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공자가 말씀하길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려면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여 믿음을 얻어야 하며, 쓰는 것을 절약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그 때를 살펴야 한다.”
때마침 용산4구역의 철거민들이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시점에서 공자의 말씀을 읽는 마음이 착잡하다.
천승지국(千乘之國)이란 말 4필이 모는 전차 1,000대를 운용할 수 있는 규모의 나라, 다시 말해 제법 봉토가 큰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을 말한다. 천자는 만승(萬乘)이요, 제후는 천승(千乘), 대부는 백승(百乘)이라 했다. 소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1년에 천 평의 땅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말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산업혁명이 무르익을 무렵 영국 탄광지역에서 선로가 만들어졌다. 중세후기부터 이미 광산 갱도에 선로를 깔아 이용했는데, 당시에 화차를 움직이는 것은 말이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계산에 따르면 말 한 마리를 먹이는 데는 8명의 노동자가 소비하는 식품을 사는 것과 같은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된 까닭도 결국 말을 먹이는 사료 값이 너무 비싸다는 문제에서 비롯됐다. 말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대략 4~5에이커(1에이커는 1,224평)의 농경지가 필요했다.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1승(乘)에는 말의 유지비용만 막대한 것이 아니라 뒤따르는 병사의 수도 엄청났다. 갑사(甲士) 3명, 보졸(步卒) 72명, 취사병 10명, 피복담당 5명, 말 담당(수송) 5명, 땔나무와 물 담당 5명하여 모두 100여명의 병사가 전차 1승을 보조하기 위해 출전해야만 했다. 그런 전차가 1,000대라 하니 당시 제후가 차지하고 있는 봉토(封土)와 경제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인류는 "생산성향상"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곧이어 불을 사용하게 되고, 마침내 농경사회에 와서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 "향상된 생산성"으로 사람의 힘만으로 경작하던 농경지보다 훨씬 큰 면적의 농경지를 황소를 이용하여 경작하게 되었다. 생활의 면적이 넓어지다 보니 효율적인 운송수단이 필요하게 되었고, "말"이 보편적인 (그러나 "운용"의 비용 때문에 부자와 국가만이 소유하게 되는) 운송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말 한 마리를 먹이기 위해서는 대략 4-5에이커의 경작지가 필요했고, 여기서 생산된 곡식은 모두 말을 먹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1900년대 영국에서는 약 350만 마리의 말들이 약 400만 톤의 귀리와 건초를 먹어치웠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전체 농경지의 약 1/4을 말 사료를 기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리처드 하인버그, 신현승 옮김, 『파티는 끝났다』, 시공사>
공자는 이 정도 규모의 나라를 통치하는 제후라면 매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여, 백성의 믿음을 얻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백성들을 공역을 시킬 때는 농번기를 피해 적절한 시기를 골라 피해가 최소한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공자의 애민(愛民)의식은 「안연(顔淵)」편 7장에서 자공과의 문답에서도 잘 드러난다.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 何先 曰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먹을 것을 충족시키고, 군사를 충분히 갖추며, 백성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말하길 “만일 부득이하여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사를 버려야 할 것이다.” 자공이 말하길 “만일 부득이하여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먹을 것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백성이 믿지 않는다면 정치는 설 수 없게 된다.”
공자와 같은 춘추시대의 사람으로 관중(管仲)이 있다. 그는 공자보다 1세기 정도 앞서 살았던 사상가인데 그의 언행을 모은 책이 바로 『관자(管子)』이다. 흔히 그를 실용주의 제왕학(帝王學)의 대부라 할 만큼 관중은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던 것으로 유명하다. “곳간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관중의 한 마디는 그의 정치철학이 무엇이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보다 1세기 전의 인물이자 명재상으로 이름을 높였던 관중의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 버렸다.
과연 ‘공자왈, 맹자왈’하는 공자답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공자가 먹고 사는 것을 등한히 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중에 「술이(述而)」편 <執鞭之士>를 이야기할 때 다시 말하겠지만 공자는 경제가 통치자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경제가 통치자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통치자가 백성의 배를 주리도록 할 것이며, 마음먹은 대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누가 부자 되기를 싫어하겠는가? 그래서 경제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도 경제는 역시 중요했지만 농경사회인 중국은 예측할 수 없는 기후의 변화와 발전하지 못한 과학기술로 인해 홍수와 가뭄으로 한 해 농사를 망치기가 부지기수였다.
그와 같은 위기 국면은 통치자가 원한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과연 당신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관중이 명재상이었던 까닭은 단지 실용주의만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백성에게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는 먼저 통치자 자신이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 “주는 것은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은, 정사의 보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성과의 소통에 능한 인물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 대한민국의 통치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