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your father!
스타워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비단 '다쓰베이더(DarthVader)'가 루크 스카이워커(Luke Skywalker)에게 "I'm your father"라는 명대사를 읊조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다이 기사단 사제 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따지고 보면 군국주의 국가였던 스파르타(Sparta)의 중장보병(hoplites)의 육성책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과 달리 스파르타가 정치체제로서 군국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유시민들보다 피정복 노예인 헬로트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황색저널의 가십거리가 된 스와핑도 따지고 보면 좀더 건강한 전사를 얻기 위한 군국주의 국가 스파르타의 우생학적 배려에서 출발한 것이다. 소수의 시민들이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인 스파르타의 장창 팔랑크스(長槍, phalanx) 밀집대형전법은 좌우의 전우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쉽게 무너지는 전법이었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자신보다 어린 남자 아이들을 사제로, 전우로 길러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남색이었다는 것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전우로서뿐만 아니라 연인으로 사랑했다.
스타워즈에서 루크 스카이워커는 제다이 기사단의 일원으로 혈연상 자신의 아버지인 다쓰 베이더와 대결한다. 의사(擬似, pseudo) 부모인 제다이 기사단, 혹은 공화국의 이념에 충실하기 위해 혈족인 아버지를 죽도록 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가부장의 절대적 권위는 종종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일로 증명된다. 아브라함이 모리야땅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사건은 성서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번제(燔祭, sacrifice)라는 것은 피를 내고, 살을 통째로 불에 태우는 의식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폭군 주(紂)왕이 주(周)의 문왕(文王)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죽이고 국을 끓여 먹도록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아들을 넣고 끓인 국을 받아든 문왕은 그것이 자신의 아들을 죽여 끓인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으나 태연히 국을 마셨다. 문왕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산벌에서 화랑 반굴과 관창이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홀홀단신으로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에 나섰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조차 아들 원술이 생환한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혈연보다 더 높은 상위 개념, 그것이 신이 되었든, 조국이 되었든, 백성을 폭군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한다는 명분이었든 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인류는 공동체를 이루었기에 그 관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때로 천륜이라고, 인륜이라고도 하는 인연을 스스로 번제했던 전통이 있다. 오늘날 국가에서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까닭은 이렇듯 공동체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최소 단위라 하는 가정에서조차 인류는 아버지, 어머니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것이고, 형제간에서는 맏이에게 그런 부담이 주어지곤 한다.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거나, 거미가 제 몸을 새끼들의 먹이로 주거나, 문어가 천적들에게 제 살을 쥐어 뜯기면서도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둥지를 떠나지 않는 것은 종족보존의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것을 좀더 확대시켜 연어 사회 혹은 연어 공동체의 유지라는 식으로 보아, 인간사회에 대입시켜 보더라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어둠의 후예들 - 제국의 역습
우리는 최근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련의 소식들을 접한다. 우리들이 17대 국회에게 기대했던 것은 과거를 털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그것은 현실정치란 측면에서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한 것과 같은 동인(動因)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 정치는 아직도 눈 앞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치, 좀더 큰 안목으로 미래를 보고 새로운 대안을 정치해내는 이념과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의 투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탓에 우리는 김영삼이 노태우와 손잡고, 김대중이 김종필과 손잡고,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아양 떠는 광경을 목격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박정희의 망령이 여전히 우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과거의 망령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과거 청산 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처음 출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승만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일제 강점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반민족 행위자인 친일파들과 손잡고, 미국의 냉전 전략에 놀아나면서, 반공을 국가 최우선 정책으로 놓는 순간부터, 반민특위 과거 친일 세력인 경찰들에게 체포되면서부터 우리 역사는 정의가 불의에 패배하는 역사의 역전이 일어나버렸다. 그렇게 역사가 뒤집혀 버린지도 반세기가 흘렀다.
나는 대통령 탄핵이 통과된 16대 국회를 심판했던 지난 4월 총선을 앞둔 무렵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선생을 뵈올 일이 있었다. 임헌영 선생은 8.15를 해방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해 "8월 15일을 맞아 광복된 것은 우리 민족이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해방 이전 친일파들은 일본이란 상전을 모시고 우리를 지배해 왔지만, 광복 후에는 그나마 상전조차 모시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8.15광복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친일파들의 해방이었다. 그는 이어 재일 동포 작가 김달수의 소설 <태백산맥>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우리의 해방이 지녔던 슬픈 역사적 진실을 들려주었다. "소설 첫 부분에 지금은 국립공원이 된 서대문 형무소를 보여줍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사람이 그곳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는 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던 그들이 불과 몇 달만에 다시 형무소에 끌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맞이한 해방이었다. 우리는 식민지배구조가 고스란히 해방된 공화국의 지배구조가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슬프게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라는 사실을...
물론, 우리 사회에 일제강점 아래 기득권을 누린 지배 엘리트들이 복귀하게 된 데에는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놓고 겨룬 냉전으로 인한 분단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반공이 반민족을 누르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고, 이 땅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보수, 스스로를 민족의식이 강한 이로 자부하면서도 결코 진정한 보수, 진정한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도록 만든 근본 요인이 된다. 세상의 그 어떤 보수, 어떤 우파도 반민족행위자와 한 지붕 아래 그토록 평화롭게 공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친일 지배구조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완전한 자기갱신, 토착화를 이루게 된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으나 한국전쟁 후에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모든 세력을 단 한 마디로 몰아 청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이다. "빨갱이!" 미국은 전후 냉전 체제 아래에서 과거 식민지 경험을 했던 나라는 물론, 나치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서조차 반공이란 단 한 가지 이유로 과거 식민지배 아래에서의 관료, 친나치, 친일파들을 대거 재등용해서 문제의 씨앗을 뿌렸다.
그것은 마치 스타워즈에서 오래도록 어둠의 후예였던 다크 제다이 팔파틴이 공화국 의회의 의원으로 숨어 있다 공화국의 권력을 차지하며 공화국을 제국으로 바꿔가는 것과 흡사하다.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공화국은 식민지배구조와 식민지배이데올로기를 그대로 계승하여 과거 일제 강점기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이 각각 정파를 달리해 정당을 이루며 이전투구했다. 만주관동군 출신의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결코 혁명이 될 수 없었던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렇듯 식민지배구조란 측면만 놓고 보더라도 지배 인물의 교체를 의미할 뿐 그 구조 자체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과거 자신의 전력 때문에라도 더욱 반공제일주의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 박정희의 과거 중 일부 시간대, 특히 일본 패망 이후 그가 관동군에서 광복군으로 넘어오던 시기의 역사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 대원이라는 설, 만주지역의 항일빨치산을 토벌하는 간도 특설대에서 근무했다는 설 모두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 내막이야 어찌되었든 박정희 자신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관동군에 복무했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식민지배구조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지배구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이었던 장발(그는 4.19로 설립된 민주당 내각 수반이었던 장면 총리의 형이다)이 대표적인 친일 화가였음을 안다. 우리의 대표적 한국 화가 이당 김은호가 대표적인 친일 화가였고, 그의 제자 운보 김기창 또한 그러했음을 안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이 그러했음을 안다. 서울대 음대학장이었던 윤제명이, 홍난파가 또한 친일파였음을 안다. 문단의 원로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던 서정주가 그러했음을 안다. 우리 현대 소설의 시초로 불리우는 춘원 이광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이 그러했음을 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게 드러나지 않게 식민지배구조를 공고히 했고, 그들의 학문적 후손들이 지금도 대학 강단에서 다시 우리 사회의 원로로 추앙받고 있음을 안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이유
오이디푸스란 말은 '퉁퉁 부은 발'이란 뜻이다. 그가 퉁퉁 부은 발을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겐 저주의 신탁(神託)이 있었다. 신탁의 내용은 널리 알려진 대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테베의 왕이자 아버지 라이오스는 갓난 아기의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서 키타이론 산중에 내다 버리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이웃한 나라인 코린토스의 목동이 주워다 길러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라난다. 청년이 된 왕자는 자신의 운명을 점치기 위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데 내용은 역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것"이란 거였다. 이에 놀란 왕자는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하며 코린토스를 떠난다. 그는 코린토스의 왕과 왕비를 친부모로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을 피하고자 코린토스를 떠났다. 방랑하던 그는 테베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사소한 시비 끝에 그를 죽이고 마는데, 그 노인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당시 테베는 스핑크스라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고 이를 풀지 못하는 사람을 죽였다. 남편이 죽은 뒤 테베의 여왕이 된 이오카스테는 이 괴물을 죽이는 자에게 왕위는 물론 자신까지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되어 어머니인 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동침한다. 둘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침한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신들의 저주를 받아 테베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돈다. 테베 백성들은 다시 왕에게 달려가 이 사태를 진정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오이디푸스는 신전을 찾아가 신탁을 기다린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여 왕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 자신은 스스로 두 눈을 뽑아 장님이 된 뒤 딸의 이끌림을 받으며 테베를 떠난다.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나 코로노스의 성림(聖林)에서 죽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으로 모두 죽고 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지만 그가 테베를 떠나면서 비로소 테베는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것이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전말이다. 훗날 소포클레스의 비극3부작으로 다뤄지기도 한 이 이야기를 신화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신화는 농경 의식에서 발단한 신화로 '오이디푸스'는 해의 신이고 '이오카스테'는 땅의 신인데, 해의 신은 해마다 어머니 땅의 아들로 태어나 묵은 해인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일구는 지아비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유아 시절 어머니에 대한 독점욕이 만들어낸 공상, 즉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가 독점하고픈 욕망(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오이디푸스가 테베에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일까?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여 공동체를 이룩한 뒤 오늘날까지 많은 금기들이 있어 왔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금기는 바로 근친상간이다. 인류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절대적 규범의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근친상간인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전염병의 창궐에 있었다. 그러나 그 핵심에 놓인 것은 바로 하나의 공동체 사회인 테베의 존속을 위해서는 그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존재의 처벌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공동체이든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규범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것이 민족공동체라면 민족공동체에 있어서 절대적인 규범은 아마 반민족행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민족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오이디푸스를 떠나보내야 한다.
친일 청산과 과거사 규명문제를 바라보며
우리 사회가 일제 강점에서 비롯된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그럼에도 식민지배로 인해 우리가 받은 정신적 외상은 쉽게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반만년이란 장구한 시간동안 나름대로의 문화를 세련되게 일구어 오던 한 민족이 타민족에 의해 지배당했던 기억이 쉽사리 치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이런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고, 우리의 과거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점이 왔다. 우리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식민사학의 잔재들을 극복한다는 목적 의식 아래 우리의 근대를 재구성해왔다. 그에 따라 역사는 종종 이분법으로 논해져 왔는데, 그것은 종종 '침략과 저항', '민족과 반민족', '수탈과 몰락', '타협과 극복', '변절과 지조'와 같은 이분법이라는 단선 구도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과거였던 근대를 온통 흑과 백의 시선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져 해방 이후의 상황은 또 온통 적과 백의 구분만이 있었다. 이 같은 구분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런 구분법이 모두 몰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가치 구분에만 집착하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상관없이 우리들 자신의 역자적 자산을 협소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친일'문제를 지나치게 협소화시켜 바라보고 무의식적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모든 반민족적 죄악을 특정한 인물들에게 집중시키려 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친일'문제를 단지 일개인의 도덕성과 결부된 범죄행위로 치부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친일을 단순히 개인적인 범죄로 치부하 것이 아니라 식민강점시대의 사회적 현상이나 경향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뜻이 절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식민지배로 인해 받았던 트라우마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와지고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 책임을 단지 몇몇 개인에게만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후손이다. 우리들은 모두 족보와 본(本)을 따지는 일에 익숙하다. 작게는 한 가족의 구성원이고, 좀 더 나아가서는 어느 씨족의 몇 대 후손이란 걸 헤아리는 전통 속에 살고 있다.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보다 구체적인 혈연에 의한 연은 민족이나 이의 확장된 개념인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강하다. 거기에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오랜 굴절과 곡절의 역사는 믿을 사람은 역시 가족, 혈연밖에 없다는 의식을 강화시켜 왔다. 그런 까닭에 종종 TV 사극드라마에 등장하는 자신의 조상이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놓고 방송사에 따지고, 드라마 대본을 수정하라는 압력이 가해지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우리에게 친일청산이 어려운 까닭은 친일청산과 과거사 규명 문제가 이렇듯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자기 가족, 자기 가문의 문제로 떨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사퇴 파문을 지켜보면서 들었던 소회는 그런 것이었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바로 내 아버지, 내 할아버지부터 단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대한민국의 태생적 원죄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과거로부터 50여년이 흘렀다. 과거의 독립지사들 중 생존해 계신 분들이 적은 것처럼 이제 과거 친일했던 이들도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지금 과거사를 논하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친일청산을 논하는 이들도,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도 모두 그들의 후손이다. 후손이 논하는 과거사는 신기남 의장의 사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후손의 문제, 자기 선친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될 수 없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 주 문왕이 아들을 죽여 끓인 국물을 마시는 일과 같다.
친일청산과 과거사 규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와 단절한다는 일은 이렇게 자기자신의 살과 뼈를 들어내는 일만큼이나 어렵고,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전짓불을 전짓불로 부르기보다는 종종 '덴찌'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고 편할 때가 있다. 마치 '자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않으면 그 어감이 실감나지 않는 것처럼 내 언어 습관에서 '덴찌'는 편하고 익숙한 말이고 내 나름의 추억이 서린 표현이다. 내 할머니가 전짓불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나는 '덴찌'란 말을 들을 때마다 종종 내 유년의 할머니가 떠오르는 것이다. 내 아버지를 기억하는 고향의 어른들은 지금도 누구 아들이라고 말할 때 아버지의 본명을 대는 것보다 일제 시대 때 불렀던 아명 '쭌짱'을 기억한다. 나 스스로를 그 분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나는 "쭌짱"의 아들이라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과거사를 규정하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할 때 종종 망각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베트남전 당시 우리가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베트남이 아닌 이 땅에서 베트남전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경험한 이들이 베트남전 참전 병사들 자신이란 사실이고, 유신시대 혹은 개발독재 시절 가장 큰 피해자들 역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란 것이다.
그들은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우리가 과거사를 규명하고 청산하려 할 때 종종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지금 그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우리들 자신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과오들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바로 그들의 탯줄이 우리들의 연약한 복부 한복판에 배꼽이란 이름으로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유신시대 개발독재 아래에서 신음하던 그들은 오늘날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우리들에게서 그 시대를 제대로 극복해내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에 대해 겁없이 비판을 가하는 철없는 아이들로 비춘다. 베트남전에서 벌인 잘못을 비판하는 우리들에게서 전쟁이란 비참하기 그지 없는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평화 속에 자라난 철없는 이들의 주장으로 보인다. 우리의 과거사 청산 문제는 이들을 감싸안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현실적 난제를 품고 있다.
종종 과거사 청산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프랑스를 들먹이곤 한다. 프랑스는 독일점령 하에서 나치에 부역했던 이들을 가혹하게 심판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프랑스란 국가 자체가 독일에 합법적으로 항복했으므로 그 국가에 속한 힘없는 국민들이 독일의 전쟁물자를 생산하고, 독일의 군사기지를 건설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연합국이던 영국조차 드골보다는 독일에 항복한 비시 정부를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려 했던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전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점령국 지위를 얻은 것은 도리어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전후에 그런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레지스탕스의 존재 덕이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의 점령에 저항했고,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드골의 망명정부의 존재 역시 프랑스를 독일에 협력한 국가가 아닌 저항한 국가로서의 명예를 유지시켜 주었다.
만약 우리의 상해임시정부가 드골의 망명정부와 같은 지위를 얻었더라면 사태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전후 프랑스는 그들의 지위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독일에 부역한 지식인들에 대해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드골 정부가 경찰은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당시 프랑스 경찰이 상대적으로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던 점도 고려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을 보호하는데 프랑스 경찰이 역할을 인정해 준 점도 크게 작용했다(독일은 비타협적인 프랑스 경찰을 대신해 프랑스 내의 친독분자들을 이용해 자체적인 경찰력을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다). 우리도 프랑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프랑스와 같은 시간대에 친일파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면 문제는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기는 했었다. 바로 반민특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역사는 우리가 희망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미국은 소련과의 체체경쟁이란 냉전 구도 속에서 과거 식민지배 구조 속에 기득권을 얻었던 세력의 지위를 고스란히 인정해주고, 여기에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승만이 취약한 국내기반을 친일세력에서 구축하려 했으므로(이것은 또한 미국의 이해에 부응하는 길이기도 했다) 반민특위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로벤섬에서 배우자!!!
이제 우리는 프랑스식으로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사 청산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 그 해법은 넬슨 만델라가 추진했던 "남아공 진실과 화해위원회(The Activities and Characters of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in the Republic of South Africa)"식의 해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섬 로벤(Robben Island)에서 남아공의 악명높은 인종차별법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다 18년간 복역했다. 넬슨 만델라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으며 고통을 받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원래 흑인들의 땅이었다. 그런 곳을 19세기 네덜란드, 영국의 백인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숫적으로는 다수인 흑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인종분리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해 이 문제는 오늘날 세계의 화약고가 된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차별하는 이주 유대인들의 문제와 흡사하다. 백인들의 흑인 통치 역사는 그토록 잔혹하고 오랜 것이었다. 넬슨 만델라가 프랑스식 과거사 청산을 원했다면 분명 남아공에서는 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분쟁에 휩싸였을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태와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비롯된 우리의 과거사 규명 문제는 우리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환영해야 할 일이지 우려할 일은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뒤늦은 문제이고, 더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에 반드시 규명되지 않으면 안될 일이기도 하다. 정부와 여당은 8월 15일 당정협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행정자치부의 자체 수집자료 등을 취합해 친일인명록과 친일사전 등을 백서형식으로 편찬할 방침을 정했다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앞서 말해온 대로 우리 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개정법안으로 제출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에서는 위원회의 최종 업무의 하나로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하기로 되어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을 2006년까지 발간하기 위해 꾸준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정부가 동일한 내용의 작업을 또 하겠다고 나선 일에 대해서는 정략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
더우기 그간 정부와 여당은 민간부문에서 십수 년간 추진해오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왔다. 지난 16대 국회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친일인명사전 편찬 관련 예산의 전액 삭감)들은 물론 올해에도 "민족문제연구소"가 신청한 "친일인명사전 편찬관련 4차년도(2005년도) 예산 책정"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민족문제연구소는 내년에도 사전 편찬 사업을 국민모금으로 해결해야 할 상황에 처해있다. 정부가 제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이 문제에 나선 것이라고 믿어주고 싶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이다. 이 문제는 단지 정부나 여당이 주장하고 의도하는 대로 단순히 개혁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해관계자 집단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공연한 분란을 자초하고, 민족구성원간의 갈등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대하기 때문에 단순히 현 정부, 현 국회의 차원이 아니라 좀더 거시적 관점(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민간기구의 신설이 필요하다고 본다. 때마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시민연대'와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등 9개 피해자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다. 이들 단체들은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철저한 진상규명 권한을 갖는 통합적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요청"했다. 이제 우리는 많이 늦기는 했으나 과거사 청산을 통해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그로 인한 가해자들의 책임과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야 한다. 또한 과거사 청산은 한 개인에 대한 감정적인 처벌이나 단죄가 아닌 우리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야 했던 과거의 상처들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통한 치유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리어 이승만 정권 이래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점에 달했던 이념에 의한 연좌제 피해문제를 과거사규명에 포함시켜야 한다) 같은 이가 주장하는 데로 친북.용공을 포함하자는 주장은 이미 50여년간에 걸쳐 집단무의식적인 상태에 이를 만큼 가혹하게 처벌되었던 이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짓이며, 냉전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과거사 청산문제의 본질을 흐려 구태의연한 이념논쟁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구태의연한 이념논쟁의 재현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정치권력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독립민간기구의 신설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우리는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였던 역사라는 우리의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였던 우리의 역사를 떳떳하게 되살릴 수 있다. 과거사 청산이란 그렇듯 바로 내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는 자세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04-08-21>
스타워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비단 '다쓰베이더(DarthVader)'가 루크 스카이워커(Luke Skywalker)에게 "I'm your father"라는 명대사를 읊조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다이 기사단 사제 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따지고 보면 군국주의 국가였던 스파르타(Sparta)의 중장보병(hoplites)의 육성책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과 달리 스파르타가 정치체제로서 군국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유시민들보다 피정복 노예인 헬로트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황색저널의 가십거리가 된 스와핑도 따지고 보면 좀더 건강한 전사를 얻기 위한 군국주의 국가 스파르타의 우생학적 배려에서 출발한 것이다. 소수의 시민들이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인 스파르타의 장창 팔랑크스(長槍, phalanx) 밀집대형전법은 좌우의 전우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쉽게 무너지는 전법이었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자신보다 어린 남자 아이들을 사제로, 전우로 길러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남색이었다는 것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전우로서뿐만 아니라 연인으로 사랑했다.
스타워즈에서 루크 스카이워커는 제다이 기사단의 일원으로 혈연상 자신의 아버지인 다쓰 베이더와 대결한다. 의사(擬似, pseudo) 부모인 제다이 기사단, 혹은 공화국의 이념에 충실하기 위해 혈족인 아버지를 죽도록 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가부장의 절대적 권위는 종종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일로 증명된다. 아브라함이 모리야땅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사건은 성서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번제(燔祭, sacrifice)라는 것은 피를 내고, 살을 통째로 불에 태우는 의식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폭군 주(紂)왕이 주(周)의 문왕(文王)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죽이고 국을 끓여 먹도록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아들을 넣고 끓인 국을 받아든 문왕은 그것이 자신의 아들을 죽여 끓인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으나 태연히 국을 마셨다. 문왕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주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산벌에서 화랑 반굴과 관창이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홀홀단신으로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에 나섰고,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조차 아들 원술이 생환한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혈연보다 더 높은 상위 개념, 그것이 신이 되었든, 조국이 되었든, 백성을 폭군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한다는 명분이었든 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인류는 공동체를 이루었기에 그 관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때로 천륜이라고, 인륜이라고도 하는 인연을 스스로 번제했던 전통이 있다. 오늘날 국가에서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까닭은 이렇듯 공동체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최소 단위라 하는 가정에서조차 인류는 아버지, 어머니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것이고, 형제간에서는 맏이에게 그런 부담이 주어지곤 한다.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오르거나, 거미가 제 몸을 새끼들의 먹이로 주거나, 문어가 천적들에게 제 살을 쥐어 뜯기면서도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 둥지를 떠나지 않는 것은 종족보존의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것을 좀더 확대시켜 연어 사회 혹은 연어 공동체의 유지라는 식으로 보아, 인간사회에 대입시켜 보더라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어둠의 후예들 - 제국의 역습
우리는 최근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일련의 소식들을 접한다. 우리들이 17대 국회에게 기대했던 것은 과거를 털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그것은 현실정치란 측면에서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한 것과 같은 동인(動因)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 정치는 아직도 눈 앞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정치, 좀더 큰 안목으로 미래를 보고 새로운 대안을 정치해내는 이념과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의 투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탓에 우리는 김영삼이 노태우와 손잡고, 김대중이 김종필과 손잡고, 노무현이 전두환에게 아양 떠는 광경을 목격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박정희의 망령이 여전히 우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과거의 망령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과거 청산 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처음 출발부터 잘못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승만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일제 강점 아래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반민족 행위자인 친일파들과 손잡고, 미국의 냉전 전략에 놀아나면서, 반공을 국가 최우선 정책으로 놓는 순간부터, 반민특위 과거 친일 세력인 경찰들에게 체포되면서부터 우리 역사는 정의가 불의에 패배하는 역사의 역전이 일어나버렸다. 그렇게 역사가 뒤집혀 버린지도 반세기가 흘렀다.
나는 대통령 탄핵이 통과된 16대 국회를 심판했던 지난 4월 총선을 앞둔 무렵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선생을 뵈올 일이 있었다. 임헌영 선생은 8.15를 해방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해 "8월 15일을 맞아 광복된 것은 우리 민족이 아니라 친일파들"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해방 이전 친일파들은 일본이란 상전을 모시고 우리를 지배해 왔지만, 광복 후에는 그나마 상전조차 모시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8.15광복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친일파들의 해방이었다. 그는 이어 재일 동포 작가 김달수의 소설 <태백산맥>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우리의 해방이 지녔던 슬픈 역사적 진실을 들려주었다. "소설 첫 부분에 지금은 국립공원이 된 서대문 형무소를 보여줍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사람이 그곳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는 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던 그들이 불과 몇 달만에 다시 형무소에 끌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맞이한 해방이었다. 우리는 식민지배구조가 고스란히 해방된 공화국의 지배구조가 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슬프게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건국 신화라는 사실을...
물론, 우리 사회에 일제강점 아래 기득권을 누린 지배 엘리트들이 복귀하게 된 데에는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놓고 겨룬 냉전으로 인한 분단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반공이 반민족을 누르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고, 이 땅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보수, 스스로를 민족의식이 강한 이로 자부하면서도 결코 진정한 보수, 진정한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도록 만든 근본 요인이 된다. 세상의 그 어떤 보수, 어떤 우파도 반민족행위자와 한 지붕 아래 그토록 평화롭게 공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친일 지배구조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완전한 자기갱신, 토착화를 이루게 된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으나 한국전쟁 후에는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모든 세력을 단 한 마디로 몰아 청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이다. "빨갱이!" 미국은 전후 냉전 체제 아래에서 과거 식민지 경험을 했던 나라는 물론, 나치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서조차 반공이란 단 한 가지 이유로 과거 식민지배 아래에서의 관료, 친나치, 친일파들을 대거 재등용해서 문제의 씨앗을 뿌렸다.
그것은 마치 스타워즈에서 오래도록 어둠의 후예였던 다크 제다이 팔파틴이 공화국 의회의 의원으로 숨어 있다 공화국의 권력을 차지하며 공화국을 제국으로 바꿔가는 것과 흡사하다.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공화국은 식민지배구조와 식민지배이데올로기를 그대로 계승하여 과거 일제 강점기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이 각각 정파를 달리해 정당을 이루며 이전투구했다. 만주관동군 출신의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결코 혁명이 될 수 없었던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렇듯 식민지배구조란 측면만 놓고 보더라도 지배 인물의 교체를 의미할 뿐 그 구조 자체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과거 자신의 전력 때문에라도 더욱 반공제일주의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 박정희의 과거 중 일부 시간대, 특히 일본 패망 이후 그가 관동군에서 광복군으로 넘어오던 시기의 역사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 대원이라는 설, 만주지역의 항일빨치산을 토벌하는 간도 특설대에서 근무했다는 설 모두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 내막이야 어찌되었든 박정희 자신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관동군에 복무했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식민지배구조는 단순히 정치/경제적인 지배구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이었던 장발(그는 4.19로 설립된 민주당 내각 수반이었던 장면 총리의 형이다)이 대표적인 친일 화가였음을 안다. 우리의 대표적 한국 화가 이당 김은호가 대표적인 친일 화가였고, 그의 제자 운보 김기창 또한 그러했음을 안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이 그러했음을 안다. 서울대 음대학장이었던 윤제명이, 홍난파가 또한 친일파였음을 안다. 문단의 원로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던 서정주가 그러했음을 안다. 우리 현대 소설의 시초로 불리우는 춘원 이광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이 그러했음을 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게 드러나지 않게 식민지배구조를 공고히 했고, 그들의 학문적 후손들이 지금도 대학 강단에서 다시 우리 사회의 원로로 추앙받고 있음을 안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이유
오이디푸스란 말은 '퉁퉁 부은 발'이란 뜻이다. 그가 퉁퉁 부은 발을 갖게 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에겐 저주의 신탁(神託)이 있었다. 신탁의 내용은 널리 알려진 대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테베의 왕이자 아버지 라이오스는 갓난 아기의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서 키타이론 산중에 내다 버리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이웃한 나라인 코린토스의 목동이 주워다 길러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라난다. 청년이 된 왕자는 자신의 운명을 점치기 위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데 내용은 역시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할 것"이란 거였다. 이에 놀란 왕자는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하며 코린토스를 떠난다. 그는 코린토스의 왕과 왕비를 친부모로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을 피하고자 코린토스를 떠났다. 방랑하던 그는 테베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사소한 시비 끝에 그를 죽이고 마는데, 그 노인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였다. 당시 테베는 스핑크스라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고 이를 풀지 못하는 사람을 죽였다. 남편이 죽은 뒤 테베의 여왕이 된 이오카스테는 이 괴물을 죽이는 자에게 왕위는 물론 자신까지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되어 어머니인 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동침한다. 둘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침한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신들의 저주를 받아 테베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돈다. 테베 백성들은 다시 왕에게 달려가 이 사태를 진정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오이디푸스는 신전을 찾아가 신탁을 기다린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여 왕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 자신은 스스로 두 눈을 뽑아 장님이 된 뒤 딸의 이끌림을 받으며 테베를 떠난다.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나 코로노스의 성림(聖林)에서 죽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으로 모두 죽고 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지만 그가 테베를 떠나면서 비로소 테베는 안정을 되찾게 된다. 그것이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전말이다. 훗날 소포클레스의 비극3부작으로 다뤄지기도 한 이 이야기를 신화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신화는 농경 의식에서 발단한 신화로 '오이디푸스'는 해의 신이고 '이오카스테'는 땅의 신인데, 해의 신은 해마다 어머니 땅의 아들로 태어나 묵은 해인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일구는 지아비가 되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유아 시절 어머니에 대한 독점욕이 만들어낸 공상, 즉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가 독점하고픈 욕망(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오이디푸스가 테베에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일까?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여 공동체를 이룩한 뒤 오늘날까지 많은 금기들이 있어 왔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금기는 바로 근친상간이다. 인류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절대적 규범의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근친상간인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를 떠난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전염병의 창궐에 있었다. 그러나 그 핵심에 놓인 것은 바로 하나의 공동체 사회인 테베의 존속을 위해서는 그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존재의 처벌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공동체이든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규범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만약 그것이 민족공동체라면 민족공동체에 있어서 절대적인 규범은 아마 반민족행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민족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오이디푸스를 떠나보내야 한다.
친일 청산과 과거사 규명문제를 바라보며
우리 사회가 일제 강점에서 비롯된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그럼에도 식민지배로 인해 우리가 받은 정신적 외상은 쉽게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반만년이란 장구한 시간동안 나름대로의 문화를 세련되게 일구어 오던 한 민족이 타민족에 의해 지배당했던 기억이 쉽사리 치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이런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고, 우리의 과거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점이 왔다. 우리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식민사학의 잔재들을 극복한다는 목적 의식 아래 우리의 근대를 재구성해왔다. 그에 따라 역사는 종종 이분법으로 논해져 왔는데, 그것은 종종 '침략과 저항', '민족과 반민족', '수탈과 몰락', '타협과 극복', '변절과 지조'와 같은 이분법이라는 단선 구도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과거였던 근대를 온통 흑과 백의 시선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져 해방 이후의 상황은 또 온통 적과 백의 구분만이 있었다. 이 같은 구분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런 구분법이 모두 몰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가치 구분에만 집착하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상관없이 우리들 자신의 역자적 자산을 협소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친일'문제를 지나치게 협소화시켜 바라보고 무의식적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모든 반민족적 죄악을 특정한 인물들에게 집중시키려 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친일'문제를 단지 일개인의 도덕성과 결부된 범죄행위로 치부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친일을 단순히 개인적인 범죄로 치부하 것이 아니라 식민강점시대의 사회적 현상이나 경향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뜻이 절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식민지배로 인해 받았던 트라우마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와지고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 책임을 단지 몇몇 개인에게만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후손이다. 우리들은 모두 족보와 본(本)을 따지는 일에 익숙하다. 작게는 한 가족의 구성원이고, 좀 더 나아가서는 어느 씨족의 몇 대 후손이란 걸 헤아리는 전통 속에 살고 있다.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보다 구체적인 혈연에 의한 연은 민족이나 이의 확장된 개념인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강하다. 거기에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오랜 굴절과 곡절의 역사는 믿을 사람은 역시 가족, 혈연밖에 없다는 의식을 강화시켜 왔다. 그런 까닭에 종종 TV 사극드라마에 등장하는 자신의 조상이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놓고 방송사에 따지고, 드라마 대본을 수정하라는 압력이 가해지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우리에게 친일청산이 어려운 까닭은 친일청산과 과거사 규명 문제가 이렇듯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자기 가족, 자기 가문의 문제로 떨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사퇴 파문을 지켜보면서 들었던 소회는 그런 것이었다.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바로 내 아버지, 내 할아버지부터 단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대로 대한민국의 태생적 원죄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과거로부터 50여년이 흘렀다. 과거의 독립지사들 중 생존해 계신 분들이 적은 것처럼 이제 과거 친일했던 이들도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지금 과거사를 논하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친일청산을 논하는 이들도,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도 모두 그들의 후손이다. 후손이 논하는 과거사는 신기남 의장의 사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후손의 문제, 자기 선친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될 수 없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 주 문왕이 아들을 죽여 끓인 국물을 마시는 일과 같다.
친일청산과 과거사 규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와 단절한다는 일은 이렇게 자기자신의 살과 뼈를 들어내는 일만큼이나 어렵고,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전짓불을 전짓불로 부르기보다는 종종 '덴찌'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고 편할 때가 있다. 마치 '자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않으면 그 어감이 실감나지 않는 것처럼 내 언어 습관에서 '덴찌'는 편하고 익숙한 말이고 내 나름의 추억이 서린 표현이다. 내 할머니가 전짓불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나는 '덴찌'란 말을 들을 때마다 종종 내 유년의 할머니가 떠오르는 것이다. 내 아버지를 기억하는 고향의 어른들은 지금도 누구 아들이라고 말할 때 아버지의 본명을 대는 것보다 일제 시대 때 불렀던 아명 '쭌짱'을 기억한다. 나 스스로를 그 분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나는 "쭌짱"의 아들이라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과거사를 규정하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할 때 종종 망각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베트남전 당시 우리가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베트남이 아닌 이 땅에서 베트남전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경험한 이들이 베트남전 참전 병사들 자신이란 사실이고, 유신시대 혹은 개발독재 시절 가장 큰 피해자들 역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란 것이다.
그들은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우리가 과거사를 규명하고 청산하려 할 때 종종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지금 그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우리들 자신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과오들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바로 그들의 탯줄이 우리들의 연약한 복부 한복판에 배꼽이란 이름으로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유신시대 개발독재 아래에서 신음하던 그들은 오늘날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우리들에게서 그 시대를 제대로 극복해내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에 대해 겁없이 비판을 가하는 철없는 아이들로 비춘다. 베트남전에서 벌인 잘못을 비판하는 우리들에게서 전쟁이란 비참하기 그지 없는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평화 속에 자라난 철없는 이들의 주장으로 보인다. 우리의 과거사 청산 문제는 이들을 감싸안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현실적 난제를 품고 있다.
종종 과거사 청산 문제를 이야기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프랑스를 들먹이곤 한다. 프랑스는 독일점령 하에서 나치에 부역했던 이들을 가혹하게 심판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프랑스란 국가 자체가 독일에 합법적으로 항복했으므로 그 국가에 속한 힘없는 국민들이 독일의 전쟁물자를 생산하고, 독일의 군사기지를 건설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연합국이던 영국조차 드골보다는 독일에 항복한 비시 정부를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려 했던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전후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점령국 지위를 얻은 것은 도리어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전후에 그런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레지스탕스의 존재 덕이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의 점령에 저항했고,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드골의 망명정부의 존재 역시 프랑스를 독일에 협력한 국가가 아닌 저항한 국가로서의 명예를 유지시켜 주었다.
만약 우리의 상해임시정부가 드골의 망명정부와 같은 지위를 얻었더라면 사태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전후 프랑스는 그들의 지위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독일에 부역한 지식인들에 대해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드골 정부가 경찰은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당시 프랑스 경찰이 상대적으로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던 점도 고려되었지만 프랑스 국민들을 보호하는데 프랑스 경찰이 역할을 인정해 준 점도 크게 작용했다(독일은 비타협적인 프랑스 경찰을 대신해 프랑스 내의 친독분자들을 이용해 자체적인 경찰력을 만들어 활용하기도 했다). 우리도 프랑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프랑스와 같은 시간대에 친일파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면 문제는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기는 했었다. 바로 반민특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역사는 우리가 희망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미국은 소련과의 체체경쟁이란 냉전 구도 속에서 과거 식민지배 구조 속에 기득권을 얻었던 세력의 지위를 고스란히 인정해주고, 여기에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승만이 취약한 국내기반을 친일세력에서 구축하려 했으므로(이것은 또한 미국의 이해에 부응하는 길이기도 했다) 반민특위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로벤섬에서 배우자!!!
이제 우리는 프랑스식으로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사 청산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 그 해법은 넬슨 만델라가 추진했던 "남아공 진실과 화해위원회(The Activities and Characters of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in the Republic of South Africa)"식의 해법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섬 로벤(Robben Island)에서 남아공의 악명높은 인종차별법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다 18년간 복역했다. 넬슨 만델라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으며 고통을 받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원래 흑인들의 땅이었다. 그런 곳을 19세기 네덜란드, 영국의 백인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숫적으로는 다수인 흑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인종분리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말해 이 문제는 오늘날 세계의 화약고가 된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차별하는 이주 유대인들의 문제와 흡사하다. 백인들의 흑인 통치 역사는 그토록 잔혹하고 오랜 것이었다. 넬슨 만델라가 프랑스식 과거사 청산을 원했다면 분명 남아공에서는 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분쟁에 휩싸였을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태와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 비롯된 우리의 과거사 규명 문제는 우리 민족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환영해야 할 일이지 우려할 일은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뒤늦은 문제이고, 더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에 반드시 규명되지 않으면 안될 일이기도 하다. 정부와 여당은 8월 15일 당정협의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행정자치부의 자체 수집자료 등을 취합해 친일인명록과 친일사전 등을 백서형식으로 편찬할 방침을 정했다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앞서 말해온 대로 우리 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개정법안으로 제출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에서는 위원회의 최종 업무의 하나로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하기로 되어 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을 2006년까지 발간하기 위해 꾸준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삼스럽게 정부가 동일한 내용의 작업을 또 하겠다고 나선 일에 대해서는 정략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
더우기 그간 정부와 여당은 민간부문에서 십수 년간 추진해오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왔다. 지난 16대 국회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친일인명사전 편찬 관련 예산의 전액 삭감)들은 물론 올해에도 "민족문제연구소"가 신청한 "친일인명사전 편찬관련 4차년도(2005년도) 예산 책정"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민족문제연구소는 내년에도 사전 편찬 사업을 국민모금으로 해결해야 할 상황에 처해있다. 정부가 제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이 문제에 나선 것이라고 믿어주고 싶어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처사이다. 이 문제는 단지 정부나 여당이 주장하고 의도하는 대로 단순히 개혁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해관계자 집단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공연한 분란을 자초하고, 민족구성원간의 갈등을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대하기 때문에 단순히 현 정부, 현 국회의 차원이 아니라 좀더 거시적 관점(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민간기구의 신설이 필요하다고 본다. 때마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시민연대'와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등 9개 피해자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다. 이들 단체들은 "독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철저한 진상규명 권한을 갖는 통합적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요청"했다. 이제 우리는 많이 늦기는 했으나 과거사 청산을 통해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그로 인한 가해자들의 책임과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야 한다. 또한 과거사 청산은 한 개인에 대한 감정적인 처벌이나 단죄가 아닌 우리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야 했던 과거의 상처들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통한 치유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리어 이승만 정권 이래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점에 달했던 이념에 의한 연좌제 피해문제를 과거사규명에 포함시켜야 한다) 같은 이가 주장하는 데로 친북.용공을 포함하자는 주장은 이미 50여년간에 걸쳐 집단무의식적인 상태에 이를 만큼 가혹하게 처벌되었던 이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짓이며, 냉전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과거사 청산문제의 본질을 흐려 구태의연한 이념논쟁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바로 그런 구태의연한 이념논쟁의 재현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정치권력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독립민간기구의 신설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우리는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였던 역사라는 우리의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였던 우리의 역사를 떳떳하게 되살릴 수 있다. 과거사 청산이란 그렇듯 바로 내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는 자세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0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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