이별 없는 세대"의 보르헤르트를 만나지 못했더라도 나의 삶이 그다지 달라지진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 어떤 영혼과도 정직하게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암흑 속에 갇혀 있는 편이 나 자신을 위해 훨씬 나은 일일 것이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정말 사춘기 소년의 순수한 궁금증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사태'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학살'이라 불리웠던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품었습니다. 한동안 암흑 속의 자아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춘기 소년이 최초로 세상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 겁니다.
나는 광주에서 전학 온 친구에게 그날의 진실을 물었고, 그는 무엇이 두려운지 학교 운동장 저 끝까지 나를 끌고가 자기가 아는 형도 죽었다며, 그 자신으로서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을 기억나는 대로 일러주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시작해서 1980년 5월 27일 상황종료된 그 사건에 대해 나는 얼마 뒤 내가 다니던 성당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나돌던 "광주비디오"를 통해 다시금 그 날의 일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독일 ZDF방송의 비디오로 기억되는 그 날의 경험에서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학교에서 배운 것 말고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세상이 진실이 아니란 것이었지요.
그것은 내가 3살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경험 이후 최초의 각인(覺印)이었습니다. "Le monde ce n’est pas ce que non voynez. 세상은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내용을 갖고 있다." 1980년 5월 26일 광주에는 아침 한 때 비가 내린 뒤 개었습니다. 그날 19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며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광주 도청에서 귀가시켰습니다. 24시 00분을 기해 광주시 전역의 전화가 끊겼습니다. 광주의 마지막날인 1980년 5월 27일 화요일 새벽3시 세상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한 여성이 애절하게 끊길 듯 끊길 듯 위태로운 목소리로 가두 방송에 나섰습니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비디오에는 간간이 총성 같은 소리들이 섞여 들렸습니다. 이날 새벽 4시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 포위했고, 정확하게 10분 뒤 계엄군 특공대는 도청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모두 종료된 것은 한 시간 뒤인 5시 10분이었습니다. 시민 여러분을 외치던 애절한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계엄군은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6시부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시 50분 다시 광주 시내 전역의 통화가 재개되었지요.
나는 1986년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때 내 기억 속에 선연하게 남아있는 여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교사 자격을 얻었으나 정식 교사로 부임한 것이 아니라 학교측에서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임시 교사(마치 대학의 시간 강사처럼)로 온 분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분이었죠. 자기는 운동권은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대개의 남자 고등학생들이 그러했듯 누나뻘이라면 누나뻘인 그 선생님은 인기가 좋았습니다. 내가 역사과목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마 그 분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시험 문제가 사지선다 단답형으로 출제될 때 그 분은 끝 문제 하나는 주관식으로 출제했습니다. 학생들이 항의하자 그건 점수에 포함시킬 시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내가 객관식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을 쓰기 보다는 내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그 분의 마음에 들고 싶어 했으리란 사실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일 겁니다.
그 덕에 나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초대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당시 광장동의 어느 아파트에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사는 집에 초대된 일도 처음이지만, 여자가 혼자 쓰는 방에 들어간 것도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아파트란 살림 구조의 집에 가본 것도 나로서는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엔 아파트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으리으리하게 보였고, 나는 그 선생님에게 은연 중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대로 살지 못할 것이란 예감 혹은 그저 나보다 무척이나 잘 사는 사람으로 여겼던 사람들에 대해 내가 품고 있던 일종의 분노 탓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 집에서 광주 사진집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집에 두 권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내 서재 가장 높은 곳, 그 누구의 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그 책을 밀봉해 두고 있습니다. 그냥 가지고만 있는 겁니다.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1987년을 경험했습니다. 1980년을 살았던 어느 세대에게 1980년이란 해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거쳐가는 몇해몇해의 그런 감각이 아니라 너무나도 특별한 한 해였다면, 나에게 1987년은 내 인생의 가장 특별한 한 해로 기억됩니다. 나는 그해 6월과 12월을 살아냈습니다. 12월 대선이 끝나고 느꼈던 패배감이 비로소 날 세상의 비의(秘意)에 한 걸음 다가서게 했습니다. 그 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의 명동성당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며 나는 잠시 울었더랬죠.
그 선생님은 얼마 뒤 학교를 떠났습니다. 아마도 88 올림픽을 앞둔 어느 무렵이었을 겁니다. 학생 주임이나 교감에게 욕을 먹고 울면서 교무실을 박차고 나갔다는 소문도 들렸고, 잠시 후 결혼한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평소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당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아마 분명히 나도 그 결혼식에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겁니다. 이유야 무엇이었든 나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척이나 옹졸한 인간이자, 그때에도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나는 그 선생님이 결혼 뒤 남편과 유학 갈 거란 소문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 선생님 - 분명 한 때는 무척이나 짝사랑했을 - 에게도 버림 받은 기분이 들어서 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 뒷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대로죠. 나는 선생님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고, 그 뒤로 선생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분이 그립지만 만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입니다. 대통령 선거는 5년 마다 되풀이 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딱지 떨어져 나간 상처에 소금을 뿌린 지렁이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1992년 나는 몇 년간의 방황을 마치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고, 그간 날 길러주던 사람들과 이별했습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났으나 나에겐 이미 어머니가 필요 없었습니다. 나는 늦게 잠들었고, 밤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밤은 괴로운 시간이거나 혹은 치유의 시간일 겁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나 도리어 세상에게 변화를 강요받는 사람들은 과연 고통스러운 사람들일까? 아니면 불행한 사람들이었을까요?
1980년대를 살았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 내가 고통스러워하던 그 시절에도 너무나 행복했을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정은임이 처음 영화 음악을 진행하던 1992년 11월 2일부터 그가 방송을 시작하기 전부터 눈물을 흘렸는지 이미 목이 메이기 시작한 마지막 방송을 시작한 1995년 4월 1일... 우습게도 그녀가 마지막 방송을 내보낸 그날은 만우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들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어떤 이들에겐 그날들, 그 시절들이 봄날 한 때 비처럼 흩날리던 벚꽃잎처럼 선연하게 기억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겐 그저 스쳐가는 봄날 한 때의 지루한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 시절 우리들은 모두가 아팠고 외로왔습니다. 나에겐 나의 이유로 아팠고, 너는 너의 이유로 아팠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방송을 들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그의 멘트를 귀담아 듣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혹은 우리는 고독했고, 외로왔고, 쓸쓸했습니다. 그리고 고립되어 있었죠. 마치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점령지에서 봉기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저항운동가처럼 혹은 저항은 꿈도 꿀 수 없어 지하 골방에 숨어든 배고픈 유태인이 잘 잡히지 않는 BBC라디오의 전파를 수신하듯 그렇게 정은임을 들었습니다.
14대 대선 무렵 나는 내가 행할 수 있었던 최초의 투표권을 포기했습니다. 선거로 변화할 수 없다고 믿었고, 정말 나를 대변해줄 수 있는 정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혁명은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지만 혁명은 가능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참가했건 그렇지 않았건 선거에서는 패배했고, 세상은 시끄러웠으나 나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1차 북핵위기, 걸프전, 그리고 조문파동..... 마치 내일 당장이라도 북진통일을, 흡수통일이라도 할 것 같던 시절을 살면서도 나는 시큰둥함 속에서, 냉소 속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아쉬울 게 별로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 울부짖는 대학생도 내 눈엔 보이지 않았고, 거리를 달리는 데모 행렬도 내 눈엔 그저 먼산의 불이었습니다. 나는 아팠고, 아팠고, 아픕니다. 세상 모든 존재들을 저주합니다. 결국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남을 딛고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시스템 속에 안주한 벌레 같은 이들이라고 당신들을 저주했습니다. 이 습관은 나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는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으며 내 마음을 달랜 걸까요? 글쎄... 나는 이미 예전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아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정은임의 그런 진지함이 싫었을 겁니다. 마치 고등학생 시절 만났던 그 역사 선생님이 라디오 방송실에 앉아서 그렇게 "울지마라", "힘내라."며 방송 멘트를 날리는 것처럼 들렸을 겁니다. 라디오를 향해 침을 뱉어 주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의식있는 척 하지 말라"고 나는 그렇게 감자를 먹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 그의 방송을 듣노라면 고등학교 시절 강원도 홍천으로 동아리 MT를 갔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밤 사이 선생님과 함께 "아침이슬, 상록수, 그 날이 오면"을 부르며 술잔을 기울였는데, 밤사이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급하게 텐트를 걷고 귀가하던 버스 안에서 나는 낯선 여자의 품 안에서 잠들었었습니다. 비에 젖은 개처럼 오들거리며 잠든 저를 포근하고, 따뜻하게 덮어주던 사람이 있었죠. 정은임의 방송에는 그렇게 내 마음의 상처들을 기우고, 따뜻하게 덮어주는 온기가 있었습니다.
정은임의 방송이 지닌 힘은 진실함에 있었을 겁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건 진심이구나'란 걸 알았죠. 그럼에도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그건 과거 고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느꼈을 법한 배신이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나는 버림받는 일이 두려웠습니다. 나의 기대와 희망이 버림받는 일이 두려웠고, 두 번 다시 그런 버림을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방송에서 "Debout ! les damnes de la terre, Debout ! Les forcats de la faim."이 들려와도,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노래가 들려와도 한 번 움츠러든 몸은 움직일 줄 몰랐고, 한 번 닫힌 마음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주 4.3항쟁을 추모하고, 나와 동갑내기였던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그녀가 목이 매이도록 울먹이는 데도 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광주의 마지막 밤에 누가 광주 도청으로 달려갔는가? 그날 87년의 거짓말 같은 상황 속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었던 그날 누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던가?
전에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독일 튀링겐주 바이마르시에서 북서쪽으로 7km정도 떨어진 숲 언덕에 세워진 "부헨발트(Buchenwald) 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세운 최초(1937년), 최대의 수용소 중 하나였습니다. 이 수용소는 북으로 작센하우젠, 남으로는 다하우에 있던 집단수용소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엔 악명 높은 가스실은 없었지만 나치친위대 위생학 연구소가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고, 하루 12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가해 매달 수백명 이상이 숨져간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수용된 유태인들 중에서 2만 6천여 명이 가혹한 노동과 생체실험,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연합군이 이곳을 점령한 뒤 이곳의 끔찍한 실상을 목격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는 친위대는 아무리 말단 병사라도 포로로 잡지 말자는 묵계가 수립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인근의 독일 시민들에게 강제로 이곳 수용소를 견학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수많은 독일 시민들이 부헨발트 수용소를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몰랐다."고 "나는 정말 이곳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지 몰랐다"고...
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바로 자기들이 사는 도시 인근에서 벌어진 일인데 어떻게 몰랐을 수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렇다." 나도 그랬을 거라고 답했습니다. 그들도 알았을 거라고...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도 우리가 몰랐을리 없다고. 오늘날 이라크 팔루자와 아부 그라이브에서, 아니 이라크 전역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우리가 모르지 않지만, 우리가 침묵하는 것처럼 우리가 몰랐을리 없다고 말입니다. 지난 2004년 5월 1일 미국 대통령 부시가 이라크전쟁의 승리를 선언한지 만1주년 되는 날 전세계 주요 언론은 미군이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 수감된 이라크군 포로들에게 끔찍한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는 사실을 주요소식으로 다뤘습니다.
방송을 통해 공개된 사실들을 보면 두들겨 맞은 포로, 검은 두건에 씌인 체 전기 고문의 협박을 받는 포로, 벌거벗겨진 채 군견 세퍼드의 위협을 받으며 층층이 쌓인 포로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성고문을 암시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2004년 5월 28일의 조사결과 보도에 따르면 미군이 이라크 여성 포로를 조직적으로 강간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떤 여성은 하루에 17차례나 강간을 당했으며, 또 다른 여성은 남편 앞에서 미군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자살했으며, 강간 끝에 임신한 여성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라크 주둔 연합군 대변인인 마크 키미트 소장은 이런 사실을 부인했으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포로학대 사태를 조사한 안토니오 타구바 미군 소장의 보고서에는 따르면 이라크 여성 포로를 미군이 강간한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시 정부는 이런 사태를 일부 몰지각한 병사들의 일탈행위로 치부하려 했지만, 2004년 5월 24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최신호에 따르면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에서 자행된 고문과 학대는 ‘코퍼 그린’이라고 불리는 비밀작전계획에 따른 것이었다고 비밀작전계획의 존재를 폭로했습니다. 이 작전계획은 럼스펠트 국방부장관이 사실상 만든 것이며,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승인을 받았고, 부시 대통령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공영 ARD 방송에 따르면 미군은 어린이들도 가두고 고문했으며, 아예 어린이구금시설도 따로 운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에게 세상은 여전히 고통입니다.
정은임의 방송에 내가 공명(共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녀가 설익은 존재였기 때문 일 겁니다. 내가 공명했던 건, 나와 동시대를 살면서 방송사 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하고, 그저 앵무새처럼 쓰여 있는 멘트를 읽어야 했던 설익은 87학번 여대생의 마음, 세상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자기 앞에 주어진 길에서 조금씩 이탈해가는 모습을 보이던 바로 그 정은임이란 존재였기 때문일 겁니다. 정은임을 거부할 수 없으면서도 그도 언젠가는 타협해갈 것이라 섣부르게 짐작하던 나의 짐작이 맞지는 않았습니다. 맞지 않았으나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영화음악 종영과 함께 몇몇 프로그램을 오가며 영화 코너에 단골로 얼굴을 비추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1998년, 결혼하면서 유학길에 올랐었죠. 아들 하나를 낳고, 정은임이 돌아왔습니다. 시니컬한 독설만 내뱉던 나에게 어떤 선배는 말했습니다. "아이를 낳아라! 그것도 가능한한 많이 그러고도 네가 변하지 않으면 널 인정하마."하고... 그 선배는 내게 독설 아닌 독설을 내 뱉었지만, 정은임은 말합니다.
"사람이 보수화되는 가장 큰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거예요. 특히 2세가 생기면 생각이 달라지죠. 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건 할 수 있겠는데 결코 우리 아이에게는 나의 신념을 관철시키지 못할 것 같거든요. <허공에의 질주>를 떠올리며 생각해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요즘은 그게 가장 큰 화두예요."
입으로는 사회주의를 말하면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과외를 시키고, 고급 사립학교에 집어넣지 못해 안달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잃어버린 사상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아프고 슬펐던 건 잃어버린 사상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면서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여자를 잃어버린 뒤부터 사랑하게 된다"던가? 나는 얼마전 어떤 이에게 이런 내용의 대책없는 메일을 띄운 적이 있습니다.
저는 평생에 걸쳐 한 가지 의문에 사로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면 이 아픈 세월들 혹은 상처을 견뎌낼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지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저에겐 커다란 결핍이 있습니다. 그걸 채웠어야만 할 시기에 채우지 못했기에 제 마음은 불구의 사내가 되어 다리를 절고 있습니다. 그래요. 제가 못난 사내라는 거 제가 잘 압니다. 그런 제가 저도 싫습니다. 그런 거 아무리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다들 고마운 덕담 한 마디 해주고 사라질 거란 거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정말 묻고 싶어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누군가를 정말 열렬히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아프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나요?
사랑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데에는 어떤 믿음 - 그것이 인간에 대한 믿음 - 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거짓말장이 사내입니다. 나는 인간을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더이상 배신당할 염려가 없을 때에야 비로소 떠나 보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짓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떠난 뒤에야 그녀의 목소리가 내가 그토록 가슴 아프게 들었던 그 목소리와 겹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린 시절 제가 들었던 1980년 5월 27일 화요일 새벽3시. 세상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 광주의 마지막 밤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걸 말입니다. 정은임! 그 사람 역시 네모지게 작은 박스 안에 고립된 체 그토록 애절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음을 나는 이제사 깨달았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때 늦습니다. <200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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