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謨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가 말하길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스스로를 살핀다. 남을 위해 일함에 있어 진실로 성의를 다하였는가? 벗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다하였는가? 배운 바를 익히지 아니하였는가?"
사마천의 『사기(史記)』 「공자세가」편에는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었는데, 그 중에 육예(六藝)에 통달한 이는 72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본래 육예란 공자가 흠모해 마지않던 주(周)나라 시대에 행해지던 교육과목이었는데,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등 여섯 가지의 기술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기』에서 말하는 육예란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라 하여 사대부의 기초적인 교양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육경(六經)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육예에 통달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하지만 역시 『사기』의 「중니제자열전」편에는 공자로부터 학문을 이어받아 이에 통달한 제자가 77명이라고 한다. 육예에 통달한 제자와 공자의 학문을 이어받은 제자가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공자의 제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료들마다 공자의 주요 제자들을 대략 70명에서 80명 이내였던 것으로 적고 있다. 어쨌든 『논어』에 이름이 나오는 제자는 27명이다. 『논어』 「선진(先進)」편 2장에는 공자가 ‘진채(陳蔡)’(진나라와 채나라)의 들판에서 위난을 당하였을 때 함께 했던 제자들 10명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부른다.
공자는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또 여기에 나오는 덕행·언어·정사·문학을 사과(四科)라고 한다. 하지만 공문십철에는 공자의 가장 중요한 제자 중 한 명인 증자가 빠져 있고, 또 공자가 평소 덕행을 강조하긴 했지만, 언어, 정사, 문학 등을 그다지 강조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 말이 공자의 말이 아닐 것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증자(曾子, BC 506~BC 436)가 얼마나 중요한 제자였기에 그가 빠졌다고 해서 공문십철(孔門十哲)이 후세의 위작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까? 증자는 공자 만년의 제자로 그와는 나이 차이가 46세에 이르렀다. 이름은 삼(參)이고, 자는 자여(子輿)로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지금의 산둥성(山東省)에서 증점(曾點)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자에 대한 인물평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무척이나 신중하고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 중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시장에 따라가려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시장에 다녀온 뒤 돼지를 잡아 삶아주겠노라 약속을 했다. 아내가 거짓으로 약속하는 것을 지켜본 증자는 부모가 자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녀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 하여 실제 약속대로 돼지를 잡아 삶아주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증자가 「학이」편 4장의 ‘충(忠)’이란 말을 실제 생활에서도 실천에 옮겼던 인물이란 반증이기도 하다. 본래 충이란 입(口)과 마음(心)을 하나로 꿰뚫는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다시 말해 ‘속에 있는 마음’과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 꾸밈없이 진실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지닌 본성(本性)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참다운 마음을 뜻한다. 증자는 공자의 사후에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였고, 그를 통해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 『中庸』의 저자라고 알려진 - 에게 이르렀고, 다시 맹자(孟子)에게 전승된다. 훗날 증자는 동양의 5성 중 하나로 높이 받들어진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들 중 비교적 늦게 합류한 편이었지만 공자의 생전에 제자들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고 말했는데, 제자들 중 누구도 그 말의 참뜻을 몰라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증자만은 선뜻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에 전해진다.
앞서 공문십철이 후세에 더해진 이야기라는 평이 있다고 했는데, 비록 증자가 공자의 중요한 제자였고, 법통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만년의 제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생했던 제자들의 이름 속에 증자가 빠져 있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공자가 언어, 정사, 문학 등을 강조한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은 사실이다. 증자는 공자의 사후 유가의 법통을 잇는 가장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였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자의 다른 제자들과 공자의 법통을 잇기 위한 경쟁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논어』가 집대성된 것이 송(宋)대의 일이고, 실제 『논어』의 편찬자들이 대개는 증자의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라 할 때 증자에 대한 평가가 『논어』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부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봄직하다.
다른 한 편으로 증자가 『효경(孝經)』의 저자라는 설이 유력한데, 증자는 당시 이미 붕괴되고 있던 씨족 중심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봉건제)를 ‘효’라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저지하고자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학이」 4장의 해석에 있어 앞의 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큰 이견이 없는데 반해 “傳不習乎”의 풀이에서는 ‘傳’의 해석의 차이 때문에 뜻의 차이가 제법 큰 편이다. “傳不習乎”를 ‘배운 바를 익히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해석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라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논어』를 해석하는 방식에서 위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를 따르는 것을 고주(古注)라 하고, 주자의 『논어집주』를 따르는 것을 신주(新注)라 하는데 고주에서는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로 해석하고, 신주에서는 ‘배운 바를 익히지 아니하였는가?’로 풀이하고 있다. 다산의 『논어고금주』에서도 주자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한편 퇴계(退溪)는 ‘전하고서 익히지 아니하는가?’로 해석했다고 한다. 『대한화사전』을 편찬한 일본의 모로하시 데쓰지는 고주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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